삼보감통록

삼보감통록

분류 문학 > 문화 > 서적

기본정보

당의 승려인 도선의 저작으로 불교 관련 감통들을 수록한 책

일반정보

당의 승려인 도선의 저작으로 불교 관련 감통들을 수록하였으며 『삼국유사』에 있는 요동성육왕탑 설화는 여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조에서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을 인용하여 고구려(高麗) 요동성(遼東城) 곁에 탑이 있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그 탑이 아육왕(阿育王)과 관련된 육왕탑(育王塔)이라고 불리며, 아육왕[育王]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에는 곳곳에 탑이 세워졌다는 내용을 언급하였다. 또한 고전(古傳)을 인용하여 아육왕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령하여 9억명의 사람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를 세우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염부계(閻浮界) 내에 8만 4천개의 탑이 세워졌다는 내용도 전한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의 정식명칭은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이며, 당의 승려인 도선(道宣 : 596~667)이 664년에 찬한 저작이다. 도선은 당시 중국 율종(律宗)의 대가로 저명한 불교사학자이기도 하였다. 도선은 책 첫머리에 삼보(三寶)가 신령스러우며 사람들에게 믿음을 생기게 함을 언급하고, 그에 대한 요점을 기록하기 위해 『삼보감통록』을 지었음을 천명하였다. 그에 따라 여기서는 중국의 후한 때부터 당나라 초에 이르는 600여 년간에 있었던 불교의 삼보인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에 얽힌 감통을 기록하였다. 이 책은 상·중·하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권은 사리표탑(舍利表塔)에 관한 내용으로 주로 부처의 사리와 탑에 얽힌 연기(緣起)를 밝혔으며, 중권은 부처나 보살의 영험한 상[靈像]이 드리워 내려온 내용, 하권은 성스러운 절[聖寺]이나 경전[瑞經], 승려[神僧]에 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삼국유사』에 있는 『삼보감통록』의 구절은 『삼보감통록』 상권의 「잡명신주산천장보등연이십(雜明神州山川藏寶等緣二十)」과 중권의 「당요구산붕자연출상연오십(唐遼口山崩自然出像緣五十)」에서 인용한 것이다. 내용은 동일하나 글자에 상이(相異)가 있다.「잡명신주산천장보등연」에서는 신주(神州-중국)의 산천에 숨겨진 여러 보물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고려 요동성 곁에 있었던 탑도 그 중의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그리고 「당요구산붕자연출상연」은 요동에 있던 산에서 불상이 나온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앞에서와 같이 『삼보감통록』에 있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모두 우자함[右函]에 있다는 세주를 넣었다. 정덕본(正德本)『삼국유사』에서는 “구재약함(具在若函)”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약(若)”은 “우(右)”의 오각(誤刻)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천자문의 약함은 283번의 함인데, 『삼보감통록』은 465번의 “우함(右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유사』 찬술시에는 이미 『고려대장경』이 완성되었으므로 이 함차(函次)를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만 새로 발견된 『감지금자대보적경(紺紙金字大寶積經)』 권32의 경우 천자문 76번째 글자인 “제(帝)”의 함차를 적었으나 『고려대장경』 가운데 대보적경 제32권은 천자문 75번째 글자인 “화(火)”이므로 여기서 1자의 차이가 난다.(장충식, 1992)

참고문헌

장충식, 1992, 「高麗金銀字大藏經」『韓國佛敎思想史』下, 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요동성육왕탑)
遼東城育王塔
三寶感通錄載 高麗遼東城傍塔者 古老傳云 昔高麗聖王按行國界次 至此城 見五色雲覆地 往尋雲中 有僧執錫而立 旣至便滅 遠看還現 傍有土塔三重 上如覆釜 不知是何 更往覓僧 唯有荒草 掘尋一丈 得杖幷履 又掘得銘 上有梵書 侍臣識之 云是佛塔 王委曲問詰 答曰 漢國有之 彼名蒲圖王[本作休屠王 祭天金人] 因生信 起木塔七重 後佛法始至 具知始末 今更損高 本塔朽壞 育王所統一閻浮提洲 處處立塔 不足可怪 又唐龍朔中 有事遼<左>行軍薛仁貴 行至隋主討遼古地 乃見山像 空曠蕭條 絶於行往 問古老云 是先代所現 便圖寫來京師[具在<右>函] 按西漢與三國地理志 遼東城在鴨綠之外屬漢幽州 高麗聖王 未知何君 或云東明聖帝 疑非也 東明以前漢元帝建昭二年卽位 成帝鴻嘉壬寅升遐 于時漢亦未見<貝>葉 何得海外陪臣 已能識梵書乎 然稱佛爲蒲圖王 似在西漢之時 西域文字或有識之者 故云梵書爾 按古傳 育王命鬼徒 每於九億人居地 立一塔 如是起八萬四千於閻浮界內 藏於巨石中 今處處有現瑞非一 蓋眞身舍利 感應難思矣 讚曰 育王寶塔遍塵寰 雨濕雲埋蘚纈<斑>想像當年行路眼 幾人指點祭神墦

요동성의 육왕탑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고려(高麗,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곁의 탑은 옛 노인들이 전하여 말하기를, 옛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 가서 구름 속을 찾아보니 한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서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문득 사라지고 멀리서보면 다시 나타났다. (스님의) 곁에는 3층의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상단은 솥을 덮은 것 같았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스님을 찾아보니 다만 거친 풀만 있을 뿐이었다. (그곳을) 한 장(丈)정도 파서 찾아보니 지팡이와 신발을 얻을 수 있었고, 또 파서 명문(銘文)을 얻었는데, 명문 위에는 범서(梵書)가 있었다. 시종하는 신하가 알아보고 이것이 불탑이라고 말하였다. 왕이 자세히 물어보니 답해서 말하기를, (이것은) 한국(漢國)에 있었는데,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본래는 휴도왕(休屠王)이라고 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이다]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왕은) 이로 인하여 믿음이 생겨서 7층 목탑을 세웠는데 후에 불법이 비로소 전해지자 그 시말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탑의) 높이가 줄어서 본래 탑이 썩어서 무너졌다. 육왕(育王, 아육왕, 재위 기원전 268-232)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에는 곳곳에 탑이 세워졌으니 괴이할 것이 없다. 또 당(唐) 용삭(龍朔) 연간(661-663) 중에 요동의 좌측에 전쟁이 있을 때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가 수(隋)의 황제가 토벌한 요동의 옛 땅에 이르렀다. (그가) 이내 산의 모습이 텅 비어 매우 쓸쓸하여 사람의 왕래가 끊어진 것을 보고 늙은이에게 물었다. 늙은이가 답하기를 이는 옛날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므로 (그것을) 그려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모두 우자함(右函)에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三國)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鴨綠)의 밖에 있어 한(漢)의 유주(幽州)에 속하는데, 고구려의 성왕(聖王)은 어떤 임금인지 알 수 없다. 혹 동명성제(東明聖帝, 동명성왕, 재위 기원전 37-19)라고도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명은 전한(前漢)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 49-33)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성제(成帝, 재위 기원전 33-7) 홍가(鴻嘉) 임인(기원전 19)에 승하하였으며, 그때 한(漢)은 패엽(貝葉)을 보지 못했는데 어찌 해외의 배신(陪臣)이 벌써 범서(梵書)를 알 수 있겠느냐. 그러나 부처를 포도왕(蒲圖王)이라고 칭했으니, 서한(西漢)때 서역문자를 아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범서하고 말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샆펴 보건데, 아육왕의 귀신의 무리에게 명령하여 9억명의 사람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를 세우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염부계(閻浮界) 내에 8만 4천개를 세워서 큰 돌 속에 소장했다. 지금 곳곳에 상서러운 것이 보이는 것이 하나가 아니니 대개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감응을 헤아리기 어렵다. 찬한다. “아육왕의 보탑은 속세 곳곳에 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혀서 이끼마저 아롱졌네. 그때 길손들의 안목을 상상하면 몇 사람이나 탑에 제사를 지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