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타지

거타지

분류 문학 > 문화 > 설화

기본정보

신라 제51대 진성여왕대의 궁사(弓士)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신라 제51대 진성여왕대의 궁사로서 당에 사신으로 가는 양패(良貝)를 따라가다가 늙은 여우를 쏘아 죽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권2 기이2 진성여대왕 거타지조에서는 거타지가 당에 사신으로 가는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양패(良貝)를 따라가다가 곡도에 남겨진 뒤 서해약(西海若)의 가족을 해치는 승려로 변한 늙은 여우를 쏘아 죽이는 내용이 담겨 있다.

거타지설화의 서해약은 곧 서해의 용왕(龍王), 용신(龍神)으로서 그들 가족이 승려에 의해 간과 창자를 먹히는 상황은 신라 하대 용신의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을 상징한다고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삼국유사』에 있는 용 관련기록을 분석하여 통일기를 전후해서 신라의 국력이 창성할 때에는 용신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데 신문왕에게 만파식적을 만들게 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이끌어내는 동해용이나 자기 자신이 큰 부석(浮石)이 되어 의상(義湘)의 창사(創寺)활동을 돕는 선묘용(善妙龍)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 용은 점점 소극적이 되어 헌강왕대 처용설화에서는 동해용이 직접 몸을 나타내지 않고 운무를 끼게 하여 그 뒤에 숨어서 일관의 점을 통해서만 비로소 그의 뜻을 왕에게 알렸으며, 진성여왕대 서해용은 가족의 생존까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신라의 국력 약화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용신과 신라의 국세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김영태, 1974)

거타지설화의 상징성을 고찰하여 거타지를 신라 하대 민중의 영웅, 구체적으로는 견훤(甄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거타지설화에 나오는 서해약(西海若)은 신라 하대 민중을 상징하며, 노부부와 딸만 남은 서해약 가족의 상황은 곧 더 이상 착취당할 것이 없는 당시 민중의 한계상황이며 착취로 인한 인내의 한계라는 것이다. 그들을 착취하는 승려는 진성여왕을 비롯한 신라의 지배층을 뜻하는데 서해약의 가족은 승려에게 대항할 능력이 없으므로 거타지로 하여금 승려를 없애게 한다. 여기서 거타지는 지배층에 대항하는 민중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타지가 동쪽에서 해가 뜨면 나타나는 승려를 죽였고 승려를 죽인 곡도(鵠島)가 서해상의 섬이므로 동쪽은 신라, 서쪽은 백제라는 의식이 설화 속에 작용한 것이라고 보았다. 설화에서 곡도는 곧 백제를 상징하므로 거타지의 활약상은 자신이 백제의 후계자임을 표방한 견훤을 설화 속에 투영시킨 결과라는 것이다.(박철완, 1988)

거타지가 여우를 쏘아 죽인 뒤 서해약의 딸과 결합하는 것을 두고 서해약이 표상하는 대지(大地)의 성질이 거타지에게 전이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거타지는 섬에서 여우를 쏘아죽이기 전까지는 일개 군졸에 지나지 않았으나 서해약을 만나 여우를 죽인 후에는 서해약의 딸을 얻고 당나라에서 후대를 받는 등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한다. 그리고 서해약의 딸이 꽃으로 변한 것은 자연의 질서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꽃은 봄에 피는 것으로 봄은 자연과 인간이 새롭게 부활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거타지는 꽃으로 변한 자신의 짝을 얻음으로써 혼인으로 표상되는 자연의 일반적 질서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서해약과 꽃은 신화적 대지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이들이 있었던 바다의 섬이라는 공간은 물과 바위라는 보다 보편적인 신화 공간과 동질의 것이다. 그리하여 서해약과 꽃은 거타지와 같은 신화적 영웅을 기다리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런데 거타지설화의 배경이 신라 진성여왕대로서 나라가 거의 망해가는 때이기 때문에 거타지는 자기 자신만 귀한 신분이 되고 기존질서를 혁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고 하였다.(신연우, 1998)

당시의 교역항로에 주목하여 거타지 일행이 이용한 항로를 황해중부 횡단항로로 추정하기도 한다. 황해중부 횡단항로는 남양만이나 그 이남지역에서 출발하여 경기만의 끝단까지 까다가 북서진하여 황해를 횡단하는 항로로서, 동풍이나 남동풍을 활용하면 중국동안의 어느 지역이든지 접안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후백제는 5대 10국 시대 후당(後唐)과 교섭을 하였는데 후당은 중원지방에 있던 나라였기 때문에 황해중부 횡단항로가 이용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당에 사신으로 가던 양패일행은 서남해안 혹은 서해중부해안에서 출발하여 북상하다가 경기만의 북부 해역에서 백령도를 경유하여 직선으로 횡단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설화에 나오는 백제의 해적은 곧 후백제의 수군으로서 당시 후백제가 이 항로를 제어하고 있던 상황을 보여준다고 하였다.(윤명철, 2001)

거타지설화에서 거타지가 섬에 남겨진 것을 인신공희(人身供犧)와 유사한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인신공희는 대중국교역에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행사로서 삼국시대 이래 환황해권(環黃海圈)에서 행해졌으며 이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거타지설화와 심청전이라고 하였다. 거타지설화에서의 사신 양패 일행과 심청전에서의 남경상인 일행은 모두 항해 도중 물살이 험한 바다를 통과해야 했는데 여기서 인신공희 의식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심청전에서는 심청이 바다에 몸을 던짐으로써 풍랑을 잠재웠지만, 거타지설화에서는 목간에 궁수들의 이름을 쓴 다음 물에 띄워 가라앉는 사람이 남기로 하였다. 이것은 사람 대신 목간에 이름을 써서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과 같은 행위로서 사람을 해신(海神)에게 바치는 상징성을 지닌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환황해권 해양문화의 산물이라고 보았다.(송화섭, 2007)

한편 일찍이 고려의 건국과 관련 있는 작제건(作帝建)설화가 거타지설화와 유사성이 있음을 주장한 견해도 있었다. 작제건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제건은 항해 도중 풍랑이 일자 근처에 있던 섬에 내렸는데 서해용왕의 부탁으로 부처의 모습을 한 늙은 여우를 활로 쏘아 죽였다. 그 보답으로 작제건은 용왕의 딸과 결혼하고 신물(神物)을 얻게 되며 용왕은 장차 작제건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한다.” 설화를 분석하여 작제건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이라는 내용은 영웅에게 신비적인 능력이 부여됨을 의미하므로, 용(서해용왕)은 영웅(작제건)에 의해 구출되면서 영웅에게 신비적인 능력을 주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거타지설화는 거타지 자신의 출세로 결말이 나는 자연적인 설화이지만, 작제건설화는 작제건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을 예고하기 때문에 거타지설화에 비해 순수성이 적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자기들의 선조를 영웅화하기 위해 거타지의 이야기를 차용한 결과 작제건설화가 생겼다고 주장하였다.(장덕순, 1970)

참고문헌

장덕순, 1970, 『韓國說話文學硏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김영태, 1974, 「新羅佛敎에 있어서의 龍神思想」『佛敎學報』11.
박철완, 1988, 「거타지설화의 상징성 고찰」『청람어문학』1.
신연우, 1998, 「『三國遺事』居陀知 說話의 神話的 屬性」『論文集』48, 서울산업대학교.
윤명철, 2001, 「후백제의 해양활동과 대외교류」『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송화섭, 2007, 「『심청전』인당수의 역사민속학적 고찰」『역사민속학』25.

관련원문 및 해석

眞聖女大王 居陁知
第五十一眞聖女王 臨朝有年 乳母鳧好夫人與其夫魏弘匝干等三四寵臣 擅權撓政 盜賊蜂起 國人患之 乃作陁羅尼隱語書投路上 王與權臣等得之謂曰 此非王居仁 誰作此文 乃囚居仁於獄 居仁作詩訴于天 天乃震其獄 <因>以免之 詩曰 燕丹泣血虹穿日 鄒衍含悲夏落霜 今我失途還似舊 皇天何事不垂祥 陁羅尼曰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說者云 刹尼那帝者 言女<主>也 判尼判尼蘇判尼者 言二蘇判也 蘇判爵名 干干三阿<干>(者 言三四寵臣)也 鳧伊者言鳧好也 此王代阿<飡>良<貝>王之季子也 奉使於唐 聞百濟海賊梗於津<島> 選弓士五十人隨之 舡次鵠島[鄕云骨大島] 風濤大作 信宿<浹>旬 公患之 使人卜之 曰 島有神池 祭之可矣 於是 具奠於池上 池水湧高丈餘 夜夢有老人 謂公曰 善射一人 留此島中 可得便風 公覺而以事諮於左右曰 留誰可矣 衆人曰 宜以木簡五十片 書我輩名 沈水而鬮之 公從之 軍士有居陁知者 名沈水中 乃留其人 便風忽起 舡進無滯 居陁愁立島嶼 忽有老人從池而出 謂曰 我是西海若 每一沙彌 日出之時 從天而降 誦陁羅尼 三繞此池 我之夫婦子孫 皆浮水上 沙彌取吾子孫肝腸 食之盡矣 唯存吾夫婦與一女爾 來朝又必來 請君射之 居陁曰 弓矢之事 吾所長也 聞命矣 老人謝之而沒 居陁隱伏而待 明日扶桑旣暾 沙彌果來 誦呪如前 欲取老龍肝 時居陁射之中 沙彌卽變老狐 墜地而斃 於是老人出而謝曰 受公之賜 全我性命 請以女子妻之 居陁曰 見賜不遺 固所願也 老人以其女變作一枝花 納之懷中 仍命二龍 捧居陁趁及使舡 仍護其舡入於唐境 唐人見新羅舡有二龍負之 具事上聞 帝曰 新羅之使 必非常人 賜宴坐於群臣之上 厚以金帛遺之 旣還國 居陁出花枝 變女同居焉
진성여대왕 거타지
제51대 진성여왕이 나라 정사에 임한 지 몇 해만에 유모 부호부인과 그의 남편 위홍잡간 등 서너 명의 총신이 권세를 잡고 정사를 휘두르니,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나라 사람이 이를 근심하여 다라니의 은어를 지어 써서 길바닥에 던져두었다. 왕과 권신들이 이를 얻어 보고 말하기를, “왕거인이 아니고야 누가 이 글을 지었겠는가?”라고 하고, 곧 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니, 하늘이 곧 그 옥에 벼락을 쳐서 벗어나게 되었다. 시에 이르길, “(연나라태자)단의 피눈물에 무지개가 해를 뚫고 (제나라사람)추연의 품은 원한 여름에 서리 내렸네. 지금의 내 신세 예전과 같건만 황천은 어찌하여 아무 조짐을 내리지 않는가.” 다라니에는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우우삼아간 부이사파하”라고 하였다. 풀이하는 이가 말하기를, “찰니나제는 여왕을 말하고, 판니판니소판니는 소판 두 사람을 말한다. 소판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서너 사람의 총신을 말하고) 부이는 부호를 말한다.”고 하였다. 이 왕의 시대에 아찬 양패는 왕의 막내아들로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백제의 해적이 진도에서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궁사 50인을 뽑아 데리고 갔다. 배가 곡도[우리말로 곡대도라고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열흘 남짓 묵게 되었다. 공이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니, 말하기를, “섬에 신령한 못이 있으니 그곳에 제사지내야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못 위에 제사를 지냈더니, 못물이 한 길 남짓 솟아올랐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공에게 말하기를,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머물게 하면 순풍을 얻을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공이 꿈에서 깨어나 좌우에게 이 일을 묻기를, “누구를 머물게 하면 좋을까?”라고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나무조각 50쪽에 우리 이름들을 써서 물에 띄워 가라앉는 것으로 제비를 뽑읍시다.”고 하였다. 공이 이에 따랐다. 군사 중에 거타지란 이가 있어 그의 이름이 물에 가라앉았으므로 그를 머물게 하니, 순풍이 갑자기 일어나 배는 지체없이 나아갔다. 거타지가 수심에 쌓여 섬에 서있었더니, 갑자기 한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하기를, “나는 서해약(西海若)인데, 매번 한 승려가 해 돋을 때면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외우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에 떠오릅니다. 승려는 내 자손의 간과 창자를 다 취해 먹고, 우리 부부와 딸 하나가 남았을 뿐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반드시 올 것이니, 청컨대 그대는 이를 쏘아 주시오.”라고 하였다. 거타가 말하기를, “활 쏘는 일은 나의 장기이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노인이 감사하고 물 속으로 돌아가고, 거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승려가 과연 와서 전과 같이 주문을 외워 늙은 용의 간을 취하려고 하였다. 이 때 거타가 활을 쏘아 맞추니 승려는 즉시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 때 노인이 나타나 감사하며 말하기를, “공의 덕택으로 우리 목숨을 보전하였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거타가 말하기를, “따님을 주시고 저버리지 않으시니 진실로 원하던 바입니다.”고 하였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 꽃으로 바꿔 그의 품 속에 넣어 주고, 또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를 받들고 사신이 탄 배를 따라가 그 배를 호위하게 하여 당나라 경계에 들어갔다. 당나라 사람들이 두 용이 신라의 배를 지고 오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신라 사신은 반드시 비상한 사람일 것이다.”고 하고,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위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에 돌아와서 거타가 꽃가지를 꺼내니, 꽃이 여자로 변하였으므로 함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