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고승전

해동고승전

분류 문학 > 문화 > 서적

기본정보

고려의 승려 각훈(覺訓)이 편찬한 승전(僧傳)

일반정보

『해동고승전』은 고려의 승려 각훈이 편찬한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기록한 승전(僧傳)으로서, 『삼국유사』의 많은 부분에 『해동고승전』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현재 유통편(流通篇) 두 권만이 전해지고 있으나, 현전하는 최고의 승전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전문정보

『해동고승전』은 승려 각훈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고승들에 대한 전기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승전(僧傳)”, “해동승전(海東僧傳)”, “고승전(高僧傳)” 등의 서명으로 인용되어 『삼국유사』의 전거 사료가 되었다.

각훈의 『해동고승전』 이전에도 우리나라에는 『삼국사기』 권46 열전6 김대문조에 보이는 김대문의 『고승전(高僧傳)』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는 현존하지 않으므로, 『해동고승전』이 현존하는 최고의 승사(僧史)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해동고승전』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고, “해동승전”이 3번(권4 의해5 원광서학(圓光西學), 보양이목(寶壤梨木), 권5 감통7 광덕엄장(光德嚴莊)), “고승전”이 3번(권3 흥법3 아도기라(阿道基羅), 탑상4 어산불영(魚山佛影), 권5 피은8 신충괘관(信忠掛冠)), “승전”이 10번(권3 흥법3 순도조려(順道肇麗) 2회, 난타벽제(難陀闢濟),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厭髑滅身) 2회, 보장봉로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 탑상4 고려영탑사(高麗靈塔寺), 권5 신주6 명랑신인(明朗神印), 감통7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 피은8 연회도명 문수점(緣會逃名文殊岾)) 등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 세 명칭 모두를 각훈의 『해동고승전』의 이칭으로 본 견해가 일찍이 나온바 있다.(최남선, 1927) 그러나 이와 달리 고려의 승려 의천(義天, 1055-1101)의 시문집인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권16에 실린 「제금산사적법사문(祭金山寺寂法師文)」에 『해동승전』이라는 서명이 보이므로 각훈 이전 시기에 『해동승전』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한 견해도 있다.(황패강, 1976) 그러나 의천이 읽었다는 『해동승전』이 전해지지 않고 있어 그 정확한 내용을 밝히기 어렵다.

『해동고승전』은 그 가치가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실전(失傳)되어 오다가 20세기 초, 해인사의 주지에 의해 2권 1책으로 된 잔락(殘落)한 사본이 발견되면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본은 1910년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설립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기증되어 전사(傳寫)·유포(流布)되었다. 그러나 현재 조선광문회본은 행방을 알 수 없고, 사본으로서 연대가 가장 오래된 천견륜태랑(淺見倫太郞)본만 전해지고 있다.

『해동고승전』의 편찬 시기는 유통 1 논(論)에서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이후 지금 을해년까지는 2164년이고, 순도가 중국으로부터 고구려에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844년이라고 한 기록이 참고된다. 순도가 중국에서 고구려로 온 시기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이므로,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해동고승전』의 편찬시기를 고려 고종 2년(1215)이라고 보고 있다.

『해동고승전』은 편찬·간행된 이후 『삼국유사』 및 고려 말 승려 요원(了圓)이 『법화경』의 영험 사례를 모아 엮은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 등의 책에 인용될 정도로 유포되었다. 또한 조선 인조 15년(1637)에 김휴(金烋)가 전국에 흩어진 책을 모아 해제(解題)한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에도 『해동고승전』의 책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해동고승전』은 이후 한동안 사라져 알 수 없게 되었다가 20세기 초에 필사본이 발견되어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존 『해동고승전』은 완본이 아니고 그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해동고승전』은 권1 유통 1의1과 권2 유통 1의2뿐이다. 그러므로 전체 분량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유통편에 삼국시대까지의 고승에 관한 기록만이 남아있는 것과는 달리 완본에는 각훈이 살았던 당대까지를 대상으로 했을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유통편의 논(論)에서 원광(圓光)으로부터 대각국사(大覺國師)에 이르기까지의 구법(求法)에 의한 불법전래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 최자(崔滋, 1188-1260)가 엮어, 고려 고종 41년(1254)에 간행한 시화집인 『보한집(補閑集)』 하권에서, 최자가 당대의 명문장가 이윤보(李允甫, ?-?)에게서 들었던 묵행자(黙行者)의 전(傳)을 지어 승사(僧史)에 빠진 것을 보충하려 했다고 한 부분으로 미루어보아 각훈 당대를 대상으로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황패강, 1976; 김상현, 1984)

『해동고승전』은 현재 두 권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해동고승전』 유통편 머리말의 말미에 “양(梁)·당(唐)·송(宋) 세 고승전에는 모두 다 역경편(譯經篇)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번역한 일이 없기 때문에 이 과를 두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해동고승전』을 찬술함에 있어서 중국 세 고승전의 역경편 대신에 유통편을 두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료라고 한다. 또한 다른 편명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해동고승전』이 중국의 세 고승전의 체제를 참조하여 찬술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세 고승전이 10편으로 분과되어 있으므로 『해동고승전』의 체제도 10편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 역경편이 없으므로 9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견해도 있다.(박영호, 1988)

현 유통편의 체제를 살펴보면, 유통 1의1은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와 그 수용에 관한 기록이고, 유통 1의2는 각훈 스스로 현유전(玄遊傳)에서 “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이라고 표현했듯이 불법을 구하는 고승에 관한 것이다. 이 구법고승도 각덕(覺德)으로부터 안함(安含)까지는 중국에 구법한 승려들의 기록이고,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로부터 마지막 현태(玄太)에 이르는 기록은 인도로 구도의 길을 떠났던 승려들에 관한 기록이다.(김상현, 1984)

한편 『해동고승전』이 편찬된 동기에 대해서 8세기 중엽에 썼을 것으로 추측되는 김대문의 『고승전』으로부터 무려 350년 이상이 지난 고려시대에 썼다는 점에 주목하여 본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김대문의 『고승전』 이후 불교사에 대한 역사적 공백을 메워줄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70년 전에 쓰인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유교사관에 의한 것이라 불교사 기록이 소략하여 이를 정리하고자 『해동고승전』이 편찬되었다고 한다.(김상현, 1984) 또, 『해동고승전』이 편찬되던 당시 상황에 주목해 본 견해도 있다. 『해동고승전』 편찬 당시는 나라 안팎으로 어지러운 시기였다. 이러한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민족주체성과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대내적으로 국가불교의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무신집권하에서 탄압되었던 교종세력을 정당화시키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서 각훈을 “화엄월사(華嚴月師)”라 불렀던 것을 통해 각훈이 화엄승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고려하면 다른 불교세력보다 화엄종이 우월하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해동고승전』을 편찬한 것으로 이해된다고 한다.(장휘옥, 1991)

각훈이 왕명에 의해 『해동고승전』을 편찬하였던 것을 통해 각훈이 당대의 고승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각훈에 대한 전기(傳記)가 없어 생몰년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당대의 문인들의 작품을 통해 대략적인 생몰년을 추정해 볼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서 각훈이 어려서 이인로와 같이 놀았다고 하였고,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 각훈의 죽음을 애도하는 “차운문선사곡각월수좌(次韻文禪師哭覺月首座)”라는 시가 전해지므로, 이를 통해 그가 이인로보다 늦게 태어나서 이규보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화엄승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김형우, 1984) 이보다 더 자세하게 이인로와는 동년배이며, 이규보가 각훈 사망 직후 애도의 시를 썼다고 보아 시를 쓴 고려 고종 17년(1230)에 입적하였다고 본 견해도 있다.(김상현, 1984) 이와 같이 각훈이 당대의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는 문장에 능한 승려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문장가적 특성으로 인해 『해동고승전』의 서술에서 문학적인 표현이나 윤색이 많아 독자의 감동을 유발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김상현, 1993)

한편 각훈은 사료인용에 있어서 널리 알려진 서적들에 관해서는 출전을 밝히지 않은 반면에, 국내에 전해지고 있던 전(傳)이나 기록들에 관해서는 비교적 출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인용방법은 당시 일반적인 경향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또 사료의 전달에 있어서 각훈은 사료를 고증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전사(轉寫)했다. 그러므로 각훈은 사가(史家)도 창작자(創作者)도 아닌 사료 전달자의 입장에서 서술하였다고 보기도 하였다.(장휘옥, 1991) 그러나 『해동고승전』에서 인용 전거를 분명히 밝히고 있고, 주(注)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객관적으로 하고자 하였으며, 찬(贊)을 통해 주인공의 생애를 칭하는 등 서술 방법에 의해 역사가로서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본 견해도 있다. 이렇게 역사가적 면모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각훈은 참고했던 서적을 모두 기록하지 않아 『해동고승전』의 객관적인 신빙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김상현, 1993)

『해동고승전』은 삼국사기보다 70여년 후에, 『삼국유사』보다 70여 년 전에 편찬되었다. 이러한 중간 단계의 모습에 주목하여 유교적 합리적 사관을 취한 『삼국사기』와 불교적 자주의식을 가진 『삼국유사』 사이의 과도기적 상황에서 『해동고승전』의 특징을 설명한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교종의 불교세력은 문신귀족의 지배체제와 공생관계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동고승전』은 귀족불교의 입장을 대변하였으며, 이 점은 『삼국사기』의 합리적이고 개략적인 면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또한 불교서이기 때문에 신이한 기록이 보이며, 우리나라의 불교가 중국의 불교와 대등하다고 보는 면은 『삼국유사』의 자주의식과 비슷하다고 하였다.(김형우, 1984)

한편 『삼국유사』의 많은 부분에서 『해동고승전』이 인용되고 있는데, 『삼국유사』의 찬자는 『해동고승전』의 역사서술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점을 각훈의 역사 서술과 관련지어 『삼국유사』와 비교한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삼국유사』에서는 『해동고승전』에 인용되지 않은 자료를 제시하였다. 또한 『해동고승전』은 인용 자료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거의 보이지 않는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인용 자료의 타당성에 대한 평가도 『해동고승전』보다 엄격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최연식, 2007)

참고문헌

최남선, 1927, 「海東高僧傳解題」『佛敎史 佛敎』37.
황패강, 1976, 「海東高僧傳 小考」『한국 여문 논총 우촌 강복수박사 회갑기념논문집』.
김상현, 1984, 「『海東高僧傳』의 史學史的 性格」『南史 鄭在覺博士 古稀紀念 東洋學 論叢』.
김형우, 1984, 「《海東高僧傳》에 대한 再檢討」『素汀 南都泳博士 華甲紀念史學論叢』.
박영호, 1988, 「<海東高僧傳> 考察」『동방한문학』4.
장휘옥, 1991, 『海東高僧傳硏究』, 민족사.
김상현, 1993, 「覺訓」『韓國史市民講座』 제13집, 일조각.
최연식, 2007, 「高麗時代 僧傳의 서술 양상 검토-『殊異傳』『海東高僧傳』『三國遺事』의 阿道와 圓光전기 비교-」『한국사상사학』28.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
阿道基羅[一作我道又阿頭]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於家中作堀室安置 時梁遣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遣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遍問國中 墨胡子見之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訥祗在晉宋之世 而云梁遣使 恐誤] 時 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 厚加賚貺 俄而不知所歸 又至二十一毗處王時 有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疾而終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有注云 與本碑及諸傳記殊異 又高僧傳云西竺人 或云從吳來] 按我道本碑云 我道高麗人也 母高道寧 正始間 曹魏人我[姓我也]崛摩奉使句麗 私之而還 因而有娠 師生五歲 其母令出家 年十六歸魏 省覲崛摩 <投>玄彰和尙講下就業 年十九又歸寧於母 母謂曰 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其京都內有七處伽藍之墟 一曰金橋東天鏡林[今興輪寺 金橋謂西川之橋 俗訛呼云松橋也 寺自我道始基而中廢 至法興王丁未草創 乙卯大開 眞興王畢成] 二曰三川歧[今永興寺 與興輪開同代] 三曰龍宮南[今皇龍寺 眞興王癸酉始開] 四曰龍宮北[今芬皇寺 善德甲午始開] 五曰沙川尾[今靈妙寺 善德王乙未始開] 六曰神遊林[今天王寺 文武王己卯開]七曰婿請田[今曇嚴寺] 皆前佛時伽藍之墟 法水長流之地 爾歸彼而播揚大敎 當東嚮於釋祀矣 道禀敎至雞林 寓止王城西里 今嚴莊寺 于時<未>雛王卽位二年癸未也 詣闕請行敎法 世以前所未見爲嫌 至有將殺之者 乃逃隱于續林[今一善縣]毛祿家[祿與禮形近之訛 古記云 法師初來毛祿家 時天地震驚 時人不知僧名而云阿頭彡麽 彡麽者乃鄕言之稱僧也 猶言沙彌也] 三年 時 成國公主疾 巫醫不効 勅使四方求醫 師率然赴闕 其疾遂理 王大悅 問其所須 對曰 貧道百無所求 但願創佛寺於天<鏡>林 大興佛敎 奉福邦家爾 王許之 命興工 俗方質儉 編茅葺屋 住而講演 時或天花落地 號興輪寺 毛祿之妹名史氏 投師爲尼 亦於三川歧 創寺而居 名永興寺 未幾 <未>雛王卽世 國人將害之 師還毛祿家 自作塚 閉戶自絶 遂不復現 因此大敎亦廢 至二十三法興大王 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 乃興釋氏 距<未>雛王癸未之歲二百五十二年 道寧所言三千餘月 驗矣 據此 本記與本碑 二說相戾不同如此 嘗試論之 梁唐二僧傳 及三國本史皆載 麗濟二國佛敎之始 在晋末太元之間 則二道法師 以小獸林甲戌 到高麗明矣 此傳不誤 若以毗處王時方始到羅 則是阿道留高麗百餘歲乃來也 雖大聖行止出沒不常 未必皆爾 抑亦新羅奉佛 非晩甚如此 又若在<未>雛之世 則却超先於到麗甲戌百餘年矣 于時 雞林未有文物禮敎 國號猶未定 何暇阿道來請奉佛之事 又不合高麗未到而越至于羅也 設使暫興還廢 何其間寂寥無聞 而尙不識香名哉 一何大後 一何大先 揆夫東漸之勢 必始于麗濟而終乎羅 則訥祗旣與獸林世相接也 阿道之辭麗抵羅 宜在訥祗之世 又王女救病 皆傳爲阿道之事 則所謂墨胡者非眞名也 乃指目之辭 如梁人指達摩爲碧眼胡 晋調釋道安爲柒道人類也 乃阿道危行避諱 而不言名姓故也 蓋國人隨其所聞 以墨胡阿道二名 分作二人爲傳爾 況云阿道儀表似墨胡 則以此可驗其一人也 道寧之序七處 直以創開先後預言之 <兩>傳失之 故今以沙川尾躋於五次 三千餘月 未必盡信 <蓋>自訥祗之世 抵乎丁未 无慮一百餘年 若曰一千餘月 則殆幾矣 姓我單名 疑贗難詳 又按元魏釋曇始[一云惠始]傳云 始關中人 自出家已後 多有異迹 晉孝武太元(九)年末 齎經律數十部 往遼東宣化 現授三乘 立以歸戒 盖高麗聞道之始也 義熙初復還關中 開導三輔 始足白於面 雖涉泥水 未嘗沾濕 天下咸稱白足和尙云 晉末 朔方匈奴赫連勃勃 破獲關中 斬戮無數 時始亦遇害 刀不能傷 勃勃嗟嘆之 晉赦沙門 悉皆不殺 始於是潛遁山澤 修頭陁行 拓拔燾復剋長安 擅威關洛 時有博陵崔皓 小習左道 猜嫉釋敎 旣位居爲輔 爲燾所信 乃與天師寇謙之說燾 佛敎無益 有傷民利 勸令廢之云云 太平之末 始方知燾將化時至 乃以元會之日 忽杖錫到宮門 燾聞令斬之 屢不傷 燾自斬之亦無傷 飼北園所養虎 亦不敢近 燾大生慚懼 遂感癘疾 崔寇二人 相次發惡病 燾以過由於彼 於是誅滅二家門族 <宣>下國中 大<弘>佛法 始 後不知所終 議曰 曇始以太元末年到海東 義熙初還關中 則留此十餘年 何東史無文 始旣恢詭不測之人 而與阿道墨胡難陁 年事相同 三人中疑一必其變諱也 讚曰 雪擁金橋凍不開 鷄林春色未全廻 可怜靑帝多才思 先著毛郞宅裏梅

아도(阿道)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 한다.]
「신라본기(新羅本記)」제4에 이르기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에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다. 군(郡)사람 모례(毛禮)[혹은 모록(毛祿)이라고 한다.]가 집안에 굴을 파고 그를 안치(安置)하였다. 이때 양(梁)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을 주었다.[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에서 원표(元表)란 사승(使僧)을 보내고 명단(溟檀)과 불경․불상[經像]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군신(君臣)이 그 향(香)의 이름과 쓰는 법을 몰라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며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보고 말하기를,‘이는 향이란 것인데, 그것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몹시 풍기어 신성(神聖)에게 정성이 통하는 것이다.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사르고 발원(發願)하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으리라’고 하였다.[눌지(訥祗)는 진(晉)․송(宋)시대에 해당하니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때 왕녀(王女)가 병이 위독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서원을 표하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후하게 예물을 주었는데, 조금 있다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또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재위 479-500)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명과 역시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수년을 머물다가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명은 남아있으면서 경문(經文)과 율법(律法)을 강독하니 왕왕 신봉자가 있었다.[주(注)에 이르되 「본비(本碑)」 및 모든 전기(傳記)와 다르다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축인(西竺人)이라 하였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고 하였다.「아도본비(我道本碑)」에 의하면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으로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曺魏)사람 아(我)[아(我)는 성(姓)이다.]굴마(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그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아도가 출생하여 5세에 그의 어머니가 출가하게 하였다.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강석(講席)에 나아가 배웠다. 19세에 또 돌아와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가 이르기를,‘이 나라는 지금까지 불법을 모르지만, 이후 3천여 개월이 되면 계림(鷄林)에 성왕(聖王)이 나와서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서울 안에 일곱 곳의 가람(伽藍)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지금의 흥륜사(興輪寺)로, 금교는 서천교(西川橋)이니 속어(俗語)로 잘못하여 솔다리[松橋]라고 한다. 이 절은 아도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인데, 중간에 폐지되었다.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정미(丁未, 527)에 이르러 처음 열었고, 을묘(乙卯, 535)에 크게 개창(開倉)하여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에 마쳤다.], 둘째는 삼천기(三川岐)[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다. 흥륜사(興輪寺)와 동시에 개창하였다.],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黃龍寺)이다. 진흥왕 계유(癸酉, 553)에 처음 개창되었다.], 넷째는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이다.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갑오(甲午, 634)에 처음 개창되었다.],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지금의 영묘사(靈妙寺)이다. 선덕왕 을미(乙未, 635)에 처음 개창되었다.],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지금 천왕사(天王寺)이다.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기묘(己卯, 679)에 개창되었다.], 일곱째는 서청전(婿請田)[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으로서 모두 전불(前佛) 시대의 가람(伽藍)터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르던 땅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東)으로 향하리라.’하였다. 아도가 가르침을 받고 계림에 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우거(寓居)하니,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고, 때는 미추왕(未雛王, 재위 262-284) 즉위 2년 계미(癸未, 263)였다. 대궐에 들어가서 교법을 행하기를 청하니, 세상에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려하였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록(祿)은 예(禮)와 형태가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승(僧)이란 이름을 모르고 아두삼마(阿頭彡麽)라 하였다. 삼마(彡麽)는 향언(鄕言)으로 승(僧)을 가리키는 말이니, 사미(沙彌)라는 말과 같다.”고 하였다.]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3년이 지났을 때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의(巫醫)의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의사를 구하였다. 법사가 급히 대궐에 들어가 그 병을 치료하니 왕이 대단히 기뻐하고 그 소원을 물었다. 대답하기를,‘빈도(貧道)는 백에 구하는 바가 없고, 다만 천경림에 불사(佛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켜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였는데, 그때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집을 덮고 거주하면서 강연(講演)하니 간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그 절 이름을 흥륜사(興輪寺)라 하였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어 또한 삼천기(三川岐)에 절을 짓고 거주하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니 국인(國人)들이 법사를 해하려하여 법사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마침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불교 또한 폐지되었다. 제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 재위 514-540)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에 즉위하여 불교[釋氏]를 일으켰는데, 미추왕 계미(癸未)와 252년 떨어졌다. 고도령이 말한 3천여 개월이 들어맞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설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이를 한 번 시론해본다. 양(梁)․당(唐) 두 승전(僧傳)과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모두 여(麗)․제(濟)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 태원(太元) 연간(376-396)이라고 하였으니 이도(二道, 순도와 아도)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王) 갑술(甲戌, 374)에 고구려에 온 것이 분명하므로 이 전(傳)은 잘못되지 않았다. 만일 비처왕 때에 비로소 신라에 왔다면, 이것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100여 년을 있다가 온 것이 된다.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거지와 출몰(出沒)이 비상(非常)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모두 이렇지는 않다. 또한 신라의 불교신봉이 이렇게 심하게 늦지는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고구려에 들어온 갑술년보다도 100여 년 전이 된다. 그때는 계림에 아직 문물(文物)과 예교(禮敎)도 없었고, 국호도 아직 정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교를 받들자고 청하였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오지 않고 신라로 넘어왔다는 것이 불합리하다. 설령 잠시 일어났다가 곧 폐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적막하여 소문이 없었으며, 향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였을까. 하나는 어찌 그리 뒤지고 하나는 어찌 그리 앞섰을까. 생각컨대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지는 형세가 반드시 고구려․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마쳤을 것이다. 즉, 눌지왕대는 소수림왕대와 서로 가까우니, 아도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에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자란 것도 진짜 이름이 아니고 지목한 말일 것이다. 마치 양나라 사람이 달마(達摩)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하고 진나라에서 석도안(釋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고 한 것과 같다. 즉 아도가 위태로운 일을 하느라 이름을 숨겨 성명을 말하지 않은 까닭이다. 아마 나라 사람들이 들은 바에 따라 묵호·아도의 두 이름으로써 두 사람을 구분하여 전한 것이다. 더구나 아도의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같다 하였으니 이것으로도 그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고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든 것은 곧 개창의 선후를 예언한 것이나, 두 전(傳)이 다 잘못하였으므로 이제 사천미를 다섯 번째에 실은 것이며, 3천여 개월이란 것도 꼭 다 믿을 수는 없다. 대개 눌지왕 때로부터 (법흥왕) 정미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백여 년이 되므로 1천여 월이라고 하면 거의 비슷하다. 성(姓)을 아(我)라 하고 외자 이름을 칭한 것은 거짓인 듯 하나 자세하지 않다. 또 북위[元魏] 석담시(釋曇始)[혜시(惠始)라고도 한다.]전(傳)을 살펴보면,“담시는 관중(關中)사람으로 출가한 뒤 특이한 행적이 많았다. 진(晉)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6) 태원(太元) 9년(384) 말에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교화를 펴 삼승(三乘)을 가르쳐 곧 귀계(歸戒)하게 하였는데, 대개 이것이 고구려가 불도(佛道)를 듣게 된 시초였다. 의희(義熙, 405-418) 초년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서 삼보(三輔)를 개도(開導)하였다. 담시의 발이 얼굴보다 희어서, 비록 진흙물을 건너도 조금도 젖지 않았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다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한다. 진나라 말기에 삭방(朔方)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을 격파하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이때에 담시도 화(禍)를 만났으나 칼이 해하지 못하니 발발(勃勃)이 탄식하여 널리 사문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가 이에 몰래 산택(山澤)으로 도망하여 두타(頭陁)의 행(行)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 재위 423-452)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관중과 낙양에서 위엄을 떨쳤다. 그때 박릉(博陵)에 최호(崔皓)란 자가 있어 좌도(左道, 도교)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이미 지위가 보(輔)가 되어 탁발도의 신임을 얻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를 설득하기를, ‘불교는 무익하고 민생에 유해하다.’고 하여 폐하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태평(太平, 556-557) 말년에 담시가 바야흐로 탁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온 것을 알고 이에 원회(元會)일에 홀연히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탁발도가 듣고 참(斬)하라고 명하였다. 여러번 참하되 상하지 아니하므로 탁발도가 스스로 그를 참하였으나 역시 상하지 않았다. 북원(北園)에 기르고 있는 호랑이에게 주었더니 역시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탁발도가 크게 부끄럽고 두려워하더니 드디어 지독한 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리었다. 탁발도는 이 허물이 그들 때문이라고 하여 이에 두 집 문족(門族)을 죽이고 국내에 선언하여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담시의 후에 끝난 바는 알 수 없었다. 논하여 말한다. 담시가 태원(太元) 말년에 해동에 왔다가 의희(義熙) 초년에 관중으로 돌아갔다면 이곳에 머무른 것이 10여 년인데, 어찌 동국의 역사에 기록이 없으리오. 담시는 이미 괴이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아도, 묵호자, 난타와 연대와 사적이 서로 같으니, 세 명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그 이름을 바꾼 것으로 의심된다. 찬한다. 금교에 쌓인 눈 아직 녹지 않았고, 계림에 봄빛이 돌아오지 않았을 제, 어여쁘다. 봄의 신은 재주도 많아, 모랑댁(毛郞宅) 매화꽃 먼저 피게 하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