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뇌가

사뇌가

분류 문학 > 문화 > 시가

기본정보

향가(鄕歌)의 이칭 또는 한 형식

일반정보

사뇌가는 그 개념 및 성격에 대해서 뚜렷이 밝혀져 있지 않으며, 이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나 『균여전(均如傳)』에 전하는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王家)」 등이 이 형식이었다고 한다. 대체로 향가(鄕歌)의 이칭 또는 한 형식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에는 경덕왕이 충담사를 만나 대화하는 중에 충담사가 지은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其意甚高)”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원성대왕(元聖大王)조에는 원성왕이 궁달(窮達)의 변화 즉 이치를 잘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다는 내용이 전하는데 그 세주에 노래는 없어져 알 수 없다고 부기되어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3노례왕(第三弩禮王)조에는 이 왕대에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는데 차사(嗟辭)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始作兜率歌 有嗟辭詞腦格)”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 외 고려시대의 승려 혜심(慧諶)의 저작인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에는 “기사뇌가(碁詞腦歌)”가 전하며, 고려 초기의 문신인 채충순(蔡忠順, ?-1036)이 지은 「고려국영취산대자은현화사비음기(高麗國靈鷲山大慈恩玄化寺碑陰記)」에는 신하들이 시뇌가(詩腦歌)를 지어 바쳤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한 『균여전(均如傳)』 권7․8에는 사뇌(詞腦)에 대한 해석과 사뇌가인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王家)」 11수가 전해지고 있다. 『균여전』 제7 가행화세분(歌行化世分)조에서는 사뇌가는 “뜻이 사(詞)보다 정밀한 까닭에 뇌(腦)라고 이른다.(意精於詞 故云腦也)”라고 하였고, 또 「보현십종원왕가」 11장의 서(序)에 “무릇 사뇌는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도구이다.(夫詞腦者 世人喜樂之具)”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렇듯 여러 사서 및 금석문에 사뇌격 혹은 사뇌․시뇌 관련 기록이 전하고 있지만, 사뇌가의 개념 및 성격에 대해서는 뚜렷이 밝혀져 있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사뇌(詞腦)․사내(思內) 내지 시뇌(詩腦) 등이 “imagefontimagefont”의 차자(借字)이고 그 원 뜻은 동방(東方)․동토(東土)이므로 사뇌가란 곧 동방 고유의 노래를 뜻하는 말이며 향가(鄕歌)와 같은 것이라고 이해한 바 있다.(양주동, 1974)

또는 사뇌가가 향가 전체를 범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중 10구체 향가만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조윤제, 1963)

이러한 견해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조에 보이는 사뇌야(詞腦野)라는 지명에 주목하여 사뇌가가 경주지역 즉 사뇌야 지역에 유포되었던 “수도권 문학”이며 숭고미와 우아미가 지배적인 미의식으로 나타나는 정형시였다고 보는 견해(정병욱, 1977)와, 10구체를 “다섯 줄 형식”으로 이해하면서 사뇌라는 말이 “사뢰다”와 어원이 같을 것이며 따라서 사뇌가는 존엄한 대상을 향해 격조높은 말을 사뢰는 노래이며 귀족문화층의 개인 창작 서정시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조동일, 2004)로 나뉜다.

혹은 사뇌가가 향가의 일부이지만 10구체가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사뇌가가 향가의 하위장르로서 민요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의 찬가(讚歌)로 정립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김동욱, 1961) 같은 입장에서 향가를 신라의 가요 중에서 악기의 반주를 동반한 선율상으로 세련된 가요라고 보고, 그 하위장르인 사뇌가는 “3구6명(三句六名)”의 세련된 형식을 갖춘 것이며 통일 이후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학성, 1993) 또한 사뇌가는 우리말 창작시인 향가를 “사내(思內)”라는 민속가악의 가락으로 가창한 향가의 한 양식이라고 보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예창해, 1995)

이와 달리 사뇌가가 내용면에서 “찬양․축하” 또는 “이치(특히 불교적 이치)를 깨달아 앎”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시가 작품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그 어원은 페르시아어 “snay”(파흘라비어)의 차용어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즉 사뇌가는 형식이 아닌 내용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뇌가는 대체로 6행 이상이며 주로 10행 내외의 시편 크기를 지녔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성호경, 2007)

참고문헌

김동욱, 1961, 『한국가요의 연구』, 을유문화사.
조윤제, 1963, 『韓國文學史』, 동국문화사.
양주동, 1974, 『古歌硏究』, 일조각.
정병욱, 1977,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김학성, 1993, 「향가의 장르체계」『鄕歌文學硏究』, 일지사.
예창해, 1995, 「‘詞腦歌’의 形成과 그 槪念」『고전문학연구』10.
조동일, 2004, 『한국문학통사』1, 지식산업사.
성호경, 2007, 「詞腦歌의 性格 및 起源에 대한 고찰 -페르시아系 시가의 영향에 대한 탐색을 중심으로 하여-」『震檀學報』104.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德經等 大王備禮受之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 時或現侍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適有一大德 威儀鮮潔 徜徉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 負櫻筒[一作荷簣] 從南而來 王喜見之 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僧曰 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玆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甌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甌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 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 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國惡支持以 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讚耆婆郞歌曰
咽鳴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貌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王玉莖長八(寸) 無子廢之 封沙梁夫人 後妃滿月夫人 謚景垂太后 依忠角干之女也 王一日詔表訓大德曰 朕無祐 不獲其嗣 願大德請於上帝而有之 訓上告於天帝 還來奏云 帝有言 求女卽可 男卽不宜 王曰 願轉女成男 訓再上天請之 帝曰 可則可矣 然爲男則國殆矣 訓欲下時 帝又召曰 天與人不可亂 今師往來如隣里 漏洩天機 今後宜更不通 訓來以天語諭之 王曰 國雖殆 得男而爲嗣足矣 於是滿月王后生太子 王喜甚 至八歲 王崩 太子卽位 是爲惠恭大王 幼冲故 太后臨朝 政條不理 盜賊蜂起 不遑備禦 訓師之說驗矣 小帝旣女爲男 故自期晬至於登位 常爲婦女之戱 好佩錦囊 與道流爲戱 故國有大亂 <終>爲宣德與金<敬信>所弑 自表訓後 聖人不生於新羅云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의 뜰에서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각 위로 행차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누가 능히 길 위에서 한 명의 영복승(榮服僧)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마침 한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태도가 위엄 있고 깨끗했다. 길에서 배회하며 가니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다가 보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한 영승(榮僧)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있었는데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삼태기라고도 한다]을 진 채 남쪽으로부터 왔다. 왕이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그 통 안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니, 승려는 “충담(忠談)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디에서 오십니까?”라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올리는데, 지금도 이에 올리고 돌아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도 차를 한 잔 나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승려가 이에 차를 달여 바쳤다. 차의 향기와 맛이 이상하고, 다구 속에 특이한 향기가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들으니 사(師)가 지은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합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승(僧)이 곧바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승은 재배(再拜)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에 이르길,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라고 하였다. 후렴구는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에 이르기를,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쫓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가를 좇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라고 하였다.
왕의 옥경(玉莖)이 8촌의 길이였는데, 아들이 없어 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하였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의충(依忠) 각간의 딸이다. 왕이 하루는 표훈(表訓) 대덕을 불러 말하기를 “짐이 도움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니 원하건대 대덕이 상제(上帝)에게 청하여 후사가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표훈이 올라가 천제(天帝)에게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천제가 말하기를 ‘딸을 구하는 것은 가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딸을 아들로 바꿔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그것을 청하였다. 천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으나 그렇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인간은 혼란시켜서는 안되는데 지금 대사가 이웃 마을과 같이 왕래하여 천기를 누설하니 지금 이후로는 마땅히 다시 통행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 깨우치니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게 되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여덟 살에 이르러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가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朝政)에 임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아 도적이 봉기해도 막을 경황이 없었으니 표훈대사의 말에 징험이 있었다. 소제(小帝)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이 되는 날부터 즉위할 때까지 항상 부녀의 놀이를 하며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함께 놀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마침내는 선덕(宣德)과 김경신(金敬信)에게 시해되었다. 표훈 이후로부터 신라에 성인(聖人)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