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도덕경

분류 문학 > 문화 > 서적

기본정보

도교(道敎)의 경전

일반정보

도교(道敎)의 경전으로, 신라에 도덕경(道德經)이 전래된 시기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경덕왕(景德王)대의 일인 것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으나, 대체로 『삼국사기』에 따라 효성왕(孝成王)대의 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말에도 당에서 도사(道士)와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연하게 했다는 내용도 전한다

전문정보

『도덕경(道德經)』은 『노자(老子)』 또는 『도덕진경(道德眞經)』이라고도 하며, 상편과 하편을 합해 5천자이기 때문에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이라고도 불린다. 도교(道敎)의 경전으로 춘추시대 말 이이(李耳) 즉 노자가 편찬했다고 전하나 전국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전한(前漢)대 하상공(河上公)이 『노자장구(老子章句)』 81장을 지어 처음으로 장을 나누고 제목을 붙였으며, 당나라 현종(玄宗, 재위 712-756) 때 상편 37장은 도경(道經), 하편 44장을 덕경(德經)이라고 하여 비로소 『도덕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도덕경과 관련된 내용이 2건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의 맨 앞부분에 “『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德經等 大王備禮受之)”라고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3 흥법3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조에서 고려본기(高麗本記)를 인용하여 고구려 말인 무덕(武德) 연간과 정관(貞觀) 연간에 국인(國人)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다투어 신봉하니 당 고조(高祖)가 이를 듣고 도사(道士)를 시켜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도덕경(道德經)을 강연케 하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의 기록은 그 원문이 “덕경등(德經等)”으로 시작하여 앞에 빠진 부분이 있는 듯하고,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의 뒷부분 내용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효성왕 2년(738) 하4월조에는 “당나라 사신 형숙이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등의 서책을 왕에게 바쳤다.(唐使臣邢璹 以老子道德經等文書 獻于王)”라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德經等 大王備禮受之)”라는 구절의 앞부분은 효성왕(孝成王)조와 관련된 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이병도, 1956)

한편 흥법3 보장봉로 보덕이암조의 내용 또한 이와 유사한 내용이 『삼국사기』에서 확인된다.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 7년(624)조에는 당에서 도사(道士)에게 명하여 천존상(天尊像) 및 도법(道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의하게 하였다고 하며, 그 다음해에도 사람을 당에 보내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우도록 청한 바 있다. 또한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2년(643)조에는 3월에 연개소문이 유교․불교의 흥성함에 발맞추어 도교도 진작시켜야 한다고 고하면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들여와 사람들에게 가르칠 것을 청하였다. 왕은 이를 옳다고 여겨 당에 글을 올려 청했으며, 이에 당 태종(太宗)이 도사 숙달(叔達) 등 여덟 명을 보내고, 겸하여 노자 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내 주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56, 『(原文幷譯註)三國遺事』, 동국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德經等 大王備禮受之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 時或現侍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適有一大德 威儀鮮潔 徜徉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 負櫻筒[一作荷簣] 從南而來 王喜見之 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僧曰 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玆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甌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甌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 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 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國惡支持以 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讚耆婆郞歌曰
咽鳴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貌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王玉莖長八(寸) 無子廢之 封沙梁夫人 後妃滿月夫人 謚景垂太后 依忠角干之女也 王一日詔表訓大德曰 朕無祐 不獲其嗣 願大德請於上帝而有之 訓上告於天帝 還來奏云 帝有言 求女卽可 男卽不宜 王曰 願轉女成男 訓再上天請之 帝曰 可則可矣 然爲男則國殆矣 訓欲下時 帝又召曰 天與人不可亂 今師往來如隣里 漏洩天機 今後宜更不通 訓來以天語諭之 王曰 國雖殆 得男而爲嗣足矣 於是滿月王后生太子 王喜甚 至八歲 王崩 太子卽位 是爲惠恭大王 幼冲故 太后臨朝 政條不理 盜賊蜂起 不遑備禦 訓師之說驗矣 小帝旣女爲男 故自期晬至於登位 常爲婦女之戱 好佩錦囊 與道流爲戱 故國有大亂 <終>爲宣德與金<敬信>所弑 自表訓後 聖人不生於新羅云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의 뜰에서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각 위로 행차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누가 능히 길 위에서 한 명의 영복승(榮服僧)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마침 한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태도가 위엄 있고 깨끗했다. 길에서 배회하며 가니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다가 보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한 영승(榮僧)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있었는데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삼태기라고도 한다]을 진 채 남쪽으로부터 왔다. 왕이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그 통 안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니, 승려는 “충담(忠談)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디에서 오십니까?”라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올리는데, 지금도 이에 올리고 돌아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도 차를 한 잔 나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승려가 이에 차를 달여 바쳤다. 차의 향기와 맛이 이상하고, 다구 속에 특이한 향기가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들으니 사(師)가 지은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합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승(僧)이 곧바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승은 재배(再拜)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에 이르길,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라고 하였다. 후렴구는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에 이르기를,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쫓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가를 좇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라고 하였다.
왕의 옥경(玉莖)이 8촌의 길이였는데, 아들이 없어 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하였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의충(依忠) 각간의 딸이다. 왕이 하루는 표훈(表訓) 대덕을 불러 말하기를 “짐이 도움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니 원하건대 대덕이 상제(上帝)에게 청하여 후사가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표훈이 올라가 천제(天帝)에게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천제가 말하기를 ‘딸을 구하는 것은 가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딸을 아들로 바꿔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그것을 청하였다. 천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으나 그렇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인간은 혼란시켜서는 안되는데 지금 대사가 이웃 마을과 같이 왕래하여 천기를 누설하니 지금 이후로는 마땅히 다시 통행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 깨우치니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게 되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여덟 살에 이르러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가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朝政)에 임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아 도적이 봉기해도 막을 경황이 없었으니 표훈대사의 말에 징험이 있었다. 소제(小帝)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이 되는 날부터 즉위할 때까지 항상 부녀의 놀이를 하며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함께 놀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마침내는 선덕(宣德)과 김경신(金敬信)에게 시해되었다. 표훈 이후로부터 신라에 성인(聖人)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