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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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를 지칭하는데, 신라의 대외적 팽창의 전진기지 혹은 배후기지 역할을 수행한 지역이다

일반정보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를 지칭하는데, 사벌국(沙伐國)이 신라에 복속된 뒤에 사벌주, 혹은 상주로 개편되었는데 소백산맥 이동지역의 교통상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신라의 대외적 팽창의 전진기지 혹은 배후기지 역할을 수행한 지역이다.

전문정보

상주(尙州)는 현재 경북 문경시, 구미시, 김천시, 예천군, 의성군, 충북 영동군, 보은군에 둘러싸인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북서쪽의 백두대간을 경계로 금강수계권이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남한강 수계권과 연결되며 낙동강을 따라서 북쪽으로는 경북 내륙지역, 남쪽으로는 남부지역으로 연결되는 수륙교통상의 요지에 위치한다. 특히 영남지역에서 금강과 남한강으로 연결되는 가장 양호한 지리적인 이점에서 신라의 세력 확장과 함께 중요한 요충지로서 인식되어 온 지역이다.(서영일, 1999)

상주지역에는 원래 사벌국(沙伐國)이 위치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상주조에 의하면 “첨해왕(沾解王)때에 사벌국(沙伐國)을 취하여 주(州)로 삼았다.(沾解王時取沙伐國爲州)”는 기록이 있으며, 권45 열전5 석우로(昔于老)전에서도 “첨해왕이 재위하였을 때 사량벌국(沙梁伐國)이 전에 우리에게 속하였다가, 문득 배반하여 백제로 돌아가므로,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멸하였다.(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는 기록이 있다. 즉, 첨해왕(247-261)대에 신라가 사벌국(沙伐國) 혹은 사량벌국(沙梁伐國)을 복속하여 상주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어서 권2 신라본기2 유례이사금10년(293) 봄에 “봄 2월에 사도성(沙道城)을 고쳐 쌓고 사벌주(沙伐州)의 부유한 백성 80여 집을 이주시켰다.(改築沙道城 移沙伐州豪民八十餘家)”고 하여 상주 인근의 현재 경상북도의 어느 곳으로 비정되는 사도성에 사벌주의 재지세력을 이주하여 사벌주에 대한 신라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이보다 늦은 4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청리 고분군과 신흥리 고분군의 토광묘에서 신라의 진출 사실이 확인된다. 신라는 이를 매개로 신라는 상주 지역을 확보하고 금강수계권으로 진출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5세기대에 접어들면서 상주 분지를 중심으로 상주 성동리 고분군, 병성동 고분군, 오대동 고분군에서 세장방형의 횡구식설실묘(橫口式石室墓)가 주요한 묘제로 사용되고, 영남 북부양식의 고배(高杯)가 부장된 고총고분이 확인되어 신라와 연계된 정치 집단이 등장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어서 5세기 중엽이 되면 경주양식의 토기와 동일한 문화양상이 확인되면서 신라의 지배력이 보다 공고해 진 것이 확인되고 있다.(홍지윤, 2003)

그리고 『삼국사기』 권45 열전5 박제상조에서 박제상(朴堤上)은 417년 눌지왕이 즉위하자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가있는 동생들을 찾아오기 위해 영주 지역을 비롯한 북방 변경지역의 재지수장층과 협력하여 계책을 도모하는 기사가 있는데, 변방 재지수장이 일정한 자립적인 세력임을 보여주고 있어서 상주 지역의 세력의 경우에도 신라의 지배력하 있는 유사한 세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소백산맥 북서편에 위치한 고구려와 연결되는 내륙교통로에 위치한 상주는 5세기 전반까지 변경지대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지역으로서 신라와 고구려의 영향을 함께 받던 지역이었을 것이다.(이용현, 2003)

한편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8년(465)에는 “5월에 사벌군(沙伐郡)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五月 沙伐郡蝗)”고 하여 사벌군(沙伐郡)으로 불려왔음이 확인된다. 이어서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3년(470)에 상주의 서편인 소백산맥의 건너편에 해당하는 보은에 삼년산성(三年山城) 축성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서, 사벌군(沙伐郡)은 신라가 금강 중상류지역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배후거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2년(525)에는 “봄 2월에 대아찬 이등(伊登)을 사벌주(沙伐州) 군주로 삼았다.(春二月 以大阿湌伊登爲沙伐州軍主)”는 기록이 있어서 사벌군(沙伐郡)이 사벌주(沙伐州)가 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권34 잡지3 지리 1 신라 상주조에서는, “처음으로 군주(軍主)를 두어 상주(上州)로 삼았다.(初置軍主爲上州)”고 하여서 사벌주(沙伐州)가 상주(上州)로 불리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후 진흥왕대에 한강유역을 확보하면서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였던 주치의 개폐가 진행된다. 진흥왕 18년(557)에 사벌주가 폐지되고 감문주(甘文州)가 설치되지만, 진평왕 36년(614)에 다시 일선주(一善州)로 옮겨졌다가, 신문왕 7년(687)에 다시 사벌주가 설치된다. 이와 같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이후에 상주 지역 주변으로 주치가 이동하지만, 여전히 상주 지역은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다. 이는 함안(咸安) 성산산성(城山山城) 목간들을 통해서 확인되는데, 물건의 운반을 위해서 부착했다가 운반이 완료한 뒤에 폐기된 하찰(荷札)의 성격을 지닌 목간에 기록된 지명의 대부분이 상주(上州)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명들이다.(李成市, 2000) 이는 신라가 6세기 중반에 가야지역을 확보한 뒤에 군사상의 긴급한 거점을 구축하기 위해 상주 지역의 공납물을 이동하여 배치한 것 생각되는데, 이를 통해서도 신라의 대외적인 확장을 위한 배후거점으로서 상주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또한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는 전쟁에 관한 기록이 주목된다.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다다랐다. …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 (7월) 왕이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렸다.(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 眞珠· 天存等 領兵出京 六月十八日 次南川停 …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 將軍品日․欽春春或作純 等 率精兵五萬應之 王次今突城 … 王聞義慈降 二十九日 自今突城至所夫里城 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라는 기록인데,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전쟁이 벌어지는 기간에 무열왕이 금돌성(今突城)에 머무르다가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동한 것을 기록하였다. 여기서 금돌성(今突城)은 상주시 모서면의 백화산고성(白華山古城)이 금돌성으로 비정되었고,(단국대학교박물관, 1966) 금돌성에 대한 지표조사가 진행되어 상주가 백제에 대한 공격에서 중요한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확인하였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1).

통일신라에 와서는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 1 신라 상주조를 통해서 경덕왕 16년(757)에 상주(上州)가 현재의 상주(尙州)로 명명된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신라강계(新羅疆界)조에서는 “당은포로(唐恩浦路)”를 설명하면서 상주(尙州)가 언급되고 있다. 당은포로는 경주에서 당은포(唐恩浦) 혹은 당성(唐城, 현재 경기도 화성시)으로 연결되는 대중국 교통로가 지나가는 곳인데, 상주의 지리적인 중요성이 확인되는 구절인 것이다.(서영일, 1999)

이와 함께 상주는 수도인 경주를 기준으로 서북쪽에 위치하면서, 북부의 한주(漢州)와 삭주(朔州), 구 백제의 중심인 웅주(熊州)의 3개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결절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8세기 중엽에 완결되는 통일신라 9주의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藤田亮策, 1953)

이후 상주(尙州)를 신라 혜공왕(惠恭王, 765년-780)이 다시 사벌주(沙伐州)로 이름을 고쳤으나, 고려 태조 23년(940)에 또 다시 상주(尙州)로 이름을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8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건치연혁조에 의하면, 고려초에 상주(尙州)는 성종(成宗) 2년(983)에 상주목(尙州牧)으로 고치고, 뒤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귀덕군(貴德軍)이라 이름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예속시킨다. 현종(顯宗)대에 상주안무사(尙州按撫使)로 고쳤다가 현종 9년(1018)에 상주목(尙州牧)으로의 개편을 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상주군(尙州郡)이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함창군(咸昌郡)을 편입하고 상주면은 상주읍으로 승격된다. 해방 이후에는 상주읍은 상주시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에 상주시와 상주군이 통합되여 지금의 상주시가 된다. 한편 도제(道制)가 최초로 실시된 고려 성종 14년(995)에는 상주에 영남도(嶺南道)가 두어지고 절도사가 파견되었으며, 충숙왕 1년(1314)에는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이름을 따서 경상도(慶尙道)로 개칭된다. 이러한 지명의 이름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14세기 이후에도 상주는 영남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곳이었다.

참고문헌

藤田亮策, 1953, 「新羅九州五小京考」『朝鮮學報』5.
단국대학교박물관, 1966, 『尙州地區古蹟調査報告書』.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李成市, 2000, 「韓國木簡연구의 현황과 咸安城山山城출토의 木簡」『韓國古代史硏究』 19.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1, 『尙州 今突城 地表調査報告書』.
홍지윤, 2003, 「尙州地域 5世紀 古墳의 樣相과 地域政治體의 動向」『嶺南考古學』32.
이용현, 2003, 「삼국시대의 尙州 -중고기 신라 경영의 시점에서-」『尙州 嶺南 文物의 결절지』, 국립대구박물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新羅別記云 文<武>王卽位五年乙丑秋八月庚子 王親統大兵 幸熊津城 會假王扶餘隆 作壇 刑白馬而盟 先祀天神及山川之靈 然後歃血爲文而盟曰 往者百濟先王 迷於逆順 不<敦>隣好 不睦親姻 結托句麗 交通倭國 共爲殘暴 侵削新羅 破邑屠城 略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被毒 頻命行人 諭其和好 負險恃遠 悔慢天經 皇赫斯怒 恭行弔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固可瀦宮汚宅 作誡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懷柔伐叛 先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曩冊 故立前百濟王司(稼)正卿扶餘隆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恭承詔命 永爲藩服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 親臨勸諭 具宣成旨 約之以婚姻 申之以盟誓 刑牲歃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兄弟 祗奉綸言 不敢墜失 旣盟之後共保歲寒 若有乖背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陲 神明鑒之 百殃是降 子孫不育 社稷無宗 禋祀磨滅 罔有遺餘 故作金書鐵契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或敢犯 神之聽之 是享是福 歃訖 埋弊帛於壇之壬地 藏盟文於大廟 盟文乃帶方都督劉仁軌作 [按上唐史之文 定方以義慈王及太子隆等送京師 今云 會扶餘王隆 則知唐帝宥隆而遣之 立爲熊津都督也 故盟文明言 以此爲驗] 又古記云 總章元年戊辰 [若總章戊辰 則李勣之事 而下文蘇定方 誤矣 若定方則年號當龍朔二年壬戌 來圍平壤之時也] 國人之所請唐兵 屯于平壤郊 而通書曰 急輪軍資 王會群臣問曰 入於敵國 至唐兵屯所 其勢危矣 所請王師粮匱 而不輪其料 亦不宜也 如何 庾信奏曰 臣等能輸其軍資 請大王無慮 於是庾信仁問等 率數萬人 入句麗境 輸料二萬斛 乃還 王大喜 又欲興師會唐兵 庾信先遣然起兵川等<二>人 問其會期 唐帥蘇定方 紙畵鸞犢二物廻之 國人未解其意 使問於元曉法師 解之曰 速還其兵 謂畵犢畵鸞二切也 於是庾信廻軍 欲渡浿江<令><曰>後渡者斬之 軍士爭先半渡 句麗兵來掠 殺其未渡者 翌日信返追句麗兵 捕殺數萬級 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 知其未免 相謂曰 寧自盡 不死於他人手 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饗唐兵鴆之 皆死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按唐史 不言其所以死 但書云卒何耶 爲復諱之耶 鄕諺之無據耶 若壬戌年高麗之役 羅人殺定方之師 則後總章戊辰 何有請兵滅高麗之事 以此知鄕傳無據 但戊辰滅麗之後 有不臣之事 擅有其地而已 非至殺蘇李二公也].
신라별기에서 말하길, “문무왕 즉위 5년 을축(665) 가을 8월 경자에 왕이 친히 대병을 거느리고 웅진성에 갔다. 가왕 부여융을 만나 단을 만들고 흰말을 잡아서 맹세할 때, 먼저 천신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 뒤에 삽혈하고 글을 지어 맹세하기를, ‘지난번에 백제의 先王이 역리와 순리에 어두워, 이웃과의 우호를 두텁게 하지 않고, 인친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폭한 행동을 하여, 신라를 침해하여 성읍을 파괴하고 무찔러 죽임으로써 조금도 편안한 때가 없었다. 천자는 사물 하나라도 제 곳을 잃음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이 해독 입는 것을 불쌍히 여기어 자주 사신을 보내어 화호하기를 달랬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의 험함과 거리가 먼 것을 믿고 하늘의 법칙을 업신여기므로 황제가 이에 크게 노하여 죄를 묻는 정벌을 삼가 행하니, 깃발이 향하는 곳마다 한번 경계하여 크게 평정하였다. 진실로 그 궁택을 웅덩이로 만들어 자손을 경계하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빼어 후인에게 교훈을 보일 것이나, 복종하는 자를 품고 반란자를 정벌함은 선왕의 명령과 법이고, 망한 것을 흥하게 하고 끊어진 것을 잇게 함은 전대 현인의 통해온 법이며,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함은 모든 옛 서적에 전해온다. 그리하여 전 백제왕 사가정경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고향을 보전케 하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이 되어 각각 묵은 감정을 풀고 우호를 맺어 화친할 것이며, 삼가 조명을 받들어 길이 속방이 되라. 이에 사자 우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어 친히 임하여 권유하고 달래어 내 뜻을 갖추어 선포하니, (그대들은) 혼인을 약속하고 맹서를 아뢰며 희생을 잡아 삽혈을 하고 함께 시종을 두터이 할 것이며, 재앙을 나누고 환란을 구원하여 형제와 같이 은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삼가 조칙을 받들어 감히 잃지 말고, 이미 맹서한 후에는 함께 변하지 않는 지조를 지켜야 할 것이다. 만일 여기에 위배하여 그 덕이 변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신명이 이를 살펴 많은 재앙을 내리어 자손을 기르지 못하게 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제사도 끊어져 남김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계를 지어 종묘에 간직해두니 자손들은 만 대토록 혹 어기거나 범하지 말라. 신이여 이를 듣고 흠향하고 복을 주소서’라고 하였다. 삽혈이 끝난 후 폐백을 제단 북쪽에 묻고 맹서한 글을 대묘에 간직하니, 이 글은 대방도독 유인궤가 지은 것이다.”[위 당사의 글을 보면 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등을 당의 서울에 보냈다고 한다. 여기서는 부여왕 융을 만났다고 하니 당 황제가 융의 죄를 용서하고 놓아 보내어 웅진도독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맹세문에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증거가 된다] 또 고기에 이르기를, “총장 원년 무진(668)[총장 무진이면 이적의 사실이니, 아래 글에 소정방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정방의 일이라면 연호는 용삭 2년 임술(662)에 해당하니 평양에 와서 포위 했을 때의 일이다]에 국인이 청한 당의 원병이 평양 교외에 와서 진을 치고 (신라에) 서신을 보내어, 급히 군사물자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왕이 군신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군의 진영에 간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당군이 군량을 청했는데 그 군량을 보내주지 않는 것도 또한 마땅치 못한 일이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였다. 유신이 아뢰어 말하길, ‘신 등이 능히 그 군수물자를 수송할 것이니 왕은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유신․인문 등이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 2만 곡을 가져다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연합하려고 유신이 먼저 연기․병천 등 두 사람을 보내어 그 만날 시기를 물으니 당장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와 송아지 두 동물을 그려서 보내었다. 국인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원효법사에게 물으니 법사가 해석하여 말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 하는 것이다.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반절을 이른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유신이 군사를 돌이켜 패강을 건너려 할 때 명령을 내려, ‘뒤에 건너는 자는 목을 벤다’고 하였다. 군사가 서로 앞을 다투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병이 쫓아와서 미쳐 건너지 못한 자를 죽였다.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병을 반격하여 수만 명을 잡아죽였다.” 백제고기에는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아래로 강물에 닿아있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할지라도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타사암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속설이 잘못된 것이다. 다만 궁인이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더라도, 의자왕이 당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에 명백히 적혀 있다. 또 신라고전에는 “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머물고 있었다. 이에 유신은 그 음모를 알고 당병을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 상주의 경계에 당교가 있으니, 이것이 그 묻은 곳이라 한다.[당사를 보면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 만 하였으니 무슨 까닭인가, 감추기 위한 것인지 혹은 향전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년(662) 고구려를 치는 싸움에 신라인이 정방의 군사를 죽였다고 하면, 후일 총장 무진(668)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할 수 있었을까. 이로써 향전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진(662)에 고구려를 멸한 후 (신라가) 신하가 되지 않고, 마음대로 고구려의 땅을 소유한 일은 있으나, 소정방과 이적 두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