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사천

분류 문학 > 지리 > 일반

기본정보

백제의 첫 도읍지인 위례성의 다른 이름

일반정보

백제의 첫 도읍지인 위례성의 다른 이름으로, 사산(蛇山) 즉 직산(稷山)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왕력에는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하였는데 또는 사천이라고 하며 지금(고려)의 직산이다(都慰禮城 一云 虵川 今稷山)”라고 하였다. 즉 사천은 위례성의 이칭으로, 고려시대의 직산이라는 것이다. 사천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6 문무왕 8년(668)조에 신라가 고구려 군사를 사천(蛇川) 벌판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는 내용이 있고, 같은 책 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2년(414)조에도 왕이 사천의 뜰에서 사냥하여 흰 노루를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때의 사천은 평양시 동쪽의 합장강(合掌江) 일대로 추정되어(井上秀雄, 1980) 직산과는 별개의 곳으로 여겨진다.

『삼국유사』에서는 사천(虵川)이 지금(고려)의 직산이라 하였지만, 직산의 옛 지명은 사천이 아니라 “사산(蛇山)”이었다. 『삼국사기』 권35 잡지4 지리2 신라 한주 백성군(白城郡) 사산현(蛇山縣)조에는 “사산현은 본래 고구려의 현으로 경덕왕대도 그대로 두었는데 지금(고려)의 직산현이다(蛇山縣 本高句麗縣 景德王因之 今稷山縣)”라 하여, 사산이 직산의 옛 지명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권47 열전7 소나(素那)조에는 소나가 백성군(白城郡) 사산(蛇山) 사람이며, 사산현의 경계가 백제의 땅과 맞물려 있었으므로 거의 매달 서로의 침입과 공격이 벌어졌다는 내용이 전한다.

현재 충남 천안시 직산면 군동리 산 10-4번지에는 “사산성(蛇山城)”이 남아 있다. 성의 둘레 약 1,030m, 잔존높이 1.2.m 정도이고, 산정식산성(山頂式山城)과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 결합된 산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1985년~1987년에 걸쳐 조사된 바 있는데, 그 결과 사산성은 백제-고구려계의 축성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내부에서는 백제계와 신라계토기들이 나왔다. 이곳은 백제가 한강유역을 상실한 후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일시 고구려에 의해 점령된 후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성주탁․차용걸, 1994)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성(蛇城)”에 관한 기록이 2군데 보이고 있다. 하나는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책계왕 즉위년조에 보이는 “왕이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대비하였다(王慮其侵寇 修阿且城蛇城 備之)”는 기록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같은 책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조의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라는 기록이다. 여기에 보이는 “사성(蛇城)”은 직산에 있는 “사산성(蛇山城)”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 기존에는 사성을 풍납토성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이병도, 1976)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 구산토성(龜山土城)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고(방동인, 1974) 현재는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삼성동토성(三成洞土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도학, 1990)

참고문헌

방동인, 1974, 「風納里土城의 歷史地理的 檢討」 『白山學報』16.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井上秀雄 譯註, 1980, 『三國史記』1, 平凡社.
이도학, 1990, 「百濟 蛇城의 位置에 대한 再檢討」 『韓國學論集』17.
성주탁․차용걸, 1994, 『稷山 蛇山城』, 백제문화개발연구원.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一 溫祚王 [東明第三子 <一云> 第二 <癸>卯(立) 在位四十五 都(慰)禮城 一云 虵川 今<稷>山 丙辰 移都漢山 今廣州]
제1 온조왕 [동명의 셋째아들이다. 혹은 둘째 아들이라고도 한다. 계묘년에 즉위하여 45년간 재위하였다. 위례성에 도읍하였는데 또는 사천이라고 하며 지금의 직산이다. 병진년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