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군

송악군

분류 문학 > 지리 > 일반

기본정보

송악군(松岳郡)은 궁예가 898년 철원에서 도읍을 옮긴 곳으로 지금의 개성(開城)이다.

일반정보

송악군(松岳郡)은 궁예가 898년 철원에서 도읍을 옮긴 곳으로 지금의 개성(開城)이다. 송악지방은 원래 왕건세력의 근거지이며, 한반도의 중심에 가깝고 황해를 통하여 중국대륙을 향해 진출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임진강과 예성강의 두 강을 끼고 송악산, 천마산 등 산악에 의지해 외적을 방어하기에도 편리한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송악을 기반으로 한 왕건세력과 결합한 궁예는 898년 패강(浿江)지역 및 한산주(漢山州) 관내(管內)의 30여성을 차지하고,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송악군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 의하면, 궁예는 896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897년 송악으로 천도하고, 914년에 다시 철원으로 천도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2년조에는 898년에 송악으로 도읍을 정하고, 905년에 철원으로 천도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권50 열전10 궁예조에는 898년 송악에 도읍하고 904년 철원으로 천도하였다고 하여 기록의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궁예가 송악으로 천도한 시기에 대하여『삼국사기』신라본기의 898년을 따르고 있다.

궁예가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에 대하여,『삼국사기』권50 열전10 궁예조에는 “송악군은 한수의 북쪽의 이름난 군으로, 산수가 기이하고 수려하다고 하여 드디어 도읍으로 정했다(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고 하였으나 이러한 이유보다는 양길(梁吉)과의 대결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송악은 궁예가 패서지역과 한강 하류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한강수로를 타고 북상하는 양길에 대비할 수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왕건세력의 자발적인 귀부를 받았던 궁예는 송악에 천도함으로써 수전(水戰)에 익숙한 송악세력의 적극적인 협조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양길과의 대결을 위해 송악으로 천도한 궁예는 마침내 899년에 양길을 제압하게 된다. 이후 양길세력을 평정한 후에는 905년 다시 철원으로 환도하였다고 한다.(정선용, 1997)

또한 궁예가 송악으로 천도한 또 다른 이유는 송악에 근거를 둔 왕건가(王建家) 및 그에 인접한 패서 호족들과의 결합을 보다 공고히 하면서 그들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적극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송악에 천도한 지 3년만인 901년 궁예는 후고려를 건국 할 수 있었다.(조인성, 2007)

이후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왕건(王建)은 고려(高麗)를 건국하였으며, 919년에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참고문헌

정선용, 1997, 「弓裔의 勢力形成 過程과 都邑 選定」『韓國史硏究』 97.
조인성, 2007,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관련원문 및 해석

後高麗 弓裔 [大順庚戌 始投北原賊良吉屯 丙辰都鐵圓城[今東州也] 丁巳移都松岳郡 辛酉稱高麗 甲子改國號摩震 置元<武>泰 甲戌還鐵原]
후고려 궁예 [대순 경술에 처음엔 북원의 적 양길의 진영에 투항하였다. 병진에 철원성[지금의 동주이다]에 도읍하였다. 정사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신유에 고려라고 일컬었다. 갑자에 국호를 고쳐 마진이라고 하고 연호를 두어 무태라고 하였다. 갑술에 철원으로 돌아갔다.]

太祖[戊寅六月裔死 太祖卽位于鐵原京 己卯 移都松岳郡 是年 創法王 慈雲 王輪 內帝釋 舍那
又創天禪院 [卽普<濟>] 新興 文殊 (靈)通 地藏 前十大寺皆是年所創 庚辰 乳岩下立油市 故今俗利市云乳下 十月創大興寺 或系壬午 壬午 又創日月寺 或系辛寺 甲申 創外帝釋 新衆院 興國寺 丁亥 創妙寺 己丑 創龜山 庚寅安」] 丙申統三
태조[무인년(918) 6월에 죽으니 태조가 철원경에서 즉위하였다. 기묘년(919)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이 해에 법왕·자운·왕륜·내제석·사나 등의 절을 세우고 또 천선원[곧 보제]·신흥·문수·영통·지장 등의 절을 세웠으니 앞의 10대 사찰은 모두 이 해에 창건되었다. 경진년(920)에 유암 아래에 유시를 설치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 항간에서는 시장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유하라고 한다. 10월에 대흥사를 세우니 또는 임오년(922)의 일이라고도 한다. 임오년(922)에 또 일월사를 세우니 또는 신사년(921)의 일이라고도 한다. 갑신년(924)에 외제석·신중원·흥국사를 세우고, 정해년(927)에는 묘사를 기축년(929)에 귀산사를 세웠으며 경인년(930)에 안(이하미상)] 병신년(936)에 삼국을 통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