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성

철원성

분류 문학 > 지리 > 일반

기본정보

후고려의 도읍지(896-905)

일반정보

철원은 896년 궁예가 도읍을 정한 곳이다. 후고려를 세운 궁예는 이후 송악(松岳)으로 천도(遷都)하였다가 905년에 다시 철원(鐵圓)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 의하면, 궁예는 896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897년 송악으로 천도하고, 914년에 다시 철원으로 천도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2년조에는 898년에 송악으로 도읍을 정하고, 905년에 철원으로 천도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권50 열전10 궁예조에는 898년 송악에 도읍하고 904년 철원으로 천도하였다고 하여 기록의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는 궁예가 송악에서 철원으로 천도한 시기에 대하여 『삼국사기』신라본기의 905년을 따르고 있다.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한 까닭은 궁예의 초기 세력기반이 양길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길세력과의 대립을 피하려는 데에 있었다. 즉, 철원으로 도읍한 것은 양길과의 전면적인 대립을 피해 북상하던 궁예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는 철원지역의 경제력과 이에 바탕을 둔 지방세력들과의 협조를 기대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양길세력을 평정한 궁예는 송악으로 천도하였다가 905년 다시 철원으로 환도하였다.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7년조에 “궁예가 국도를 옮기려 하여 철원, 부양 등지에 가서 산수를 둘러보았다(弓裔欲移都 到鐵圓斧壤周覽山水)”고 하여 903년에 이미 철원 일대를 답사하면서 환도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궁궐을 사치스럽게 만들고 905년에 철원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강성한 세력을 갖게 된 궁예는 천도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를 병합하려는 과정에서 철원으로 천도했음을 알 수 있다. 송악의 경우 신라와의 접경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내륙에서의 싸움이 요구되는 궁예의 반신라정책에서 중요성이 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선용, 1997)

또한 궁예는 자신의 초기세력과 양길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귀부한 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 철원을 주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권50 열전10 궁예조에는 “청주의 민가 1천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서울로 삼았다.(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고 하였는데, 고구려계 유민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청주(靑州)민호(民戶) 1천(千)을 철원에 옮겨 충원한 이유는 궁예가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이다.(정선용, 1997)

궁예가 철원으로 천도를 한 이유에 대하여, 일반적으로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주목하거나 참위설(讖緯說)을 언급하나(최병헌, 1975), 궁예는 전제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자체기반의 확충을 위하여 천도를 단행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정선용, 1997)

한편, 현재 강원도 철원에는 궁예도성(弓裔都城)이 남아 있다. 성의 위치는 현재 비무장지대인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이며, 축성 년대는 서기 903~904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도성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이중(二重) 축조된 성인데, 밑 부분은 석축(石築)으로 상단은 토축(土築)으로 쌓았고, 규모는 외성의 둘레 4,370m. 내성 577m이다. 내성에는 궁예만이 사용하였던 어수정과 석등 등 많은 유적이 있었으나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현재 휴전선 비무장지대내에 유지가 일부 남아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최병헌, 1975, 「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禪宗과 風水地理說의 關係를 중심으로 하여-」『韓國史硏究』11.
최규성, 1987, 「弓裔政權의 性格과 國號의 變更」『상명여자대학논문집』19.
정선용, 1997, 「弓裔의 勢力形成 過程과 都邑 選定」『韓國史硏究』97.

관련원문 및 해석

後高麗 弓裔 [大順庚戌 始投北原賊良吉屯 丙辰都鐵圓城[今東州也] 丁巳移都松岳郡 辛酉稱高麗 甲子改國號摩震 置元<武>泰 甲戌還鐵原]
후고려 궁예 [대순 경술에 처음엔 북원의 적 양길의 진영에 투항하였다. 병진에 철원성[지금의 동주이다]에 도읍하였다. 정사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신유에 고려라고 일컬었다. 갑자에 국호를 고쳐 마진이라고 하고 연호를 두어 무태라고 하였다. 갑술에 철원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