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불칠처가람지허

전불칠처가람지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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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에 나타난 석가모니에 앞서 성도(成道)한 부처가 있던 시대에 있었다는 7곳의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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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불칠처가람지허(前佛七處伽藍之墟)는 현세에 나타난 석가모니에 앞서 성도(成道)한 부처가 있던 시대에 이루어졌다는 7곳의 절터를 말한다. 신라에 이러한 불교성지가 있다는 믿음은 문무왕 이후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불교 수용 이전에는 토착신앙의 제사 장소였으나 불교 이후에는 전불시대의 인연에 따라 절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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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전불칠처가람지허(前佛七處伽藍之墟)는 현세에 나타난 석가모니에 앞서 성도(成道)한 부처가 있던 시대에 이루어졌다는 7곳의 절터를 말한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전에 아도(阿道)가 이미 경주의 7곳에 사원을 세웠고, 인연을 만나지 못해 흥하지 못하다가 법흥왕대에 이르러 불법이 다시 흥하게 되었으며, 그 7곳의 사원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도의 칠처가람은 전불시대(前佛時代)에 가람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아도는 그 인연으로 그곳에 각각 사원을 두었다고 한다. 이들 칠처가람에 관하여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阿道基羅)조에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인용하여 기록한 전승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불시대에 이들 7곳에는 사원이 있어 과거의 부처가 이곳에서 설법하였다. 현세에 와서 아도는 어머니에 의해 이곳이 전불시대의 가람터임을 알고 그곳에 사원을 세웠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불법은 흥하지 못했다. 천경림(天鏡林)은 지금의 흥륜사(興輪寺), 삼천기(三川岐)는 지금의 영흥사(永興寺), 용궁남(龍宮南)은 지금의 황룡사(黃龍寺), 용궁북(龍宮北)은 지금의 분황사(芬皇寺), 사천미(沙川尾)는 지금의 영묘사(靈妙寺), 신유림(神遊林)은 지금의 천왕사(天王寺), 서청전(婿請田)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아도본비」에서 칠처가람을 열거한 순서는 창건된 시기의 순서에 따른 것이다. 흥륜사는 법흥왕 14년(527), 영흥사는 법흥왕 14년(527),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 분황사는 선덕왕 3년(634), 영묘사는 선덕왕 4년(635), 천왕사는 문무왕 19년(679), 담엄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한편, 『삼국유사』 권3 탑상4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조에 의하면, “신라 월성 동쪽 용궁 남쪽에 가섭불연좌석이 있는데, 그 땅은 곧 전불시대의 절터이다. 지금의 황룡사 땅은 곧 일곱 절의 하나이다.(新羅月城東 龍宮南 有迦葉佛宴坐石 其地卽前佛時伽藍之墟也 今皇龍寺之地 卽七伽藍之一也)”라고 하여 가섭불연좌석설이 칠처가람설과 연계되어 전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칠처가람설을 생성시킨 사상적 근거는 불교 인연설에 의한 불국토설에 있으며, 불국토설은 이미 중고기에 황룡사를 중심으로 강조되었던 것이다. 즉 신라가 전불시대의 가람터라는 구체적인 증거로서 황룡사에 가섭불이 연좌했다고 전해지는 석물(石物)이 있다는 전승이 전해졌던 것이다.

과거세의 부처 가운데 석가불 이전에 출현했던 가섭불에 대하여, 『삼국유사』 권3 탑상4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조에 의하면, “가섭불은 현겁(賢劫) 제3존(尊)으로 인간세 2만년일 때 출현했던 부처(迦葉佛是賢劫第三尊也 人壽二萬歲時 出現於世)”라고 하여 시기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칠처가람설에서는 이들 사찰들이 단지 전불시기라고만 하였을 뿐, 과거불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는 않고 있다. 이로 보아 구체성을 지닌 가섭불연좌석설이 먼저 형성되고, 뒤에 이를 바탕으로 하여 칠처가람설이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신동하, 2001)

이들 칠처가람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전 시기 토착신앙과 관련된 장소였다는 견해가 있다.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조에 「아도본비」를 인용하여 기록한 전불칠처가람지허에는 천경림, 삼천기, 용궁남, 용궁북, 사천미, 신유림, 서청전이 나타나 있는데, 이들은 고대신앙에서의 신성지역이며, 삼한시대에 소도(蘇塗)로 불리던 지역이었다는 것이다.(이기백, 1978) 그 중 용궁남과 용궁북에서 ‘용궁’은 용신(龍神)을 모시는 제장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용왕신앙은 계급이 분화되고 경제력이 분화된 신앙이므로, 불교의 이념과 근사한 성격을 지녔고, 따라서 불교와 강하게 대립하지 않고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다.(강영경, 1992)

천경림은 흥륜사 자리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이다. 그 이름으로 보아 천신(天神)에 대한 제장이었을 것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운 「도리사아도화상사적비(挑李寺阿度和尙事蹟碑)」에는 “천경림”으로 표기되어 있어, 천신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천기는 영흥사 자리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모량천과 남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강물이 만나는 곳을 신성시하였던 것 같다. 사천미는 영묘사 자리라고 하였으며, 사천(沙川, 南川)이 끝나는 지점으로, 지금의 전흥륜사지이다. 신유림은 사천왕사 자리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사이의 숲이다. 이름 그대로 신들이 노닐던 숲인데, 수목신앙(樹木信仰)의 제장으로 생각된다. 서청전은 담엄사 자리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오릉(五陵) 남쪽이다. 이름을 보면 토지신(土地神)에 대한 제장이었던 듯 하다. 칠처가람지허는 결국 천신(天神), 천신(川神), 용신(龍神), 수목신(樹木神), 토지신(土地神)에 대한 제장이었으며, 신유림을 제외하고는 모두 왕경(王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 상대 토착신앙의 제장은 주로 남천(南川)과 서천(西川)을 끼고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칠처가람지허를 수장사회(首長社會, chiefdom) 단계에서 자연신(自然神)을 숭배하던 제장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토착신앙의 제장이 나중에 불교와 융화하여 불교사찰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최광식, 2007)

이제 이들 전불칠처가람(前佛七處伽藍)설이 생성된 시기에 대해 살펴보자. 전불칠처가람지허를 구체적으로 후대의 사찰과 연결시킨 것은 『삼국유사』 찬자의 주(註)에서 나타난다. 흥륜사의 경우, 천경림에는 아도에 의해 처음 사찰이 창건되었다가 중간에 폐지되었고, 다시 법흥왕대에 흥륜사가 두어졌으며, 이후 크게 공사를 벌여 진흥왕대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다른 사찰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서술하였으나, 법흥왕 이후 개창된 사찰의 이름과 시기만을 언급하는데 그치고 있다. 따라서 이 설화는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칠처가람 중 마지막에 세워진 사천왕사가 문무왕대에 세워졌으므로, 칠처가람설은 빨라도 문무왕(재위, 661-681)대 이후에 성립된 설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칠처가람설은 이전의 창건설화를 소재로 하여 7사찰을 하나로 묶는 방식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곧, 칠처가람은 최소 150년 이상의 기간을 두고 모두 창건되었는데, 오랜 기간 동안 이들 사찰이 일관된 계획에 의해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칠처가람설은 이미 칠처가람이 개창된 이후에 생성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칠처가람이 과거불과 연관된 사찰들로 함께 묶여졌다는 것은, 이들이 중고기 불교의 특징을 반영하는 사찰들로, 과거세 이래의 불교 인연을 강조하기에 적합한 역사적 배경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칠처가람이 모두 신라 불교에서 중시되던 때에 이들이 함께 묶여질 수 있었을 것이므로, 칠처가람설이 형성된 구체적인 시기는 중대 말 하대 초인 8-9세기경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에 의하면, 칠처가람을 한 세트로 하여 왕경사원들이 묶여진 것은 국가적 불교의 성격 때문이며, 이때 불교전래와 이차돈 순교 등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초전 불교 사원인 흥륜사 등과 함께 황룡사의 중요성도 강조되었다고 한다.(신동하, 2001)

한편, 전불칠처가람설이 신라 하대에 미륵하생신앙에 의해 생겼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신라 하대까지 여기저기 형성되어 있던 전불시대 가람설이 칠처가람설로 정착되는 과정과 관련하여, 『삼국유사』 권3 탑상4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조에 보이는 흥륜사 금당(金堂)에 모셔진 10성(聖)을 주목한 것이다. 이들 10성은 아도(阿道)부터 표훈(表訓)까지이므로 표훈 이후에 봉안되었을 것이며, 대개 신라 하대에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을 봉안하게 된 사상적 배경으로는 미륵하생신앙과 말법사상의 결합에 있다고 한다. 미륵하생신앙이란 미륵이 계신 세상에 태어나 미륵불의 교화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불(前佛) 칠불(七佛)의 처소에서 공덕을 쌓은 인연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흥륜사 금당 10성의 봉안과 칠처가람설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서 의도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신라 하대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에서 신라 불국토설의 확인을 위해 전불시대를 제창하였으며, 이후 신라에 10성이 나서 불국토를 이루어간 것을 흥륜사 10성 봉안으로 표출해낸 것이라 하였다.(김복순, 2002)

참고문헌

이기백, 1978, 「삼국시대 불교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한국연구원.
강영경, 1992,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新羅 傳統信仰의 政治·社會的 機能 硏究』,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신동하, 2001, 「新羅佛國寺 思想과 皇龍寺」『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22(皇龍寺의 綜合的 考察),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김복순, 2002, 「興輪寺와 七處 伽藍」『新羅文化』20.
최광식, 2007, 「신라 상대의 제장」『한국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고려대학교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
阿道基羅[一作我道又阿頭]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於家中作堀室安置 時梁遣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遣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遍問國中 墨胡子見之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訥祗在晉宋之世 而云梁遣使 恐誤] 時 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 厚加賚貺 俄而不知所歸 又至二十一毗處王時 有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疾而終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有注云 與本碑及諸傳記殊異 又高僧傳云西竺人 或云從吳來] 按我道本碑云 我道高麗人也 母高道寧 正始間 曹魏人我[姓我也]崛摩奉使句麗 私之而還 因而有娠 師生五歲 其母令出家 年十六歸魏 省覲崛摩 <投>玄彰和尙講下就業 年十九又歸寧於母 母謂曰 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其京都內有七處伽藍之墟 一曰金橋東天鏡林[今興輪寺 金橋謂西川之橋 俗訛呼云松橋也 寺自我道始基而中廢 至法興王丁未草創 乙卯大開 眞興王畢成] 二曰三川歧[今永興寺 與興輪開同代] 三曰龍宮南[今皇龍寺 眞興王癸酉始開] 四曰龍宮北[今芬皇寺 善德甲午始開] 五曰沙川尾[今靈妙寺 善德王乙未始開] 六曰神遊林[今天王寺 文武王己卯開]七曰婿請田[今曇嚴寺] 皆前佛時伽藍之墟 法水長流之地 爾歸彼而播揚大敎 當東嚮於釋祀矣 道禀敎至雞林 寓止王城西里 今嚴莊寺 于時<未>雛王卽位二年癸未也 詣闕請行敎法 世以前所未見爲嫌 至有將殺之者 乃逃隱于續林[今一善縣]毛祿家[祿與禮形近之訛 古記云 法師初來毛祿家 時天地震驚 時人不知僧名而云阿頭彡麽 彡麽者乃鄕言之稱僧也 猶言沙彌也] 三年 時 成國公主疾 巫醫不効 勅使四方求醫 師率然赴闕 其疾遂理 王大悅 問其所須 對曰 貧道百無所求 但願創佛寺於天<鏡>林 大興佛敎 奉福邦家爾 王許之 命興工 俗方質儉 編茅葺屋 住而講演 時或天花落地 號興輪寺 毛祿之妹名史氏 投師爲尼 亦於三川歧 創寺而居 名永興寺 未幾 <未>雛王卽世 國人將害之 師還毛祿家 自作塚 閉戶自絶 遂不復現 因此大敎亦廢 至二十三法興大王 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 乃興釋氏 距<未>雛王癸未之歲二百五十二年 道寧所言三千餘月 驗矣 據此 本記與本碑 二說相戾不同如此 嘗試論之 梁唐二僧傳 及三國本史皆載 麗濟二國佛敎之始 在晋末太元之間 則二道法師 以小獸林甲戌 到高麗明矣 此傳不誤 若以毗處王時方始到羅 則是阿道留高麗百餘歲乃來也 雖大聖行止出沒不常 未必皆爾 抑亦新羅奉佛 非晩甚如此 又若在<未>雛之世 則却超先於到麗甲戌百餘年矣 于時 雞林未有文物禮敎 國號猶未定 何暇阿道來請奉佛之事 又不合高麗未到而越至于羅也 設使暫興還廢 何其間寂寥無聞 而尙不識香名哉 一何大後 一何大先 揆夫東漸之勢 必始于麗濟而終乎羅 則訥祗旣與獸林世相接也 阿道之辭麗抵羅 宜在訥祗之世 又王女救病 皆傳爲阿道之事 則所謂墨胡者非眞名也 乃指目之辭 如梁人指達摩爲碧眼胡 晋調釋道安爲柒道人類也 乃阿道危行避諱 而不言名姓故也 蓋國人隨其所聞 以墨胡阿道二名 分作二人爲傳爾 況云阿道儀表似墨胡 則以此可驗其一人也 道寧之序七處 直以創開先後預言之 <兩>傳失之 故今以沙川尾躋於五次 三千餘月 未必盡信 <蓋>自訥祗之世 抵乎丁未 无慮一百餘年 若曰一千餘月 則殆幾矣 姓我單名 疑贗難詳 又按元魏釋曇始[一云惠始]傳云 始關中人 自出家已後 多有異迹 晉孝武太元(九)年末 齎經律數十部 往遼東宣化 現授三乘 立以歸戒 盖高麗聞道之始也 義熙初復還關中 開導三輔 始足白於面 雖涉泥水 未嘗沾濕 天下咸稱白足和尙云 晉末 朔方匈奴赫連勃勃 破獲關中 斬戮無數 時始亦遇害 刀不能傷 勃勃嗟嘆之 晉赦沙門 悉皆不殺 始於是潛遁山澤 修頭陁行 拓拔燾復剋長安 擅威關洛 時有博陵崔皓 小習左道 猜嫉釋敎 旣位居爲輔 爲燾所信 乃與天師寇謙之說燾 佛敎無益 有傷民利 勸令廢之云云 太平之末 始方知燾將化時至 乃以元會之日 忽杖錫到宮門 燾聞令斬之 屢不傷 燾自斬之亦無傷 飼北園所養虎 亦不敢近 燾大生慚懼 遂感癘疾 崔寇二人 相次發惡病 燾以過由於彼 於是誅滅二家門族 <宣>下國中 大<弘>佛法 始 後不知所終 議曰 曇始以太元末年到海東 義熙初還關中 則留此十餘年 何東史無文 始旣恢詭不測之人 而與阿道墨胡難陁 年事相同 三人中疑一必其變諱也 讚曰 雪擁金橋凍不開 鷄林春色未全廻 可怜靑帝多才思 先著毛郞宅裏梅

아도(阿道)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 한다.]
「신라본기(新羅本記)」제4에 이르기를 “제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에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다. 군(郡)사람 모례(毛禮)[혹은 모록(毛祿)이라고 한다.]가 집안에 굴을 파고 그를 안치(安置)하였다. 이때 양(梁)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을 주었다.[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에서 원표(元表)란 사승(使僧)을 보내고 명단(溟檀)과 불경·불상[經像]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군신(君臣)이 그 향(香)의 이름과 쓰는 법을 몰라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며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보고 말하기를, ‘이는 향이란 것인데, 그것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몹시 풍기어 신성(神聖)에게 정성이 통하는 것이다.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사르고 발원(發願)하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으리라’고 하였다.[눌지(訥祗)는 진(晉)·송(宋)시대에 해당하니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때 왕녀(王女)가 병이 위독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서원을 표하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후하게 예물을 주었는데, 조금 있다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또 제 21대 비처왕(毗處王, 재위 479-500)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명과 역시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수년을 머물다가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명은 남아있으면서 경문(經文)과 율법(律法)을 강독하니 왕왕 신봉자가 있었다.[주(注)에 이르되 「본비(本碑)」 및 모든 전기(傳記)와 다르다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축인(西竺人)이라 하였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고 하였다.「아도본비(我道本碑)」에 의하면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으로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曺魏)사람 아(我)[아(我)는 성(姓)이다.]굴마(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그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아도가 출생하여 5세에 그의 어머니가 출가하게 하였다.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강석(講席)에 나아가 배웠다. 19세에 또 돌아와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가 이르기를,‘이 나라는 지금까지 불법을 모르지만, 이후 3천여 개월이 되면 계림(鷄林)에 성왕(聖王)이 나와서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서울 안에 일곱 곳의 가람(伽藍)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지금의 흥륜사(興輪寺)로, 금교는 서천교(西川橋)이니 속어(俗語)로 잘못하여 솔다리[松橋]라고 한다. 이 절은 아도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인데, 중간에 폐지되었다.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정미(丁未, 527)에 이르러 처음 열었고, 을묘(乙卯, 535)에 크게 개창(開倉)하여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에 마쳤다.], 둘째는 삼천기(三川岐)[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다. 흥륜사(興輪寺)와 동시에 개창하였다.],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黃龍寺)이다. 진흥왕 계유(癸酉, 553)에 처음 개창되었다.], 넷째는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이다.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갑오(甲午, 634)에 처음 개창되었다.],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지금의 영묘사(靈妙寺)이다. 선덕왕 을미(乙未, 635)에 처음 개창되었다.],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지금 천왕사(天王寺)이다.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기묘(己卯, 679)에 개창되었다.], 일곱째는 서청전(婿請田)[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으로서 모두 전불(前佛) 시대의 가람(伽藍)터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르던 땅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東)으로 향하리라.’하였다. 아도가 가르침을 받고 계림에 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우거(寓居)하니,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고, 때는 미추왕(未雛王, 재위 262-284) 즉위 2년 계미(癸未, 263)였다. 대궐에 들어가서 교법을 행하기를 청하니, 세상에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려하였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록(祿)은 예(禮)와 형태가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승(僧)이란 이름을 모르고 아두삼마(阿頭彡麽)라 하였다. 삼마(彡麽)는 향언(鄕言)으로 승(僧)을 가리키는 말이니, 사미(沙彌)라는 말과 같다.”고 하였다.]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3년이 지났을 때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의(巫醫)의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의사를 구하였다. 법사가 급히 대궐에 들어가 그 병을 치료하니 왕이 대단히 기뻐하고 그 소원을 물었다. 대답하기를,‘빈도(貧道)는 백에 구하는 바가 없고, 다만 천경림에 불사(佛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켜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였는데, 그때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집을 덮고 거주하면서 강연(講演)하니 간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그 절 이름을 흥륜사(興輪寺)라 하였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어 또한 삼천기(三川岐)에 절을 짓고 거주하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니 국인(國人)들이 법사를 해하려하여 법사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마침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불교 또한 폐지되었다. 제 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 재위 514-540)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에 즉위하여 불교[釋氏]를 일으켰는데, 미추왕 계미(癸未)와 252년 떨어졌다. 고도령이 말한 3천여 개월이 들어맞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설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이를 한 번 시론해본다. 양(梁)·당(唐) 두 승전(僧傳)과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모두 여(麗)·제(濟)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 태원(太元) 연간(376-396)이라고 하였으니 이도(二道, 순도와 아도)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王) 갑술(甲戌, 374)에 고구려에 온 것이 분명하므로 이 전(傳)은 잘못되지 않았다. 만일 비처왕 때에 비로소 신라에 왔다면, 이것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100여 년을 있다가 온 것이 된다.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거지와 출몰(出沒)이 비상(非常)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모두 이렇지는 않다. 또한 신라의 불교신봉이 이렇게 심하게 늦지는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고구려에 들어온 갑술년보다도 100여 년 전이 된다. 그때는 계림에 아직 문물(文物)과 예교(禮敎)도 없었고, 국호도 아직 정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교를 받들자고 청하였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오지 않고 신라로 넘어왔다는 것이 불합리하다. 설령 잠시 일어났다가 곧 폐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적막하여 소문이 없었으며, 향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였을까. 하나는 어찌 그리 뒤지고 하나는 어찌 그리 앞섰을까. 생각컨대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지는 형세가 반드시 고구려·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마쳤을 것이다. 즉, 눌지왕대는 소수림왕대와 서로 가까우니, 아도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에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자란 것도 진짜 이름이 아니고 지목한 말일 것이다. 마치 양나라 사람이 달마(達摩)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하고 진나라에서 석도안(釋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고 한 것과 같다. 즉 아도가 위태로운 일을 하느라 이름을 숨겨 성명을 말하지 않은 까닭이다. 아마 나라 사람들이 들은 바에 따라 묵호·아도의 두 이름으로써 두 사람을 구분하여 전한 것이다. 더구나 아도의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같다 하였으니 이것으로도 그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고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든 것은 곧 개창의 선후를 예언한 것이나, 두 전(傳)이 다 잘못하였으므로 이제 사천미를 다섯 번째에 실은 것이며, 3천여 개월이란 것도 꼭 다 믿을 수는 없다. 대개 눌지왕 때로부터 (법흥왕) 정미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백여 년이 되므로 1천여 월이라고 하면 거의 비슷하다. 성(姓)을 아(我)라 하고 외자 이름을 칭한 것은 거짓인 듯 하나 자세하지 않다. 또 북위[元魏] 석담시(釋曇始)[혜시(惠始)라고도 한다.]전(傳)을 살펴보면,“담시는 관중(關中)사람으로 출가한 뒤 특이한 행적이 많았다. 진(晉)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6) 태원(太元) 9년(384) 말에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교화를 펴 삼승(三乘)을 가르쳐 곧 귀계(歸戒)하게 하였는데, 대개 이것이 고구려가 불도(佛道)를 듣게 된 시초였다. 의희(義熙, 405-418) 초년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서 삼보(三輔)를 개도(開導)하였다. 담시의 발이 얼굴보다 희어서, 비록 진흙물을 건너도 조금도 젖지 않았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다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한다. 진나라 말기에 삭방(朔方)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을 격파하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이때에 담시도 화(禍)를 만났으나 칼이 해하지 못하니 발발(勃勃)이 탄식하여 널리 사문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가 이에 몰래 산택(山澤)으로 도망하여 두타(頭陁)의 행(行)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 재위 423-452)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관중과 낙양에서 위엄을 떨쳤다. 그때 박릉(博陵)에 최호(崔皓)란 자가 있어 좌도(左道, 도교)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이미 지위가 보(輔)가 되어 탁발도의 신임을 얻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를 설득하기를,‘불교는 무익하고 민생에 유해하다.’고 하여 폐하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태평(太平, 556-557) 말년에 담시가 바야흐로 탁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온 것을 알고 이에 원회(元會)일에 홀연히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탁발도가 듣고 참(斬)하라고 명하였다. 여러번 참하되 상하지 아니하므로 탁발도가 스스로 그를 참하였으나 역시 상하지 않았다. 북원(北園)에 기르고 있는 호랑이에게 주었더니 역시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탁발도가 크게 부끄럽고 두려워하더니 드디어 지독한 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리었다. 탁발도는 이 허물이 그들 때문이라고 하여 이에 두 집 문족(門族)을 죽이고 국내에 선언하여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담시의 후에 끝난 바는 알 수 없었다. 찬한다. 담시가 태원(太元) 말년에 해동에 왔다가 의희(義熙) 초년에 관중으로 돌아갔다면 이곳에 머무른 것이 10여 년인데, 어찌 동국의 역사에 기록이 없으리오. 담시는 이미 괴이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아도, 묵호자, 난타와 연대와 사적이 서로 같으니, 세 명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그 이름을 바꾼 것으로 의심된다. 찬한다. 금교에 쌓인 눈 아직 녹지 않았고, 계림에 봄빛이 돌아오지 않았을 제, 어여쁘다. 봄의 신은 재주도 많아, 모랑댁(毛郞宅) 매화꽃 먼저 피게 하였네.

(『삼국유사』 권3 탑상4 가섭불연좌석)
迦葉佛宴坐石
玉龍集及慈藏傳 與諸家傳紀皆云 新羅月城東 龍宮南 有迦葉佛宴坐石 其地卽前佛時伽藍之墟也 今皇龍寺之地 卽七伽藍之一也 按國史 眞興王卽位十四 開國三年癸酉二月 築新宮於月城東 有皇龍現其地 王疑之 改爲皇龍寺 宴坐石在佛殿後面 嘗一謁焉 石之高可五六尺 來圍僅三肘 幢立而平頂 眞興創寺已來 再經災火 石有拆裂處 寺僧貼鐵爲護 乃有讚曰 惠日沈輝不記年 唯餘宴坐石依然 桑田幾度成滄海 可惜巍然尙未遷 旣而西山大兵已後 殿塔煨燼 而此石亦夷沒 而僅與地平矣 按阿含經 <迦>葉佛是賢劫第三尊也 人壽二萬歲時 出現於世 據此以增減法計之 每成劫初 皆壽無量歲 漸減至壽八萬歲時 爲住劫之初 自此又百年減一歲 至壽十歲時 爲一減 又增至人壽八萬歲時 爲一增 如是二十減二十增 爲一住劫 此一住劫中 有千佛出世 今本師釋迦是第四尊也 四尊皆現於第九減中 自釋尊百歲壽時 至迦葉佛二萬歲時 已得二百萬餘歲 若至賢劫初第一尊拘留孫佛時 又幾萬歲也 自拘留孫佛時 上至劫初無量歲壽時 又幾何也 自釋尊下至于今至元十八年辛巳歲 已得二千二百三十矣 自拘留孫佛 歷迦葉佛時 至于今 則直幾萬歲也 有本朝名士吳世文 作歷代歌 從大金貞祐七年己卯 逆數至四萬九千六百餘歲 爲盤古開闢戊寅 又延禧宮錄事金希寧所撰大一<曆>法 自開闢上元甲子 至元豊甲子 一百九十三萬七千六百四十一歲 又纂古圖云 開闢至獲麟 二百七十六萬歲 按諸經 且以迦葉佛時至于今 爲此石之壽 尙距於劫初開闢時爲兒子矣 三家之說 尙不及玆兒石之年 其於開闢之說 疎之遠矣

가섭불연좌석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및 제가(諸家)의 전기(傳紀)에는 모두 이르길, 신라(新羅)의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다. 그 곳은 즉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 터이니 지금 황룡사(皇龍寺)의 지역은 7가람의 하나라 하였다.『국사(國史)』에 의하면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즉위 14년인 개국(開國, 551-567) 3년(553) 계유 2월에 월성 동쪽에 신궁(新宮)을 건축할 때 그 지역에서 황룡이 나타나므로 왕이 의아스럽게 여겨 고쳐 황룡사(皇龍寺)로 삼았다. 연좌석(宴坐石)은 불전후면(佛殿後面)에 있었다. 전에 한번 참배한 바 돌의 높이는 5․6척 가량이오 그 둘레는 겨우 3발이며 우뚝하고 위는 편편하였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뒤로 두 번 화재를 겪어 돌에 갈라진 곳이 생겼으므로 사승(寺僧)이 철(鐵)을 붙여 보호하였다. 찬한다. “혜일(惠日)의 광휘(光輝), 그 어느 때 침쇠(沈衰)했던가 쓰여 있지 않으나 오직 연좌석만은 의연히 남았도다. 상전(桑田)이 몇 번이나 변해 창해(滄海)가 되었더냐. 애닮다, 아직도 우뚝한 채 그 자리를 옮기지 아니했도다.”그 후 서산(西山)의 큰 병란(몽고의 침입) 이후 불전과 탑이 모두 타버리고 이 돌도 파묻혀 겨우 땅과 평평하게 되었을 뿐이다.『아함경(阿含經)』을 보면 가섭불(迦葉佛)은 현겁(賢劫) 제3존(第三尊)이라 사람의 나이로 2만 세 때에 세상에 출현하였다 한다. 이에 의하여 증감법(增減法)으로 계산하면 언제나 성겁(成劫)의 처음에는 모두 무량세(無量歲)를 누리지만, 점점 줄어들어 수명 8만 세에 이르면 그 때는 주겁(住劫)의 처음이 된다. 이때로부터 또 1백년에 1세씩 감(減)하여 10세에 이르는 사이가 1감(一減)이 되고 또 증가하여 수명이 8만 세에 이르는 사이가 1증(一增)이다. 이렇게 20번 감(減)하고 20번 증(增)하면 1주겁(一住劫)이 된다. 이 1주겁 중에 천불(千佛)이 세상에 출현하는데, 지금 본사(本師) 석가(釋迦)는 제4존(第四尊)이다. 4존(四尊)은 다 제9감(第九減) 중에 나타난다. 석존(釋尊)이 1백세를 누린 때부터 가섭불(迦葉佛)이 2만세를 누릴 때까지는 이미 2백만여 세나 되었다. 만일 현겁(賢劫)의 초기의 제1존(第一尊)인 구류손불(拘留孫佛)때에 이른다면 또 몇 만 세가 될 것이며, 구류손불(拘留孫佛)때로부터 위로 겁초(劫初)의 무량세(無量歲)를 누릴 때까지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석존(釋尊)때부터 내려와 지금의 지원(至元, 1264-1294) 18년 신사(辛巳, 1281)에 이르기까지가 이미 2천 2백 30년이 되었으니, 구류손불(拘留孫佛)때부터 가섭불(迦葉佛)의 시기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몇 만 년이나 될 것이다. 본조(本朝, 고려)의 명사(名士) 오세문(吳世文)이 지은 「역대가(歷代歌)」에 금(金)나라 정우(貞祐, 1213-1217) 7년 기묘(己卯, 1219)에서 거슬러 4만 9천 6백여 세에 이르면 즉 반고(盤古)가 개벽(開闢)하던 무인(戊寅)이 된다고 하였다. 또 연희궁녹사(延禧宮錄事) 김희령(金希寧)이 지은 「대일역법(大一曆法)」에는 개벽(開闢)의 상원(上元) 갑자(甲子)로부터 원풍(元豊, 1078-1085) 갑자(甲子, 1084)에 이르기까지가 193만 7천 6백 41세라 하였고, 또 「찬고도(纂古圖)」에는 개벽(開闢)에서 획린(獲麟, 기원전 477) 때까지가 276만 세라 하였다. 여러 경을 보면 가섭불(迦葉佛) 때로부터 지금까지가 이 (연좌)석의 나이가 된다 하였으니, 겁초(劫初) 개벽(開闢)한 시기와 서로 떨어져 있음은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삼가(三家)의 말이 오히려 이 어린아이 돌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개벽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나 소홀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