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황권

풍류황권

분류 문학 > 문화 > 서적

기본정보

화랑의 이름이 적힌 명부

일반정보

풍류황권(風流黃卷)은 그 실체를 알기 어려우나, 화랑의 이름이 적힌 명부로 추측된다. “황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옛사람들이 황색의 종이를 사용해 서사한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전문정보

풍류황권(風流黃卷)은 그 실체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죽지랑조(孝昭王代竹旨郞)에 따르면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得烏)가 풍류황권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고 되어 있다. 또 『삼국유사』 권4 의해5 이혜동진(二惠同塵)에 따르면 화랑 호세랑(好世郎)이 “황권”에서 이름을 면(免)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기록들로 보아 일반적으로 황권 혹은 풍류황권이란 곧 화랑의 낭도들의 이름을 기록한 명부라고 보고 있다.

풍류에 대해서는,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화랑도(花郞道)”를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화랑도(花郞道)”는 1930년대에 일본학자들에 의해 생겨난 신조어로서 잘못 쓰인 말이라고 한다.(김상현, 1991)

한편 “황권”은 풍류황권과 같은 의미로서 옛사람들이 황색의 종이를 사용하여 서사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강인구 외, 2002)

참고문헌

김상현, 1991, 「花郞에 관한 諸名稱의 檢討」『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集』12.
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2002, 『譯註 三國遺事』, 이회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 죽지랑)
孝昭王代 竹旨郞[亦作竹曼 亦名智官]
第三十二孝昭王代 竹曼郞之徒 有得烏[一云谷]級干 隷名於風流黃卷 追日仕進 隔旬日不見 郞喚其母問 爾子何在 母曰 幢典牟梁益宣阿干 以我子差富山城倉直 馳去行急 未暇告辭於郞 郞曰 汝子若私事適彼則不須尋訪 今以公事進去須歸享矣 乃以舌餠一合酒一缸,<率>左人[鄕云 皆叱知言奴僕也]而行 郞徒百三十七人亦具儀侍從 到富山城問閽人 得烏失奚在 人曰 今在益宣田 隨例赴役 郞歸田 以所將酒餠饗之 請暇於益宣 將欲偕還 益宣固禁不許 時有使吏侃珍 管收推火郡能節租三十石輸送城中 美郞之重士風味 鄙宣暗塞不通 乃以所領三十石 贈益宣助請猶不許 又以珍節舍知騎馬鞍具貽之乃許 朝廷花主聞之 遣使取益宣 將洗浴其垢醜 宣逃隱 掠其長子而去 時仲冬極寒之日 浴洗於城內池中仍合凍死 大王聞之 勅牟梁里人從官者竝合黜遣 更不接公署 不著黑衣 若爲僧者 不合入鐘鼓寺中 勅史上侃珍子孫 爲枰定戶孫 標異之 <圓>測法師是海東高德 以牟梁里人 故不授僧職 初述宗公爲朔州都督使 將歸<治>所 時三韓兵亂以騎兵三千護送之 行至竹旨嶺 有一居士平理其嶺路 公見之歎美 居士亦善公之威勢赫甚 相感於心 公赴州<治>隔一朔 夢見居士入于房中 室家同夢驚怪尤甚 翌日使人問其居士安否 人曰 居士死有日矣 使來還告 其死與夢同日矣 公曰 殆居士誕於吾家爾 更發卒修葬於嶺上北峯 造石彌勒一軀安於塚前 妻氏自夢之日有娠 旣誕 因名竹旨 壯而出仕與庾信公爲副帥統三韓 眞德太宗文武神文四代爲冡宰 安定厥邦 初得烏谷 慕郞而作歌曰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 哭屋尸以憂音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 宿尸夜音有叱下是
효소왕대 죽지랑[또는 죽만(竹曼) 또는 지관(智官)]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 죽만랑(竹曼郞)의 낭도 중에 득오(得烏)[또는 곡(谷)] 급간(級干)이 있었다.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출근하였다. 열흘 동안 보이지 않기에 낭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당전(幢典)인 모량(牟粱)의 익선(益宣) 아간(阿干)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의 창직(倉直)으로 뽑아갔는데, 빨리 가느라고 미처 낭에게 말씀드릴 겨를도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낭이 말하기를, “당신 아들이 만약 사사로운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이제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소”라고 하고, 이에 설병(舌餠)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左人)[우리말에 개질지(皆叱知)라고 하니 노복(奴僕)을 말한다.]을 거느리고 갔다. 낭의 무리 1백37명도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문지기는 답하기를,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낭은 밭으로 가서 가져간 술과 떡을 대접하였다.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가려고 했으나 익선은 굳이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능절(能節)의 조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수송하고 있었는데, 죽만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모를 아름답게 보고, 익선의 어리석은 고집과 융통성 없음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조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래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또 진절(珍節) 사지(舍知)의 말안장을 주니 그때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를 듣고 사자를 보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러움을 씻기려고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 맏아들을 잡아갔다. 그때는 중동(仲冬)의 몹시 추운 날이었으므로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이내 얼어 죽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칙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자는 모두 쫓아내어 다시는 관서에 관계하지 못하게 하고, 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도 종고(鐘鼓)를 단 큰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사에게 명하여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枰定戶孫)으로 삼고 그를 표창하였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海東)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 이전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장차 임지로 가려 하는데, 이때 삼한에 병란이 있었으므로 기병 3천 명으로 그를 호송하였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그 고개길을 닦고 있었다. 공은 이를 보고 찬탄하였고,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성함을 존대하여 서로 마음에 감동되었다. 공이 주의 치소에 부임한 지 한 달이 더 되던 때 꿈에 거사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이튿날 사람을 보내 그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 지 며칠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아뢰었는데, 그가 죽은 날이 꿈꾸던 바로 그날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군사를 보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불 한 구를 만들어 무덤 앞에 봉안하였다. 부인은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이를 낳자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하였다. 장성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부수(副帥)가 되어 유신공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였고, 진덕(眞德)․태종(太宗)․문무(文武)․신무(神武)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간 봄 그리워하매 못 살으사 울어 설워하더이다. 애달픔 나토시던 모습이 해 거듭하는 즈음에 가이더이다. 눈 돌이킬새 만나 뵙기 어찌 지으오리까. 낭이여, 그리는 마음에 가올 길 다봊 마을에 잘 밤 있사오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