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오랑 세오녀

연오랑 세오녀

분류 문학 > 문화 > 설화

기본정보

신라사람으로 바다에서 해조를 캐던 중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 왕과 왕비가 된 인물
생몰년: 미상

일반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연오랑 세오녀(延烏郞 細烏女)조에 따르면 연오랑은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4년(157) 바다에서 해조를 캐던 중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 왕이 된 인물이다. 연오랑의 부인인 세오녀는 남편을 기다리다 뒤따라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게 되어 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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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연오랑 세오녀(延烏郞 細烏女)조에 따르면 연오랑은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4년(157) 바다에서 해조를 캐던 중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 왕이 된 인물이다. 연오랑의 부인인 세오녀는 남편을 기다리다 뒤따라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게 된 인물로 일본의 왕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의 광채가 없어졌다. 이에 연오랑은 신라에서 온 사신에게 세오녀가 짠 비단을 주어 제사지내게 했는데, 그의 말대로 했더니 해와 달의 광채가 되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삼국유사』 이외에도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전한다. 또한 일본의 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고사기(古事記)』에도 연오랑·세오녀 설화와 유사한 내용의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 아메노히보코) 설화가 전해지고 있어 있다.

연오랑·세오녀 이름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 연오가 태양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하는데, “오(烏)”자가 포함된 “연오”라는 이름은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전설(暘烏傳說)의 변음으로 보는 것이다.(소재영, 1967) 이외에 연오의 “연(延)”은 “늘이다”라는 뜻에서 길다(長)의 의미를 가지고, 연오의 “오(烏)”는 신라인의 인칭어미로 보아, 연오란 이름은 연오랑이 키가 크고 몸이 마른데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양주동, 1965) 한편 세오녀의 세오 또한 태양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세오”의 이름에도 “오(烏)”자가 포함되므로 이 또한 양오전설(暘烏傳說)에서 해의 형상을 하는 금오가 쇠오로, 쇠오가 세오로 변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소재영, 1967)

한편 연오랑·세오녀 설화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첫째로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단순한 난파선 사건의 하나를 기록한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김창균, 1929)

둘째로 설화의 후반부에서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는 사실과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해와 달의 정기를 다시 회복하였다는 내용을 근거로 설화의 의미를 일식현상의 표현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삼국사기』권2 신라본기2 아달라왕 4년(157)조에는 일식에 관한 기록이 없지만, 『후한서(後漢書)』 환제본기(桓帝本紀)에 영수(永壽) 3년(157)에 일식현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유사』 연오랑·세오녀 설화에서 해와 달이 광채를 잃은 것은 일식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소재영, 1967)

셋째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 설화를 일본의 고대문헌에 나오는 천일창 설화와 연관시켜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세오녀 설화에서는 연오랑이 먼저 일본에 건너가 왕이 되고, 이후 세오녀가 바다를 건너갔다고 한다. 반면 『일본서기』의 신라왕자 천일창 설화에서는 아내가 먼저 일본으로 갔고, 이를 안 천일창이 아내를 뒤쫓아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각 설화는 이러한 차이점만 보일 뿐, 전체적인 내용은 매우 유사하다. 천일창이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하여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시기에 한반도의 세력이 일본 열도로 이동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후 천일창의 점령지는 확대되어 일본은 숭신(崇神, 스진)왕조가 약화되었고, 이는 기내지방(畿內地方)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높아지게 해 주었다고 보았다.(문정창, 1970) 다만 연오랑이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일연이 달아놓은 세주의 기록대로 변방 읍의 작은 왕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과, 일본 고대문헌에 보이는 천일창 설화의 주인공 천일창이 연오랑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세오녀에 대해서는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되었으며, 이 신공황후가 비미호(卑彌呼)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김성호, 1982)

넷째, 연오랑·세오녀 설화를 일월신화로 보는 견해이다. 『삼국유사』에서 연오랑은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지냄으로써 천재지이(天災地異) 현상을 해결했으므로 여기서 연오랑과 세오녀는 천재지이가 생겼을 때 제례를 주관하는 사제자(司祭者)적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본다. 또한 연오랑과 세오녀가 보낸 비단은 제사에 필수적인 용구이고, 영일현․도기야는 제천의식의 하나인 태양제가 행해진 장소라고 한다.(이연숙, 1986; 이명식, 1999)

다섯째, 세오녀가 짠 비단에 주목하여 우리나라의 양잠·견직물과 그 기술이 일본으로 전래되어 문화교섭이 이루어지는 것을 반영한 설화라고 보기도 한다.(이연숙, 1986)

이외에도 고대 이래 신라인이 일본에 이주한 일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떠남으로서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는데, 이는 제철기술자 집단이 일본으로 떠나 버린 탓에 불이 꺼진 것이라고 보았다. 이후 연오랑이 아달라왕의 사신에게 세오녀가 짠 비단을 줌으로써 신라는 광명을 다시 찾는다. 여기서 세오녀가 짠 비단인 세초(細梢)는 쇠 만들기를 뜻하는 “쇠지어”를 나타내는 이두로, 제철 만들기의 노하우를 상세히 적은 비단으로 보았다.(이영희, 1999)

참고문헌

김창균, 1929, 「延烏郞 細烏女 傳說의 由來」『新興』창간호.
양주동, 1965, 『古歌硏究』, 일조각.
소재영, 1967, 「延烏·細烏 說話攷」『國語國文學』 36.
문정창, 1970, 『日本上古史』, 명문당.
김성호, 1982, 『沸流百濟와 日本의 國家起源』, 지문사.
이연숙, 1986, 「延烏郞 細烏女說話에 대한 一考察」『국어국문학지』 23.
이명식, 1999, 「延烏郞 細烏女 說話와 日月祭」『文化史學』 11·12·13합.
이영희, 1999, 『노래하는 역사』, 조선일보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연오랑 세오녀)
延烏郞 細烏女
第八阿達羅王 卽位四年丁酉 東海濱 有延烏郞細烏女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 忽有一巖[一云一魚] 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按日本帝記 前後無新羅人爲王者 此乃邊邑小王 而非眞王也] 細烏怪夫不來歸尋之 見夫脫鞋 亦上其巖 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 奏獻於王 夫婦相會 立爲貴妃 是時 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 降在我國 今去日本 故致斯怪 王遣使<求>二人 延烏曰 我到此國 天使然也 今何歸乎 雖然 朕之妃有所織細綃 以此祭天可矣 仍賜其綃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 然後日月如舊 藏其綃於御庫爲國寶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又都祈野
연오랑과 세오녀
제8대 아달라(阿達羅)왕이 즉위한지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를 캐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혹은 물고기 한 마리]가 나타나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 하고, 이에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記)를 살펴보면, 그 앞이나 뒤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자가 없으니, 이것은 변두리 고을의 소왕(小王)으로 진짜 왕(眞王)은 아니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나가 그를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역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 이전처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랍고 의아하여 왕에게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세오를) 귀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게 되었는데, 일자(日者)가 왕에게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지금은 일본으로 가버렸으므로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라 하였다. 왕은 사자를 보내 두 사람을 찾았는데,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일이니, 지금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짐의 비가 짠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고 하고,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 아뢰어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이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어고(御庫)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는 귀비고(貴妃庫)라 하였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은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