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화

골화

분류 문학 > 지리 > 일반

기본정보

경북 영천시 임고면 일대의 신라시대 지명

일반정보

현재의 경북 영천시 임고면 일대의 신라 때 지명으로 본래 골화소국 혹은 골벌국이었다가 조분이사금 때 신라에 복속되어 현(군)이 되었다. 이곳에 있던 골화산은 신라 산천제사 중 대사(大祀)의 대상이었던 삼산(三山) 중 하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의 김유신조에 따르면 김유신이 국선(國仙)이었을 때, 나림(奈林), 혈례(穴禮), 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이 그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고 한다.

골화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조에는 “골화천(骨火川)”, “골화관(骨火舘)”, “골화(骨火)”의 호국신 등 골화와 관련된 여러 지명들이 나온다. 즉 김유신이 국선이었을 때 고구려의 첩자인 백석(白石)의 꾐에 넘어가 고구려의 정세를 염탐하려고 백석과 함께 고구려로 향했는데, 도중에 “골화천”에 이르러 유숙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나림(奈林)”, “혈례(穴禮)”, “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을 만나 백석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이윽고 “골화관”에서 머물게 되자 집에 두고 온 것이 있으니 가지러 가야겠다고 하면서 백석을 데리고 돌아온 후, 그를 붙잡아 그동안의 사정을 듣고 처형했다는 것이다.

골화는 본래 골화소국(骨火小國) 혹은 골벌국(骨伐國)이었던 곳을 신라가 흡수하여 현(군)을 두었던 곳으로, 산이름이었을 뿐 아니라 성과 현(군)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골화와 관련된 지명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우선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조분이사금 7년(236)조에는 봄 2월에 “골벌국왕(骨伐國王)” 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집과 토지를 주어 편히 살게 하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보인다. 즉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양주 임고군(臨皐郡)조에는 임고군이 본래 절야화군이었다는 내용과 함께 임고군의 영현으로 임천현(臨川縣)이 보이는데, 이에 따르면 조분왕 때에 “골화소국(骨火小國)”을 쳐서 얻어 현(縣)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는 영주(永州)에 합쳐져 속했다고 한다.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골벌국(骨伐國)은 곧 골화소국(骨火小國)과 같은 것이며 조분이사금 때에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전자의 기록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골벌국이 신라에 스스로 항복하였다고 했으나, 후자의 기록인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신라가 골벌국 즉 골화소국을 쳐서 복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이외에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5년(503)조에는 “골화성(骨火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는 “골화국(骨火國)”이라는 국명이 전하는데, 이 역시 골벌국․골화소국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영천군(永川郡) 고적조에는 “임천폐현[본래는 골화소국이다. 신라 조분왕 때 그곳을 공격해 취하여 현을 두었고 경덕왕이 임천이라고 고쳐 임고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도 이어서 속하게 했다. 군의 동남쪽 5리에 있다. 김유신이 고려를 칠 계획으로 골화관에 나와 잤는데 바로 이곳이다. 『삼국유사』에 보인다.](臨川廢縣[本骨火小國 新羅助賁王時 伐取之置縣 景德王改臨川 爲臨皐郡領縣 高麗初仍屬 在郡東南五里 金庾信謀伐高麗 出宿於骨火館 此其地 見三國遺事])”라고 하였다. 따라서 골화현(군)은 현재의 경북 영천시 임고면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골화천은 영천시 남쪽을 흐르는 남천(南川)에 비정할 수 있다.(三品彰英, 1975)

한편 『삼국유사』에서 나림(奈林), 혈례(穴禮), 골화(骨火) 등 호국신(護國神)이 있었다는 세 곳의 지명은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의 대사(大祀)조에도 보인다. 이에 따르면 대사에 속하는 삼산(三山)은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로, 첫째 나력은 습비부(習比部)에 있었고, 둘째 골화(骨火)는 절야화군(切也火郡)에 있었으며, 셋째 혈례(穴禮)는 대성군(大城郡)에 있었다고 한다.

골화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제사지에 절야화군(切也火郡)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영천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으나, 구체적인 산명을 찾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임고면에 있는 “금강산(金剛山)”이 곧 골화산(骨火山)이라고 추정한 견해가 있었다. 여기서는 금강산은 영천과 경주 사이에 있는 큰 산이라고 하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산천조에 “금강산[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에서 북악이라고 불렀다](金剛山[在府北七里 新羅號北嶽])”라고 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이병도, 1977) 다만 이 견해에서 언급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산천조의 금강산은 영천과 경주 사이에 있는 금강산과는 다른 것으로, 이는 경주의 금강산과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영천군 산천조의 “금강산성[군의 동쪽 8리에 있다](金剛山城[在郡東八里])”을 같은 것으로 인식한데서 온 오류라는 점이 이미 지적된 바 있다.(정구복 외, 1997)

어쨌든 일찍이 영천과 경주 사이에 있는 금강산이 골화산으로 비정된 이후 현장조사를 통해서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견해가 제출된 바 있다.(이재수, 1990) 또한 금강산의 금강산성 안에는 신당터로 추정되는 곳도 있으며, 금강산은 경주에서 영천으로 가는 옛 길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김유신 설화의 내용과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최광식, 1994) 따라서 골화산은 현재 경북 영천시에 있는 금강산성 일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한편 골화산이 원래 골화국인의 성산(聖山)으로 숭앙되다가, 골화가 신라 영토로 편입된 후 점차 신라인의 숭배 대상이 되었고, 삼산의 하나로 정립된 것이 아닐까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홍순창, 1983) 골화를 포함한 나력, 혈례의 삼산은 경주와 경주를 둘러싼 지역에 위치하여 경주를 방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최광식, 1994)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上, 塙書房.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홍순창, 1983, 「新羅 三山․五岳에 대하여」『新羅民俗의 新硏究』(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4).
이재수, 1990, 「골화성에 대하여-골화소국과 관련하여」『향토문화』5.
최광식, 1994, 『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정구복․노중국․신동하․김태식․권덕영, 1997, 『譯註 三國史記』 4-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
金庾信
<武>力伊干之子 舒玄角干金氏之長子曰庾信 弟曰欽純 姊妹曰寶姬 小名阿海 妹曰文姬 小名阿之 庾信公以眞平王十七年乙卯生 禀精七曜 故背有<七>星文 又多神異 年至十八壬申 修<劍>得術爲國仙 時有白石者 不知其所自來 屬於徒中有年 郞以伐麗<濟>之事 日夜深謀 白石知其謀 告於郞曰 僕請與公密先探於彼 然後圖之何如 郞喜 親率白石夜出行 方憩於峴上 有二女隨郞而行 至骨火川留宿 又有一女忽然而至 公與三娘子喜話之時 娘等以美菓餽之 郞受而啖之 心諾相許 乃說其情 娘等告云 公之所言已聞命矣 願公謝白石 而共入林中 更陳情實 乃與俱入 娘等便現神形曰 我等奈林穴禮骨火等三所護國之神 今敵國之人誘郞引之 郞不知而進途 我欲留郞而至此矣 言訖而隱 公聞之驚仆 再拜而出 宿於骨火舘 謂白石曰 今歸他國忘其要文 請與爾還家取來 遂與還至家 拷縛白石 而問其情 曰 我本高麗人[古本云百濟 誤矣 楸南乃高麗之士 又逆行陰陽亦是寶藏王事] 我國群臣曰 新羅庾信是我國卜筮之士楸南也[古本作春南 誤矣] 國界有逆流之水[或云雄雌 尤反覆之事] 使其卜之 奏曰 大王夫人逆行陰陽之道 其瑞如此 大王驚怪 而王妃大怒 謂是妖狐之語 告於王 更以他事驗問之 失言則加重刑 乃以一鼠藏於合中 問是何物 其人奏曰 是必鼠 其命有八 乃以謂失言 將加斬罪 其人誓曰 吾死之後 願爲大將 必滅高麗矣 卽斬之 剖鼠腹而視之 其命有七 於是知前言有中 其日夜大王夢 楸南入于新羅舒玄公夫人之懷 以告於群臣 皆曰 楸南誓心而死 是其果然 故遣我至此謀之爾 公乃刑白石 備百味祀三神 皆現身受奠 金氏宗財買夫人死 葬於靑淵上谷 因名財買谷 每年春月 一宗士女會宴於其谷之南澗 于時百卉敷榮 松花滿洞府林 谷口架築爲庵 因名松花房 傳爲願刹 至五十四景明王 追封公爲興<武>大王 陵在西山毛只寺之北東向走峰
김유신(金庾信)
무력(武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씨의 장자(長子)는 유신(庾信)이고, 그 동생은 흠순(欽純)이다. 누이동생은 보희(寶姬), 어릴 때 이름은 아해(阿海)이고 그 동생은 문희(文姬),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595) 을묘에 태어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났으므로,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었고 또 신이한 일이 많았다. 나이가 18세 되던 임신년(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 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낭도의 무리에 여러 해 동안 속해 있었다. 유신랑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일로 밤낮 깊이 모의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모의를 알고 낭에게 고해 이르기를, “제가 청컨대 공과 더불어 몰래 먼저 저쪽을 탐색하고, 그 이후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낭은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바야흐로 고개 위에서 쉬려고 할 때, 두 여자가 낭을 따라 갔다.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유숙하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이르렀다. 공이 세 낭자와 더불어 기쁘게 이야기 할 때 낭자들이 맛있는 과일을 드리니 낭이 받아먹었고, 마음으로 서로 허락하고 그 실정을 이야기하였다. 낭자들이 고하기를, “공이 말씀하는 바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원컨대 공이 백석을 물리고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실정을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함께 들어갔다. 낭자들이 곧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입니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낭을 꾀어 유인하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길을 나아가니, 내가 낭을 만류하려고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공이 듣고 놀라 쓰러지며 두 번 절하고 나왔다. 골화관(骨火舘)에 유숙할 때 백석에게 일러 말하길, “지금 타국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었으니, 청컨대 너와 함께 집에 돌아가서 가져와야하겠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함께 돌아와 집에 이르러서 백석을 결박하고 그 사정을 물었다. 이르기를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고본(古本)에는 백제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추남(楸南)은 고려의 선비이고 음양(陰陽)을 역행(逆行)한 것도 보장왕(寶藏王)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군신들이 이르길, ‘신라의 유신은 우리나라에서 점치던 선비 추남이다[고본에서는 춘남(春男)이라고 하였다]. 나라의 경계에 역류하는 물[혹은 웅자(雄雌)가 엎치락뒷치락 하는 일이라고 한다]이 있어서 그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아뢰기를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했으니, 그 단서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왕비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는 요망한 여우의 말이다’라고 하고는 왕에게 고하여 다시 다른 일로써 시험하여 물어보게 하고 잘못 말하면 중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넣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쥐입니다. 그 목숨은 여덟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잘못 말하였다고 하고는 장차 참죄(斬罪)를 가하려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맹세하여 말하길, ‘내가 죽은 후에 원컨대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려를 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베어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그 목숨이 일곱이었다. 이때 앞서 한 말이 맞은 것을 알았다. 그날 밤에 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를 군신에게 말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추남이 마음으로 맹세하고 죽었으니 이것이 과연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까닭에 나를 보내어 이러한 모의를 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백석을 처형하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니, 모두 현신하여 제사를 받았다. 김씨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 상곡(上谷)에 장사지내고 인하여 재매곡이라 이름하였다. 매년 봄에 온 집안의 사녀(士女)가 그 계곡의 남쪽 시내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온갖 꽃이 피고 송화(松花)가 마을 숲에 가득하였다. 계곡 입구에 암자를 짓고 인하여 송화방(松花房)이라 이름하였으며, 전하여 원찰로 삼았다. 제54대 경명왕대에 이르러 공을 추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 하였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의 북쪽 동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