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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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학 > 지리 >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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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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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연못으로 부여의 궁남지, 익산의 마룡지 등으로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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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무왕(武王)조에는 무왕의 출생지와 관련하여 “무왕의 어머니가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과부로 살다가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3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산천조(山川條)에는 “마룡지(馬龍池). 오금사(五金寺) 남쪽 백여 보(步)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다.’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 부여 남쪽 동남리에 위치한 궁남지(宮南池, 사적 제135호)를 무왕의 출생설화와 관련된 곳으로 보기도 한다.(부여군지편찬위원회, 1987) 이곳은 동남리 “마래방죽”으로 명명되던 지역으로 상습 침수지역인 자연적인 저습지대였으나, 『삼국사기』 등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연못으로 추정되어 1965년경 실시된 부분적인 복원공사에 의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현재 사적지정범위 내에는 연꽃이 심어져 있고 백마강에 이르기까지 넓은 저지대는 과수원과 농토로 이용되고 있다.

궁남지는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5 무왕 35년(634)조에 따르면,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라고 하여 백제 무왕 때 궁의 남쪽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권27 백제본기5 무왕 39년(638)조에도“왕과 빈이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王與嬪御泛舟大池)”라는 기사가 보인다. 첫 번째 기사는 궁남지를 처음 만들었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는 왕과 빈이 큰 연못에 가서 배를 띄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사는 연못지를 만들어 유휴지(遊休池)로서의 성격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이는 곧 대지(大池)를 만들어 궁실에서 수시로 사용하였다는 단서이다. 현재 부여읍 시가지 남측에 자리잡고 있는 궁남지는 사비시대의 궁이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여서 전해져오는 위치 비정을 그대로 따를 수만은 없으나 부소산성(扶蘇山城)을 도성(都城)으로 보고 왕궁이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전(傳) 궁남지의 위치는 부소산성 남쪽 어느 부분에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은 높은 것이다.

현존한 궁남지의 형태는 1965-1967년도에 임의로 축소조성된 것이라 원래 모습은 아니다. 이에 국립부여박물관에서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1995년부터 2006년까지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하였다. 10년간 8차에 걸쳐 조사를 추진한 결과 청동기-삼국시대 초기에 이르는 선행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고, 백제 사비기의 도로, 수로, 땅을 파서 세운 기둥 굴립주(掘立柱) 건물지, 우물지, 도랑유구 등과 백제시대의 행정구역명을 알 수 있는 서부후항(西部後巷)명 목간, 짚신, 개원통보(開元通寶), 다량의 목제품 등을 수습하는 성과가 있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7)

한편, 무왕의 출생지에 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익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 익산시에 무왕의 탄생지라 전해지는 곳이 있는 점, 『삼국유사』의 “서울의 남쪽 연못가”를 궁남지(宮南池)로 볼 수도 있으나 궁남지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왕 35년(634)에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 있어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 점 등을 근거로 한다.(김주성, 2001) 그러나 마룡지(馬龍池) 전설 자체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무왕의 출생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되지 않으며, 익산의 마룡지는 부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마룡지 전설은 무왕의 성장지였거나 미륵사 창건 및 천도와 결부되어 나온 설화일 뿐 출생지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무왕의 출생지를 사비성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덧붙여 “서울의 남쪽 연못가”가 반드시 무왕 35년에 축조한 궁남지를 가리킨다고는 볼 수 없으며, 사비도성에는 많은 못들이 후대까지 남아 있었고, 궁남지가 그러한 기존의 못 가운데 하나를 이용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본다면 궁남지의 축조 시기와 무왕 출생 시기의 선후 관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도 하였다.(이도학, 2005)

참고문헌

부여군지편찬위원회, 1987, 『扶餘郡誌』.
김주성, 2001, 「백제 사비시대의 익산」『韓國古代史硏究』21.
이도학, 2005, 「百濟 武王의 系譜와 執權 基盤」『百濟文化』34.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7, 『宮南池 發掘調査報告書 Ⅲ -남편 일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무왕)
武王[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名璋 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 小名薯童 器量難測 常掘薯蕷 賣爲活業 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美艶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群童 群童親附之 乃作謠 誘群童而唱之云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卯乙抱遣去如 童謠滿京 達於宮禁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 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 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謠之驗 同至百濟 出母后所贈金 將謀計活 薯童大笑曰 此何物也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薯童曰 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 主聞大驚曰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 何如 薯童曰 可 於是聚金 積如丘陵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 問輸金之計 師曰 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主作書 幷金置於師子前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眞平王異其神變 尊敬尤甚 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心 卽王位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會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國史云 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무왕[고본은 무강이라고 썼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가 서울 남쪽 연못가(남지)에 집을 짓고 과부로 살다가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 어렸을 때 이름을 서동이라고 하였고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다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이 그로 인해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혹은 선화(善化)]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마로써 마을의 뭇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그를 가까이 따랐다. 이에 노래를 지어 뭇아이들을 꼬여 부르게 하니,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두루 퍼져 대궐에까지 달하니 백관이 임금께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되었다. 떠나려고 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고 가게 하였다. 공주가 귀양살 곳으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하고 장차 시위하여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였고 이로 인해 따라가다가 몰래 정을 통하였다. 그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영험함을 믿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모후가 준 금을 내어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게 도대체 무엇이오”라고 하였다. 공주가 말하기를 “이것은 황금이니 백년의 부를 이룰 것입니다"고 하였다. 서동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게 진흙처럼 마구 쌓여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주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는 천하의 진귀한 보물입니다. 그대가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이 보물을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서동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금을 모아 언덕과 같이 쌓아두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있는 곳에 가서 금을 수송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라고 하였다. 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두었다.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날라다 두었다. 진평왕은 그 신통한 조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여 늘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부인이 왕께 이르기를, “이 곳에 큰 가람을 세우는 것이 진실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지명법사가 있는 곳에 가서 못을 메울 일을 의논하니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 삼회를 법상으로 삼아 전․탑․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여러 장인을 보내 이를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남아있다.[『삼국사』에는 이를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홀어미의 아들이라고 전하니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