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릉도

우릉도

분류 문학 > 지리 > 섬

기본정보

지금의 울릉도를 지칭하는 삼국시대의 지명

일반정보

우릉도는 신라 지증왕 16(505)년 박이종이 정벌한 섬으로 현재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도에 해당한다

우릉도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우릉도(于陵島)는 지금의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도의 옛 지명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1 지철로왕(智哲老王)조에 따르면,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洲)]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지금은 우릉(羽陵)으로 쓴다]가 있다. 둘레가 2만 6천 7백 30보이다. 이 섬의 오랑캐들은 그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이 이찬(伊湌) 박이종(朴伊宗)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겠다.”라고 하였다. 섬의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여, 이에 이종을 포상하여 그 주백(州伯)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4 지증왕(智證王) 13년(512) 6월조에 앞의 우릉도, 우릉의 명칭만 우산국(于山國)으로 바뀌고, 박이종을 이사부(異斯夫)로 기록하는 차이가 보일 뿐 우릉도 정벌에 관해서는 같은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지증왕 13년(512) 박이종이 우릉도 정복에 관한 기록 이후, 우릉도가 사서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400년 지난 시대인 930년에 고려에 토산물을 바쳤다는 내용이다. 『고려사』 권1 세가 태조13년(930) 8월 병오에 “우릉도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방물을 바쳤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 권58 지12 지리3 동계 울진현에 “울진현(蔚珍縣)은 원래 고구려 우진야현(于珍也縣)이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군을 만들었다. 고려에 와서 현으로 낮추고 현령을 두었다. 여기에 울릉도(鬱陵島)가 있다.[현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신라때에는 우산국(于山國), 무릉(武陵) 또는 우릉(羽陵)이라고 불렀다.… 의종 11년에 왕이 울릉도는 면적이 넓고 땅이 비옥하며, 옛날에는 주현을 설치한 일도 있으므로 능히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인 김유립(金柔立)을 파견하여 시찰하게 하였는데, 바위와 돌들이 많아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섬을 개척하여 백성을 이주시키자는 여론이 중지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려시기의 일본 측 자료를 통해서도 우릉도의 기록을 확인 할 수 있는데, 『대일본사』 권234 열전 5의 고려 관홍 원년조에 “고려의 번도인 우릉도인이 표류하여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대일본사료』 제2편 5 관홍 원년 3월 7일 조에 “고려번도 가운데에 신라국 우릉도인이 있다.”는 기록을 보아, 우산국이 고려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김호동, 2007)

조선시기의 문헌상에 등장하는 최초의 울릉도 관계 기록은 『태종실록』이다. 『태종실록』 태종 3년 8월 병진에 “강원도 무릉도 거주민들에게 육지에 나오도록 명령하였는데 이것은 감사의 품계에 따른 것이다” 하여 조선조에 있어서 무릉도 즉 울릉도는 군현체계상 강원도에 속해 있었고, 거주민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울진현 산천조를 통해서 울릉도가 울진현에 소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김호동, 2007, 『독도·울릉도의 역사』,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지철로왕)
智哲老王
第二十二智哲老王 姓金氏 名智大路 又智度路 諡曰智證 諡號始于此 又鄕稱王爲麻立干者 自此王始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或云 辛巳則三年也]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耦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冬老樹下 見二狗嚙一屎塊如鼓大 爭嚙其兩端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此部相公之女子 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尋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封爲皇后 群臣皆賀 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 便風二日程 有于陵島[今作羽陵]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憍慠不臣 王命伊<飡>朴伊宗將兵討之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而降 賞伊宗爲州伯
지철로왕(智哲老王)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이며, 시호는 지증(智證)이다. 시호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또 향칭(鄕稱)에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도 이 왕때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영원(永元) 2년 경진(庚辰)(500)에 즉위하였다.[혹은 신사(辛巳)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영원) 3년이다.] 왕은 음경의 길이가 1자 5치나 됨에 배필을 얻기 어려워 사자를 3도에 보내 구하도록 하였다. 사자가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러,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를 양쪽 끝을 물면서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였더니, 한 소녀가 고하기를, “이것은 부(部)의 상공(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 속에 들어가 숨어서 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여자의 키가 7자 5치나 되었다. 이 사실을 자세히 왕께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황후(皇后)로 봉하니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우릉(羽陵)으로 쓴다]가 있다. 둘레가 2만 6천 7백 30보이다. 이 섬의 오랑캐들은 그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이 이찬(伊湌) 박이종(朴伊宗)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겠다.”라고 하였다. 섬의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이에 이종을 포상하여 그 주백(州伯)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