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제

구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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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경주에 있던 못

일반정보

신라시대 경주에 있던 못으로『삼국유사』왕력에서는 효공왕의 유골을 구지제 동쪽에 있는 산의 기슭에 매장했다고 하였다.

구지제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구지제는 신라 경주에 있던 못으로, 효공왕릉과 관계가 있는 곳이다. 신라 제52대 효공왕의 능으로 전해오는 왕릉은 왕경의 동쪽인 경주시 배반동 산 14번지에 있으며 전 신문왕릉의 동북쪽이자 낭산 동쪽에 있는 낮은 구릉의 야산 남쪽에 해당된다. 왕릉은 구릉을 삭평한 뒤 조영하였으며, 외형은 원형봉토분이고 봉분의 직경은 21.2m, 높이는 5m이다. 묘제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된다. 무덤 밑부분에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던 돌이 몇 개 남아 있으며, 아무런 장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호석은 괴석을 이용하여 사선으로 축조하였으며, 현재 봉분자락 남쪽과 서쪽 일부분에서 확인된다. 이에 기댄 받침석 역시 50cm 내외 규모의 괴석이며, 남서쪽에서 6개, 동북쪽에서 3개가 확인된다. 받침석간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으나 170~210cm 내외이다.

전 효공왕릉은 효공왕이 죽은 뒤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葬于師子寺北)”는『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16년조의 기록과 그 남쪽 약 900m 지점에 있는 배반동 장골(長谷)의 삼층석탑을 근거로 조선 영조 6년(1730)에 이르러 김씨 일족에 의해 현재의 왕릉으로 비정되었다.

하지만 『삼국유사』왕력에 의하면 왕릉 비정의 근거가 된 사자사는 왕릉이 조영된 곳이 아니라 화장한 곳이며, 화장 후 유해는 구지제 동쪽 산허리에 매장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효공왕릉은 사자사 북쪽이 아니라 구지제(仇知堤)라는 못 동쪽의 산기슭에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왕릉에 국한된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에 맞추어서 경주시 탑동 산 23번지에 있는 전 일성왕릉(傳 逸聖王陵)을 효공왕릉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 현재 경주에서 남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왕릉으로는 전 지마왕릉․전 일성왕릉․전 아달라왕릉․전 신덕왕릉․전 경명왕릉․전 경애왕릉이 있는데, 그 중에서 단독릉이면서 서편에 못이 있는 경우는 전 일성왕릉뿐이다. 전 일성왕릉 서편 바로 아래에는 강당못이 있어 이 곳이 신라시대의 구지제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효공왕릉은 전일성왕릉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이근직, 2006)

현재 이 강당못은 주변에서 초석과 와편이 출토된 까닭에 장창곡(長倉谷) 제5사지로 명명되어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4)

참고문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4,『慶州南山精密學術調査報告書』
이근직, 2006,『新羅 王陵의 起源과 變遷』,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五十二 孝恭王 [金氏 名嶢 父憲康王 母<文>資王后 丁巳立 理十五年 火葬師子寺北 骨藏于仇知堤東山脇]
제52효공왕 [김씨이며, 이름은 요이다. 아버지는 헌강왕이고, 어머니는 문자왕후이다. 정사(897)에 즉위하여 15년간 다스렸다. 사자사 북쪽에 화장하고 뼈는 구지제 동쪽 산허리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