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라주

아슬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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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 지역의 옛 지명

일반정보

아슬라주(阿瑟羅州)는 신라 명주(溟州)의 신라시대 명칭으로 현재 강원도 강릉일대에 해당한다

아슬라주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아슬라주(阿瑟羅州)는 신라 명주(溟州) 지역의 옛 이름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지철로왕(智哲老王)조에 따르면 우릉도(于陵島)의 위치를 언급하면서 아슬라주에 대하여, “또 [지금의 명주(溟洲)]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우릉(羽陵)으로 쓴다]가 있다.(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便風二日程,有于陵島[今作羽陵],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라고 기록하고 있다. 명주 지역의 옛 이름인 아슬라 외에도 또 다른 명칭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의 하서아군사대등(河西阿郡使大等)이라는 관직명을 통해 아슬라주를 하서아로 불렀던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 잡지4 지리2 신라 삭주 명주조를 통해서 “명주(溟州)는 본래 고구려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라고도 썼다.(溟州 本高句麗河西良一作何瑟羅)”는 기록을 통해서 하서량, 하슬라로도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기원후 1-3세기 무렵의 “예(濊)의 고지(故地)”로 추측하고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 권35 잡지4 지리2 신라 명주조가 인용하고 있는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서 비롯된 인식이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서 이르면 지금 신라의 북쪽 경계인 명주(溟州)는 대개 예(濊)의 옛 나라였다.(賈耽古今郡國志云 今新羅北界溟州 蓋濊之古國)”고 하였는데, 『삼국사기』 이래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고려사(高麗史)』,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택리지(擇里志)』 등 조선시대 사서 대부분이 사서들이 이 지역을 “예(濊)의 고지(故地)”로 인식하고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新羅本紀)5 선덕왕(善德王) 8년(639) 봄 2월에 “하슬라주(何瑟羅州)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 진주(眞珠)에게 명하여 이곳을 지키도록 하였다.(八年 春二月 以何瑟羅州爲北小京 命沙湌眞珠鎭之)”는 사료를 통해서, 이 지역에 소경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무열왕 5년(658) 3월에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과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 경(京)을 폐지하여 주(州)로 삼고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何瑟羅地連靺鞨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는 기사를 통해서 선덕왕 8년(639) 설치 되었던 북소경을 폐지하고, 다시 하슬라주를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이 명주로 불리게 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新羅本紀) 9 경덕왕(景德王) 16년(757)조에 따르면,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로 고치고 1주·9군·25현을 거느리게 하였다.(河西州爲溟州 領州一 郡九 縣二十五)”고 하여 경덕왕 16년(757)에 명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덕왕 18년(759)에 관직과 관부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쳤던 것을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원래의 명칭으로 환원시키면서 명주의 명칭도 다시 하슬라주로 바뀌었다.

이후 고려시기에는 태조(太祖)가 동원경(東原京)으로 고쳤다가 동왕 23년(940)에 다시 명주(溟州)로 고쳤으며, 원종(元宗)이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하였고, 충렬왕(忠烈王)이 강릉부(江陵府)로 고쳤다. 고종이 관찰부(觀察府)로 높였다가 뒤에 혁파하고 군(郡)으로 고쳤다.(김호동, 2007)

참고문헌

김호동, 2007, 『독도·울릉도의 역사』,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지철로왕)
智哲老王
第二十二智哲老王 姓金氏 名智大路 又智度路 諡曰智證 諡號始于此 又鄕稱王爲麻立干者 自此王始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或云 辛巳則三年也]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耦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冬老樹下 見二狗嚙一屎塊如鼓大 爭嚙其兩端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此部相公之女子 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尋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封爲皇后 群臣皆賀 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 便風二日程 有于陵島[今作羽陵]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憍慠不臣 王命伊<飡>朴伊宗將兵討之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而降 賞伊宗爲州伯
지철로왕(智哲老王)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이며, 시호는 지증(智證)이다. 시호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또 향칭(鄕稱)에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도 이 왕때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영원(永元) 2년 경진(庚辰)(500)에 즉위하였다.[혹은 신사(辛巳)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영원) 3년이다.] 왕은 음경의 길이가 1자 5치나 됨에 배필을 얻기 어려워 사자를 3도에 보내 구하도록 하였다. 사자가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러,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를 양쪽 끝을 물면서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였더니, 한 소녀가 고하기를, “이것은 부(部)의 상공(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 속에 들어가 숨어서 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여자의 키가 7자 5치나 되었다. 이 사실을 자세히 왕께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황후(皇后)로 봉하니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우릉(羽陵)으로 쓴다]가 있다. 둘레가 2만 6천 7백 30보이다. 이 섬의 오랑캐들은 그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이 이찬(伊湌) 박이종(朴伊宗)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겠다.”라고 하였다. 섬의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이에 이종을 포상하여 그 주백(州伯)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