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주

등주

분류 문학 > 지리 > 일반

기본정보

지금의 중국 산동성 봉래시

일반정보

등주는 한(漢)이 고조선을, 수(隋)․당(唐)이 고구려를 해상으로 공격할 때 전진기지였던 곳이다. 발해의 무왕은 732년 대내외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장문휴를 보내어 당의 등주를 습격하였다.

전문정보

등주는 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 봉래시(蓬萊市)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조 세주에는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고 하였다. 그런데 성덕왕 32년은 733년으로 간지로는 계유(癸酉)에 해당되며, 당 현종 갑술년은 734년이므로 1년의 차이가 있다. 또한 『구당서』 권199 열전149 북적 발해말갈조에는 당(唐) 현종 개원(開元) 20년(732)이라고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발해의 등주공격 시기는 『구당서』를 따라 732년으로 보고 있다.

발해의 등주공격은 726년 당이 발해의 배후에 위치한 흑수말갈에 당의 관리를 파견하여 관장하는 조치를 취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당과 흑수말갈의 결탁으로 발해는 대외적 위기에 처했고, 무왕(武王)과 동생 대문예(大門藝) 사이에 흑수말갈 토벌을 둘러싸고 일어난 의견 충돌로 인해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하였다. 무왕은 당에 대문예의 송환을 요청했으나 당이 거부하였고, 728년에는 이미 토벌한 흑수말갈이 다시 당과 결탁하였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발해의 왕위계승자였던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망하여 왕위계승에 분란의 소지를 갖고 있었다. 무왕은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를 무왕 14년(732) 등주를 공격함으로써 타개하고자 한 것이다.(송기호, 1995)

발해가 굳이 바다 건너 등주를 공격한 까닭은 등주의 입지적 위치, 곧 당시 동아시아 해로의 물류 요충지였던 등주를 확보 하는 것이 발해로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등주는 신라와 발해의 사신이 머물던 곳으로 신라관(新羅館)과 발해관(渤海館)이 각각 설치되었던 곳이다. 특히 신라인은 신라관을 중심으로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집단 거류지를 형성하였으며, 발해 역시 이곳에 교역 이상의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발해의 등주 공격의 의미는 발해가 등주라는 동아시아 교역 중심지의 중요성을 간파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김은국, 2005)

발해의 장문휴(張文休)가 이끄는 수군은 732년 9월 바다 건너 등주를 습격하여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살해하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군대를 격파한 후 곧바로 퇴각하였다. 당은 이듬해 본격적으로 토벌군을 파견하였는데,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의 병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고,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겨울에 출병하여 추운 날씨와 험한 도로사정으로 군사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여 실패하였고, 대문예의 공격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발해와 당의 적대적인 관계는 발해를 둘러싼 거란과 돌궐 등의 국제 정세가 발해에 불리하게 되자 발해도 대당 강경책을 지속할 수 없었다. 따라서 무왕의 아들 문왕대에는 당과 화평을 적극적으로 도모하게 되면서 대당관계를 개선하게 된다.

참고문헌

송기호, 1995, 『발해정치사연구』, 일조각.
김은국, 2005, 「영원한 남북 교섭의 창 -발해와 신라」『새롭게 본 발해사』, 동북아역사재단.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