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주

평양주

분류 문학 > 지리 > 일반

기본정보

현재 양주의 신라시대 지명

일반정보

평양주는 고구려의 평양과 구별되는 곳으로 『삼국유사』의 분주에서 언급하고 있는 남평양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양주에 해당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1 실성왕(實聖王)조에 따르면 “의희(義熙) 9년(413) 계축(癸丑)에 큰 다리를 평양주에 큰 다리가 이루어졌다.(義熙九年癸丑,平壤州大橋成)”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의 분주(分註)에 “남평양(南平壤)인 듯 하니, 지금의 양주(楊州)이다.(恐南平壤也,今楊州)”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12년(413)조에 “평양주(平壤州)에 큰 다리를 새로 만들었다.(新成平壤州大橋)”하여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평양주에 새 다리를 지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평양주에 관한 또 다른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聖德王) 35년(736) “이찬 윤충·사인·영술을 보내 평양주와 우두주 두 주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遣伊湌允忠思仁英述檢察平壤牛頭二州地勢)는 기록이 있다.

앞의 기록을 종합하여 살펴 볼 때, 신라에 평양주가 존재한 것은 분명하지만, 신라 실성이사금 12년(413) 기록에 나타나는 평양주와 성덕왕 35년(736)에 나타나는 평양주는 서로 다른 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실성왕 12년(413) 이때에 평양 지역은 신라의 영토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양에 대한 다른 기사를 참고하여 보면, 『삼국사기』권35 지리지2 한산군(漢山郡)조에 “고구려 북한산군 [혹은 평양]은 진흥왕이 주로 삼고 군주를 두었으며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양주 옛 땅이다.(本高句麗北漢山郡[一云平壤] 眞興王爲州 置軍主 景德王改名 今楊州舊墟)”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북한산주는 다른 이름으로 평양으로 불리었으며, 고려시대의 양주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신라 실성이사금12년(413)에 나타나는 평양주는, 『삼국유사』의 분주에서 언급하고 있는 남평양 즉 양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18실성왕)
第十八實聖王
義熙九年癸丑 平壤州大橋成[恐南平壤也 今楊州] 王忌憚前王太子訥祗有德望 將害之 請高麗兵 而詐迎訥祗 高麗人見訥祗有賢行 乃倒戈而殺王 乃立訥祗爲王而去
제18대 실성왕
의희(義熙) 9년 계축(413)년에 평양주(平壤州)에 큰 다리가 이루어졌다.[남평양(南平壤)인 듯하니 지금의 양주(楊州)이다.] 왕은 전왕의 태자 눌지(訥祗)가 덕망이 있음을 꺼려 장차 그를 죽이고자 고구려의 군사를 청해서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가 어진 행실이 있음을 보고, 이에 창을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