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악

서악

분류 문학 > 지리 > 산

기본정보

신라 오악(五岳) 중의 하나

일반정보

서악은 신라 오악 중의 하나로, 선도산(仙桃山)으로 비정된다

서악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1 경주부(慶州府) 산천조(山川條)에는 경주부 서쪽 7리에 선도산(仙桃山)이 있는데, 이것이 신라시대의 서악이라고 하였다. 또 여기서 선도산은 서술(西述)〮〮〮〮〮〮·서형(西兄) 등 별칭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오래 전부터 신라인에 의하여 서악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혁거세(赫居世)와 결부된 성모사(聖母祠)가 선도산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선도산이 일찍부터 서악으로 숭앙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홍순창, 1991)

신라에는 통일전쟁 전에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오악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동쪽의 토함산(吐含山), 서쪽의 선도산, 남쪽의 남산(南山), 북쪽의 북악(北岳), 중앙의 부악(釜岳)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영토가 확대되고 통일전쟁을 치른 뒤에는 오악도 국토의 사지(四至)에 있는 산들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때의 오악은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鷄龍山), 남쪽의 지리산(地理山), 북쪽의 태백산(太白山), 중앙의 부악이다. 이는 각 방위에 따라 국토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그 지역의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제압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지녔다고 한다.(이기백, 1974)

한편 신라는 통일전쟁 후에 오악을 중사(中祀)에 편제하였다. 이 시대의 오악은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어 국토방위의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중사에 설정된 오악에는 산성이나 토성이 설치되어 군사적인 기능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최광식, 1994)

참고문헌

이기백, 1974,『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홍순창, 1991,「新羅 三山․五岳에 대하여」『新羅文化際學術發表會論文集』2, 서경문화사.
최광식, 1994,『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五十一 眞聖女王 [金氏 名曼憲 卽定康王之同母妹也 王之匹(魏弘)大角干 追封惠成大王 丁未立 理十年 丁巳遜位于小子孝恭王 十二月崩 火葬散骨于<牟>梁西<岳> 一作未黃山]
제51 진성여왕 [김씨이며, 이름은 만헌으로서 곧 정강왕의 누이동생이다. 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이고 혜성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정미년에 즉위하여 10년간 다스렸다. 정사년에 소자(小子) 효공왕에게 양위하였다. 12월에 돌아가니 화장하여 뼈를 모량 서악에 뿌렸다. 또는 미황산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