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향산

묘향산

분류 문학 > 지리 > 산

기본정보

평안북도 향산군과 구장군, 평안남도 영원군, 자강도 희천시 등에 걸쳐 있는 산

일반정보

고려시대 이후에는 태백산이라고도 하였다. 구향산과 신향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흔히 묘향산이라 하면 신향산 일대를 가리킨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에서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내려온 태백산을 곧 묘향산이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4 평안도 영변대도호부 산천조에서는 묘향산을 부(府)의 동쪽 130리에 있으며, 태백산(太伯山)이라고도 하고 360개의 암자가 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서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비정한 것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에 백두산 일대의 땅이 한반도에서 이탈하여 여진인의 거주지가 됨에 따라 한민족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고, 그 대신 백두산 신앙의 모든 요소가 묘향산으로 이동한 결과로 보았다. 그리하여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지점도 묘향산이 되었는데, 『삼국유사』의 서술은 고려시대의 이러한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고대문화는 불함산(不咸山)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한족(韓族)을 근간으로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조선이 불함문화권의 중심임을 논증하기 위해 한국 도처에 분포되어 있는 태백산 등 “백(白)”계열의 지명에 주목하였다. 즉 동이족(東夷族)의 거주지에 다수 분포되어 있는 “백산(白山)”은 태양신께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으며, 여러 지역에 있는 이 소신산(小神山) 중 태백산이 가장 중심적인 곳임을 논하였다.(최남선, 1927)

묘향산(높이 1909m)은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내는 산이라는 뜻에서 11세기 초부터 묘향산이라 불렀다. 고려 중엽 이후에는 묘향산의 바위들이 희고 정갈하다는 뜻에서 태백산(太白山)이라고도 하였다. 비로봉 북쪽인 희천시 부흥리․유중리 지역에 속하는 일대를 구향산이라 하며 보현사가 있는 묘향천 골짜기 일대를 신향산이라고 한다. 지역적 개념에서는 신향산을 내향산으로, 구장군과 영원군 일대를 외향산이라 부른다. 묘향산이라 하면 흔히 풍치가 가장 뛰어난 신향산 일대를 말한다.

참고문헌

최남선, 1927, 「不咸文化論」『朝鮮及朝鮮民族』, 조선사상통신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조선[왕검조선]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경에는 무엽산이라고 했고 또 백악이라고도 한다.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 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곰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여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당나라 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방이라고도 한다]홀산 또는 금미달 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라고 하였다. 당의 배구전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 하였으며, 통전에도 이 설과 같다.[한서에서는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으로 되어 있고 지금은 3군이라 하고 이름도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