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

낭산

분류 문학 > 지리 > 산

기본정보

신라 왕경(王京)의 중앙에 위치한 산

일반정보

신라 왕경(王京)인 경주(慶州)를 사면(四面)에서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동), 선도산(서), 남산(남), 금강산(북)의 중앙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으로, 경주의 진산(鎭山)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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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1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조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삼국통일 후 낭산에 사천왕사가 창건될 것을 예언하면서 도리천인 낭산에 자신의 능 자리를 지정하고 있다. 이는 낭산의 선덕왕릉 지역이 도리천으로 여겨졌으며, 그 아래에 사천왕천을 설정함으로써 낭산을 불교의 성지인 수미산으로 관념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신종원, 2004)

낭산(狼山)은 신라 왕경(王京)인 경주(慶州)를 사면(四面)에서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동), 선도산(서), 남산(남), 금강산(북)의 중앙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이다.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祭祀)조에 나오는 대사(大祀)의 삼산(三山)은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인데, 그 중 나력을 낭산(狼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비교적 평지에 위치한 국도(國都) 서라벌의 지형으로 볼 때, 궁성(宮城)으로서의 월성(月城)을 제외한다면, 이와 이웃한 낭산이 지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산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낭산의 서남쪽에는 남산이 조망되고, 동쪽으로는 보문들, 서쪽으로는 도성(都城)이 자리잡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慶州府) 산천(山川)조에는 “낭산은 부의 동쪽 9리에 있는 진산이다.(狼山在府東九里鎭山)”라고 하여, 낭산을 경주를 지켜주는 진산(鎭山)으로 여겨왔다. 낭산은 해발 115m에 불과하지만, 평지에 위치한 도성에서 본다면 진산(鎭山)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낭산은 경주시의 동쪽에 위치하여 남북으로 길고 낮은 3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작은 구릉을 이룬 형태이다. 즉, 남쪽의 선덕여왕릉이 있는 해발 100m의 고지(高地), 그와 이웃한 북쪽 102m의 다른 고지, 그리고 그 북쪽의 가장 높은 115m의 고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상당수에 달하는 유적지가 자리 잡고 있다. 산의 위치는 경주시 보문동과 구황동, 배반동의 3개 동을 포함한다. 유적지 내의 작은 도로는 100고지와 102고지 사이의 능선에서 동서로 연결하여 강선(降仙) 마을과 서쪽의 배반 마을을 연결하며, 115고지 북쪽 낮은 구릉을 가로질러 황룡사지 쪽에서 황복사지 뒤쪽의 구황리 마을을 이어주는 옛길이 있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12년(413) 가을 8월조에는 “구름이 낭산(狼山)에서 일어났는데, 바라보니 누각과 같았고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것이니, 응당 이곳은 복받은 땅이라고 하였다. 이후부터 사람들이 나무베는 일을 금하였다.(雲起狼山 望之如樓閣 香氣郁然 久而不歇 王謂 是必仙靈降遊 應是福地 從此後 禁人斬伐樹木)”는 기사가 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법민조에 등장하는 사천왕사와 망덕사 관련 기록들은 낭산이 가진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예가 된다. 곧,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 있는데, 그 땅에 사천왕사를 세웠다.(狼山之南有神遊林 創四天王寺於其地)”는 기록을 통해, 사천왕사가 위치한 곳이 바로 신유림(神遊林)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유림을 비롯한 신라의 숲에 대해서는 대체로 소도(蘇塗)와 같이 수목을 중심으로 하는 토착신앙의 성지로 인식되고 있다.(이기백, 1986)

『삼국유사』 권5 감통7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조에서는, “월명이 사천왕사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밝은 밤에 피리를 불며 문앞 큰길을 지나니 달이 가기를 멈추었다. 이로 인하여 그 길을 월명리라 하였다.(明常居四天王寺 善吹笛 嘗月夜吹過門前大路 月馭爲之停輪 因名其路曰月明里)”고 하였으니, 사천왕사의 앞은 월명사(月明師)의 피리와 연관된 월명리(月明里)로 불려졌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48 열전8 백결선생(百結先生)조에는 백결선생이 낭산(狼山) 밑에 살았다는 기사가 있다.

한편, 낭산에 위치하는 모든 불교유적들은 통일기에 들어와서 형성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것은 7세기 중엽 이후에 낭산이 신라사회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았다는 뜻이다. 특히 호국사찰인 사천왕사가 이 산에 등장하는 시기(679년)를 기점으로 하여 낭산의 불교유적은 점차 전체 산을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낭산에서 가장 주목되는 유적으로는 사천왕사지를 비롯하여 망덕사지, 현재의 중생사 주변, 그리고 황복사지 일대이다. 또한, 문무왕의 화장지(火葬址)로 추정되기도 하는 능지탑(陵只塔)이 자리잡고 있다.(장충식, 1996)

참고문헌

이병도, 1977, 『譯註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기백, 1986, 『新羅思想史硏究』, 일조각.
장충식, 1996, 「新羅 狼山遺蹟의 諸問題(1)-四天王寺址를 中心으로-」『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7.
신종원, 2004, 『삼국유사 새로 읽기(1) -기이편(紀異篇)-』, 일지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선덕왕지기삼사)
善德王知幾三事
第二十七德曼[一作萬] 諡善德女大王 姓金氏 父眞平王 以貞觀六年壬辰卽位 御國十六年 凡知幾有三事 初唐太宗送畵牧丹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 王見畵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待其開落 果如其言 二於靈廟寺玉門池 冬月衆蛙集鳴三四日 國人怪之問於王 王急命角干閼川弼呑等 鍊精兵二千人 速去西郊 問女根谷 必有賊兵 掩取殺之 二角干旣受命 各率千人 問西郊 富山下果有女根谷 百濟兵五百人 來藏於彼 並取殺之 百濟將軍于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殪 又有後兵一千二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孑遺 三王無恙時謂群臣曰 朕死於<某>年某月日 葬我於忉利天中 群臣罔知其處 奏云 何所 王曰 狼山南也 至其月日 王果崩 群臣葬於狼山之陽 後十餘年 文<武>大王創四天王寺於王墳之下 佛經云 四天王天之上有忉利天 乃知大王之靈聖也 當時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王曰 畵花而無蝶 知其無香 斯乃唐帝欺寡人之無耦也 蛙有怒形 兵士之像 玉門者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 故知兵在西方 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 以是知其易捉 於是群臣皆服其聖智 送花三色者 盖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 謂善德眞德眞聖是也 唐帝以有懸解之明 善德之創靈廟寺 具載良志師傳詳之 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다
제27대 덕만(德曼)[혹은 만(萬)으로 쓰기도 함]의 시호는 선덕여대왕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 6년 임진(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16년 동안에 무릇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꽃씨 석되를 보내왔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씨를 뜰에 심도록 명령하고 그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여러 개구리가 모여 사나흘 동안 울었다. 나라사람들이 이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을 시켜 정병(精兵) 2천명을 뽑아서 급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잡아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천 명씩을 이끌고 서교(西郊)로 나가 물었다. 과연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이 있고 백제 병사 5백명이 와서 그곳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모두 잡아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于召)라는 자가 남산령(南山嶺)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쏘아 죽였다. 또 후속병력 1천 2백 명이 있었는데, 이를 쳐서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 셋째는 왕이 병을 앓지 않을 때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가운데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알지 못하여 “어느 곳입니까?”라고 물었다. 왕이 말하기를 “낭산(狼山)의 남쪽이다.”라고 하였다. 그 달 그 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나니 여러 신하들이 낭산 남쪽 사지냈다. 10여 년 후에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불경에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이에 대왕의 신령스럽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모란꽃과 개구리가 우는 두 가지 일이 어떻게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도 나비가 없었으므로 그 꽃이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 이는 당 황제가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빗댄 것이다. 개구리의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이란 여자의 생식기이다. 여자는 음이 되니, 그 음의 색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이다. 그러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니 이로써 쉽게 잡을 줄 알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그 뛰어난 지혜에 감복하였다. 꽃을 세 가지 색으로 보낸 것은 아마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음을 알고 그러한 것인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을 말함이니 당나라 황제도 헤아려 알아 맞추는 명석함이 있었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창건한 것은 『양지사전』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별기』에는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