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경 15부 62주

5경 15부 62주

분류 문학 > 제도 > 지방

기본정보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

일반정보

발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전국을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주(州) 아래에는 100-300개의 현을 두었다. 그리고 부(府)에는 도독(都督), 주(州)에는 자사(刺史), 현(縣)에는 현승(縣丞)이라는 지방 관직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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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발해는 주요 지역에 상경・중경・동경・남경・서경의 5경을 두어 정치・경제・군사적 거점으로 삼아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자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조에 인용된 『통전』과 『신당서』 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조에는 발해의 강역에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발해 5경의 위치는 대체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는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시(寧安市) 발해진(渤海鎭),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는 길림성(吉林省) 화룡시(和龍市) 서고성자(西古城子),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는 길림성(吉林省) 혼춘시(琿春市) 팔련성(八連城),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는 길림성(吉林省) 임강시(臨江市),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함경남도 북청(北靑)으로 비정되고 있다.(임상선, 1988)

발해의 5경 중 상경은 정치・외교・교육・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중경은 재정・경제・군사적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동경은 일본과 신라로 가는 교통․외교적 측면이 고려되었고, 서경은 당(唐)으로 가는 압록도 역할을 하였던 곳이며, 남경은 신라와의 관계를 고려함과 동시에 지방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한규철, 2007) 5경 가운데 남경과 서경은 수도가 된 기록은 없으며 지방통치와 교통의 요지로서 기능이 강하였다. 이와 같이 5경은 지방의 주요 거점인 동시에 대외 교통의 요충이라는 특성으로 인하여 유력자가 파견되어 강력한 병력을 배경으로 소속 주현(州縣)을 관할하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河上洋, 1990)

발해는 228년간 4번에 걸쳐 수도를 이동하였다. 무왕(武王, 719-737)대에는 건국지인 구국(舊國)에서 현주(顯州, 중경)로 천도하고, 문왕(文王, 737-793)대에는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고, 다시 상경에서 동경으로 천도하였다. 성왕(成王, 793-794)대에는 동경에서 다시 상경으로 천도하였는데, 이 후 발해는 926년 멸망하기까지 상경을 수도로 삼았다.

5경의 설치시기는 문왕대에 중경⟶상경⟶동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있었던 사실로 보아 문왕대 처음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津田左右吉, 1915), 『신당서』를 근거로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리는 10대 선왕대나(金毓黻, 1934), 11대 대이진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孫進己․馮永謙 主編, 1981) 그리고 5경의 완성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선왕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송기호, 1995)

한편,『신당서』에 따르면 발해는 용천부(龍泉府)・현덕부(顯德府)・용원부(龍原府)・부여부(扶餘府)・남해부(南海府)・압록부(鴨淥府)・막힐부(鄚詰府)・장령부(長嶺府)・정리부(定理府)・안변부(安邊府)・솔빈부(率賓府)・동평부(東平府)・철리부(鐵利府)・회원부(懷遠府)・안원부(安遠府)의 15부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가운데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조와 『삼국사기』권37 잡지6 지리조에 인용된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땅이다(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라고 하여 4부에 대한 기록이 있다. 62주에 대해서는 『신당서』에 구체적으로 60주만 기록되어 있는데 2주가 기록에 없는 것은 누락으로 볼 수 있다.

발해의 지방 통치 구조의 근간이 되는 부․주․현에 대하여 『속일본기』의 문왕(文王) 40년(777)의 “남해부 토호포(南海府 吐號浦)”, 문왕 2년(739)의 “약홀주도독 서요덕(若忽州都督 胥要德)”, 대이진(大彛震) 19년(849)의 “영녕현승 왕문구(永寧縣丞 王文矩)” 등의 기록으로 보아 발해의 지방제도는 문왕 대에 마련되었고, 선왕대 이후 부・주의 말단에 현을 조직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동우, 2006)

참고문헌

津田左右吉, 1915,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東京帝國大學文科大學.
金毓黻, 1934, 『東北通史』, 樂天出版社.
孫進己․馮永謙 主編, 1981,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임상선, 1988, 「渤海의 遷都에 대한 考察」『청계사학』5.
河上洋, 1990, 「渤海の交通路と五京」『史林』72-6.
송기호, 1995, 『발해정치사연구』, 일조각.
김동우, 2006, 「渤海의 地方統治體制의 운영과 그 변화」『韓國史學報』24.
한규철, 2007,「발해 5경의 성격과 기능」『발해의 5경과 영역변천』, 동북아역사재단.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표>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신당서』 권219 북적열전144 발해)

5경(京)
15부(府)
62주(州)(60주만 기록에 남음)
5도(道)
연혁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
용주(龍州)․호주(湖州)․발주(渤州)

숙신(肅愼)의 옛땅(故地)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노주(盧州)․현주(顯州)․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
경주(慶州)․염주(鹽州)․목주(穆州)․하주(賀州)
일본도(日本道)
예맥(濊貊)의 옛땅(故地)
남경(南京)
남해부(南海府)
옥주(沃州)․정주(睛州)․초주(椒州)
신라도(新羅道)
옥저(沃沮)의 옛땅(故地)
서경(西京)
압록부(鴨淥府)
신주(神州)․환주(桓州)․풍주(豊州)․정주(正州)
조공도(朝貢道)
고구려(高句麗)의 옛땅(故地)

장령부(長嶺府)
하주(瑕州)․하주(河州)
영주도(營州道)

부여부(扶餘府)
부주(扶州)․선주(仙州)
거란도(契丹道)
부여(扶餘)의 옛땅(故地)

막힐부(鄚詰府)
막주(鄚州)․고주(高州)

정리부(定理府)
정주(定州)․반주(潘州)

읍루(挹婁)의 옛땅(故地)

안변부(安邊府)
안주(安州)․경주(瓊州)

솔빈부(率賓府)
화주(華州)․익주(益州)․건주(建州)

솔빈(率賓)의 옛땅(故地)

동평부(東平府)
이주(伊州)․몽주(蒙州)․타주(沱州)․흑주(黑州)․비주(比州)

불열(拂涅)의 옛땅(故地)

철리부(鐵利府)
광주(廣州)․분주(汾州)․포주(蒲州)․해주(海州)․의주(義州)․귀주(歸州)

철리(鐵利)의 옛땅(故地)

회원부(懷遠府)
달주(達州)․월주(越州)․회주(懷州)․기주(紀州)․부주(富州)․미주(美州)․복주(福州)․사주(邪州)․지주(芝州)

월희(越喜)의 옛땅(故地)

안원부(安遠府)
영주(寧州)․미주(郿州)․모주(慕州)․상주(常州)

독주주(獨奏州)
영주(郢州)․동주(銅州)․속주(涑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