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후백제

분류 문학 > 제도 > 국호

기본정보

견훤이 세운 후삼국시대의 국가.

일반정보

후백제는 후삼국중 하나로 892년 견훤(甄萱)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935년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전문정보

후백제는 후삼국시대의 국가로 견훤(甄萱)에 의해 892년 건국되었다. 후백제의 건국시기에 대해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모두 892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후백제의 첫도읍지에 관해서는 대부분 무진주(武珍州) 혹은 광주(光州)로 현재의 광주광역시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권2 기이(紀異)2 후백제견훤(後百濟甄萱)조에서 인용하고 있는 고기(古記)의 기록은 완산군(完山郡) 즉 지금의 전주(全州)로 기재 되어 차이가 있다. 후백제 멸망시기에 관해서는 두부류의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왕력과『삼국사기』 권50 열전(列傳)10 견훤조에는 935년에 멸망하였다고 하였고,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견훤조의 본문에는 936년에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성하여 신라의 군대에 입대하였고 전쟁의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신라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정세를 포착하고, 무리를 모아 경주 서남지방의 주현(州縣)을 쳐서 중심 세력을 규합하여 마침내 892년 무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으며, 「신라서면도통(新羅西面都統)」이라 자서(自署)하였다.

견훤의 세력 확장은 전주지역으로 천도(900년)하면서 진행되었다. 이에 대해 견훤이 처음부터 서남해 지역 호족 세력 장악에 실패하였기 때문으로 보거나(정청주, 1995) 견훤에 복속했던 서남해 지방 호족이 이반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신호철, 1993) 또한 완산주에 다수의 군사조직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군사적 기반 확충을 위해 천도가 진행되었다는 입장(김수태, 1999)과 영토 확장의 측면 즉, 전주를 중심으로 무주‧ 공주의 옛 백제지역을 아우르고 더 나아가 통일국가를 완성하려는 의도가 강하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강봉룡, 2001) 후백제는 전주 천도 후 국호의 제정과 칭왕(稱王), 연호의 제정, 설관분직(設官分職) 등 정치조직을 정비해 본격적인 국가체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후백제는 건국 초기 신라에 대해 백제 의자왕의 원한을 갚겠다고 선포했듯이 적대적인 입장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칭호에서 보이듯이 스스로 신라왕실과 군신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경주를 침공해 경애왕을 살해하고도 신라 왕조를 멸망시키지 않고 경순왕을 세우고 있음을 살펴 볼 때 신라 왕실을 존속시켜주면서 단지 신라에 대한 영향력만을 행사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후백제는 중국·일본과 매우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폈다. 중국에 대해서는 오월(吳越)과 후당(後唐)에는 사신을 파견해 공식적으로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 국내에서의 지배적 권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또 오월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의 힘을 빌려, 신라침공에 대해 불만을 가진 고려를 무마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후당(後唐)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일본에도 사신을 보내어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추진하였다.

후백제의 고려에 대한 정책은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다. 궁예의 태봉시대에는 나주지방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서남해안에서 직접 대결하였다. 그러나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에는 고려와 화친관계를 맺고자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시도하고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 등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920년에 견훤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고 진례성(進禮城)으로 진격할 때, 신라는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청해 도움을 받게 되자 이로 인해 후백제와 고려와의 우호 관계는 깨어지게 되고 본격적인 패권다툼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는 신라의 영향권이라 할 수 있는 경상도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었다. 견훤은 920년에 고려가 신라를 도와준 것을 계기로 신라와 고려의 관계가 친밀하게 되어 자주 군사행동을 가해 오자, 견훤은 먼저 신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워 마침내 927년 대병을 거느리고 경주에 침입해 경애왕을 죽이고 많은 약탈을 자행하였다.

한편 후백제의 서해안지역은 왕건의 강력한 해군에 의해 중국과 교통이 저지되었다. 특히, 소백산맥을 따라, 상주에서부터 성주·합천을 거쳐 진주에 이르는 전략선을 확보한 왕건의 남진정책에 의해 후백제는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다. 이에 견훤은 고려의 남진정책에 대항해 동진정책(東進政策)을 구상하였다. 즉, 상주에서부터 안동 쪽으로 연결되는 전략선을 확보함으로써 고려의 후백제 포위정책을 타파하고 신라일대를 후백제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두 나라는 경상도의 서북부지역인 상주를 비롯해 안동·합천·진주 등지에서 자주 큰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후백제가 공산전투에서 승리해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930년 안동에서 고려군에게 대패해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며, 934년에는 웅진 이북의 30여 성을 점령당해 대세가 결정나게 되었다.(신호철, 1993)

후백제는 930년 전투의 패함으로 주변 여건이 극도로 악화된 후 내부적으로도 분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것은 후백제 패망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게 되었다. 후백제의 내분은 견훤이 총애하던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자 신검(神劍)‧양검(良劍)‧용검(龍劍) 등 견훤의 아들들이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폐하고 장자인 신검이 즉위한 하였다. 935년 3월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았던 신검 등은 10월 교서 반포를 즈음하여 대뇌외적으로 그 실체를 인정받는 지배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쇠약해진 국력이 정변을 통한 정치 분위기의 쇄신만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935년 4월 나주 지역을 상실을 비롯한 정변이후의 정세변화는 후백제의 국력을 더욱 피폐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후백제의 정변 이후 국내외적 정세는 고려의 나주경략과 견훤 및 신라 경순왕의 고려귀부, 그리고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朴英規)의 고려 귀부 의사 표시 등 후백제의 분열상과 대외적 여건의 열악함을 보여주게 되었다. 특히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된 지 3개월 만에 이곳을 탈출하여 나주를 거처 고려에 귀부하였고, 고려에 귀부한 후 왕건에게 후백제 경략을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936년 후백제는 왕건과 견훤이 거느린 10만 대군의 침공을 받아 일리천(一利川)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였다. 936년 신검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여 후백제는 멸망하였다.(류영철, 2001)

참고문헌

신호철, 1993, 『後百濟 甄萱正權硏究』, 일조각.
정청주, 1995, 「신라 말 고려 초 지배세력의 사회적 성격」 『전남사학』9.
김수태, 1999, 「후백제 견훤정권의 성립과 농민」 『백제연구』29.
강봉룡, 2001,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류영철, 2001, 「一利川戰鬪와 後百濟의 敗亡」 『大丘史學』63

관련원문 및 해석

後百濟甄萱 [壬子始都光州] 乙未[萱子神劍纂父自立] 是年國除 [自壬子至此四十四年而亡]
후백제 견훤 [임자에 처음으로 광주에 도읍하였다.] 을미 [견훤의 아들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아 스스로 즉위하였다.] 이해에 나라가 없어졌다. [임자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44년 만에 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