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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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학 > 제도 > 국호

기본정보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어 기원후 660년까지 678년간 존속했으며, 총 31대 왕이 다스린 삼국 중의 한 국가. 그 국호는 “십제(十濟)” 또는 “백제(伯濟)”에서 “백제(百濟)”로 변화했다고 전해진다.

일반정보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18년에 비류와 온조 형제가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고구려에서의 왕위 다툼에 따라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건국하였다고 한다. 최초의 국호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중국정사에 의하면 “백제(伯濟)”에서 “백제(百濟)”로 변화하였다고 전하며, 그 외에도 “남부여(南扶餘)”, “응준(鷹準)” 등이 백제 국호의 별칭으로 전하고 있다.

전문정보

최초의 국호는 “십제(十濟)”였으나 뒤에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그후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일시적으로 ”남부여(南扶餘)“로 고치기도 하였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사비로 천도한 이후의 국호를 ”응준(鷹準)“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에는 마한을 구성한 78국의 하나로 ”백제국(伯濟國)“이 나오고, 『송서(宋書)』 이후에는 ”백제(百濟)“로 표기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를 ”구다라(クダラ)“로 훈독하고 있다.

백제 국호의 유래에 관한 전통적인 설(說)은 첫째,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조의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百姓樂從)”는 내용이다. 백제 시조인 온조가 열 명의 신하[十臣]의 보좌를 받아 국가를 운영하였으므로 국호를 당초에는 “십제(十濟)”로 정하였으나, 미추홀의 비류계 주민들을 흡수하면서 백성들이 기뻐하며 따르므로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는 것이다. 여기서 십제는 “열제”로 새겨진다. “열”은 백제 최초의 왕성(王城) 이름인 위례성의 “위례”의 촉음(促音)이 되고, “제”는 “성”의 새김이 된다. 그러므로 십제는 위례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위례성[十濟]에서 국가경영의 규모가 확장됨에 따라 많은 성(城)들을 포괄한다는 의미의 백제로 국호가 바뀌었다고 본다.

둘째는 『수서(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 와서 건국하였으므로, 여기서 한 글자씩 취하여 국호가 나왔다고 하였다(“百家濟海 因號百濟”). 이 설은 마치 고려(高麗)라는 국호가 “산고수려(山高水麗)”에서 기원했다는 속설이나, 신라(新羅) 국호의 “라(羅)”자에 “망라사방(網羅四方)”의 의미를 부여한 것과 같은 후대의 덧붙여진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셋째는 우리 말에서 “百”의 옛 새김은 “온”이므로 백제를 “온제”로 읽을 수 있고, 이는 시조 이름인 온조(溫祚)와 같다는 설이다. 즉, 시조의 이름에서 국호가 기원했다는 것이다.(도수희, 1994)

넷째는 백제가 “광명(光明)한 성(城)”을 가리키는 “밝잣”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백제왕의 경우도 “일월(日月)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가졌던 게 분명한 만큼, 그 자신이 “밝음” 자체였으므로 거처하는 공간[城]을 “밝은 성” 즉, 백제로 일컬었다고 보는 것이다.(양주동, 1942)

다섯째는 백제의 “백(百)”이 고구려의 종족 이름을 나타내는 “맥(貊)”이나 “박(狛)”과, “제(濟)”는 성(城)과 연결지어 “맥(박)족의 성”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돌궐 왕족인 큘테킨의 비문에서 고구려를 “모쿠리”라고 하였는데, “맥구려(貊句麗)”를 가리킨다고 본다. 맥(貊)은 종족 이름을, 구려(句麗)는 성(城)을 가리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백제도 종족 이름(貊·狛=百)과 성[濟]이라는 말이 조합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那珂通世, 1894)

여섯째는, 기본적으로 해상세력의 성격을 갖는 백제가 최초 한강 및 서해안 일대의 포구 세력을 중심으로 성장한 사실과 관련시켜 생각해 볼 때, 백제의 “제(濟)”는 한자어의 해석 그대로 나루터의 의미로 볼 수 있으며, 이같은 의미에서 십제(十濟)는 “열개의 나루터”, 백제(百濟)는 “백개의 나루터”, 그리고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에 보이는 백제(伯濟)는 “으뜸이 되는 나루터”의 뜻으로 새길 수 있다는 견해이다.(조법종, 1989)

한편,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응준(鷹準)”은 『삼국유사』 권3 흥법3 황룡사9층탑조에서 황룡사 9층탑을 세우면서 층마다 적었던 9개의 외적 즉 9韓 중 5층에 적혀진 “응유(鷹遊)”와 연결된다. “응준”이란 국호는 백제의 부여계(扶餘系) 지배세력과는 관계짓기가 힘들며, 백제가 마한(馬韓) 등의 지역을 영유하면서 그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매’ 관련 문화를 포용하게 됨으로써 국호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조법종, 1989)

참고문헌

那珂通世, 1894, 「貊人考」『史學雜誌』 5-5․6.
양주동, 1942, 『朝鮮古歌硏究』, 博文書館.
조법종, 1989, 「百濟 別稱 鷹準考」『韓國史硏究』66.
이기동, 1990, 「百濟建國史의 二,三의 問題」『百濟硏究』21.
도수희, 1994, 『百濟語 硏究 3 - 王名․國號 等의 語彙論을 中心으로』, 백제문화개발연구원.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六 乞解尼叱今[昔氏 父于老音角干 卽奈解王第二子也 庚午立 治(四)十六年 是王代 百濟兵始來侵 己丑始築碧骨堤 周□萬七千二十六步 □□百六十六步 水<田>一萬四千七十□]
제16대 걸해니질금[석씨이다. 아버지는 우로음 각간으로 나해왕의 둘째 아들이다. 경오에 즉위하여 46년간 다스렸다. 이 왕대에 백제 군사가 처음으로 와서 침범하였다. 기축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쌓았다. 주위가 □만 7천 26보이고, □□백 66보이며, 논이 1만 4천 7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