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일자

분류 문학 > 종교 > 토착신앙

기본정보

천문을 보거나 점치는 일을 맡은 사람

일반정보

삼국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한 사람이다. 고대에는 삼국시대까지만 하여도 천재지이(天災地異) 현상들이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점성술에 의한 일자(日者)의 판단들을 믿어왔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연오랑 세오녀(延烏郎 細烏女)조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때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의 왕이 되자 신라에서 일시에 해와 달이 광채를 잃게 되었는데, 일자가 이는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라고 상주해 올렸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25년(서기 5)조에 의하면 일자는 자연의 재이(災異)에 대한 의미를 해석해 왕이 진한·마한을 병합하는데 도움을 주며, 온조왕 43년(25)조에는 남옥저의 백성들이 백제로 투항해 올 사실을 미리 점쳤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4년(149)조에는 일자가 천재(天災)현상에 대해 길흉을 점치는 모습이 전해진다.

『삼국유사』·『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일자에 대한 기록을 통해, 일자란 천문현상을 관찰하고 점복(占卜)의 기능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한편 중국의 사서들에는 일자에 대한 정의가 기록되어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의하면 일자란 역자(易者)로서 일신(日辰)의 길흉을 점치는 자로 나타나 있고,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옛날사람으로 점후(占候)와 복서(卜筮)를 하는 자를 모두 일자(日者)라 일컬었다.(古人占候卜筮 通謂之日者)”라 하였다. 또 『후한서(後漢書)』 권82상 열전72상 방술전(方術傳)에서도 “일자는 복서와 해와 관련된 술수(術數)를 관장하는 사람이다.(日者 卜筮掌日之術)”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일자는 천문현상에 대한 관찰과 점복(占卜)을 행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이러한 일자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자로써 일관(日官)이 등장한다. 일자와 일관이 서로 같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일자와 일관이 동일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백수한(白壽翰)·최사겸(崔士謙)·문상(文象)이 “일자”로도 나오고 “일관”으로도 나오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자(일관)는 그 역할이 3시기로 변화한다고 보았다. 6-7세기 이전의 일자는 샤먼(shaman)의 직능인 점성·점복·치병 중 점성·점복을 담당하며, 점복·치병만 담당하는 무(巫)와는 서로 분화됨으로서 세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6-7세기 이후 첨성대가 설치된 다음부터는 비록 점성적 수준에 그치기는 하나 천문직 관원으로 보고 있으며, 8세기 중엽 이후의 일자는 천문박사(天文博士)와 공봉복사(供奉卜師)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신종원, 1992)

반면에 일자와 일관을 별개로 보는 견해에서 일자는 천문현상의 관찰과 해석을 통하여 점후·점서를 행하는 자로 보고, 일관은 천문현상 관찰과 현상을 통하여 왕의 자문자적 역할을 하였다고 보았다. 일자와 일관이 다르다는 견해는 두 시기로 나누어 일자와 일관의 활동시기를 구분하고 있다. 1-3세기 동안에는 무와 일자가 공존하고 있는데, 병의 원인에 대한 판단은 주로 무가 담당하였으며, 천문현상에 대한 해석은 일자가 담당하였다고 한다. 일자는 4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7세기 중엽이후부터는 천문현상에 대해 해석을 내렸던 일자 대신에 일관으로 대체되어 그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이해하였다.(최석영, 1996)

한편 일자의 등장배경에 대해서도 위의 두 의견은 견해를 달리한다. 일자와 일관이 같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삼국시대 이전에 일자는 제사장으로서의 왕과 같은 지위였으나, 삼국시대에 들어서서 그러한 지위를 상실하였다고 보았다. 일자는 하늘과 교류가 가능한 신화시대에서는 영웅이었으나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왕의 정신적 보좌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일자는 여전히 고대 사회의 정신적 주류로 남아 그들 본래의 신화적 세계를 보여주며, 그것은 불교 혹은 유교가 전래되고 토착화될 때까지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신종원, 1992; 서영대, 1997)

반면에 일자와 일관을 다르게 본 입장에서는 6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일관이 일자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6세기 초 지증왕대에 신궁이 설치되고, 6세기 이래 관직체계가 갖추어져 갔으며, 경덕왕대의 왕권강화정책으로 인해 왕의 자문자적 존재인 일관이 일자를 대신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무에 대한 정치적인 의미는 축소되어 국사에 대한 간섭의 범주가 기우제나 왕족의 치병 활동에 국한되었고, 대신 민간신앙적인 역할이 증대되었다고 보았다.(최석영, 1996) 이외에도 『삼국사기』 권40 잡지(雜志)9 직관(職官)조에 의하면 백제에 “일관부(日官部)”가 존재하였음을 근거로, 일자는 국가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술수의 담당자였던 일자가 점차 박사제도나 일관부로 편입되어 갔다고 본 연구도 있다.(장인성, 2001)

참고문헌

신종원,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최석영, 1996, 「巫와 日官과의 갈등에 대한 역사적 고찰」『비교민속학』 17.
서영대, 1997, 「韓國古代의 宗敎職能者」『한국고대사연구』 12.
장인성, 2001, 『백제의 종교와 사회』, 서경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연오랑 세오녀)
延烏郞 細烏女
第八阿達羅王 卽位四年丁酉 東海濱 有延烏郞細烏女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 忽有一巖[一云一魚] 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按日本帝記 前後無新羅人爲王者 此乃邊邑小王 而非眞王也] 細烏怪夫不來歸尋之 見夫脫鞋 亦上其巖 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 奏獻於王 夫婦相會 立爲貴妃 是時 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 降在我國 今去日本 故致斯怪 王遣使<求>二人 延烏曰 我到此國 天使然也 今何歸乎 雖然 朕之妃有所織細綃 以此祭天可矣 仍賜其綃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 然後日月如舊 藏其綃於御庫爲國寶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又都祈野
연오랑과 세오녀
제8대 아달라(阿達羅)왕이 즉위한지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를 캐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혹은 물고기 한 마리]가 나타나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 하고, 이에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記)를 살펴보면, 그 앞이나 뒤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자가 없으니, 이것은 변두리 고을의 소왕(小王)으로 진짜 왕(眞王)은 아니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나가 그를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역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 이전처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랍고 의아하여 왕에게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세오를) 귀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게 되었는데, 일자(日者)가 왕에게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지금은 일본으로 가버렸으므로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라 하였다. 왕은 사자를 보내 두 사람을 찾았는데,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일이니, 지금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짐의 비가 짠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고 하고,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 아뢰어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이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어고(御庫)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는 귀비고(貴妃庫)라 하였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은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