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존상 화광후기

미륵존상 화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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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감산사지에서 발견된 불상의 후면에 새겨진 조상기(造像記)

지정명 :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지정번호 : 국보 제 81호
위치: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일반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남월산(南月山)조에서 감산사에 대한 설명을 위해 이 절의 미륵존상 화광후기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개원(開元) 7년(719) 기미(己未) 2월 15일 중아찬(重阿飡, 신라 17관등 가운데 6위)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17관등 가운데 7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부인을 위해, 감산사(甘山寺)를 짓고 돌미륵 한 구를 정성들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남월산(南月山)조를 보면 감산사가 경주 동남쪽 이십리쯤 되는 곳에 있음을 밝히면서 이 절에 안치되어 있는 두 불상에 새겨진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감산사에는 미륵존상과 미타불상이 있었는데 각각 그 뒷면에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금당의 주존인 미륵존상의 화광(火光) 후면 기록에 의하면 개원(開元) 7년 기미(719) 2월 15일 중아찬(重阿飡, 신라 17관등 가운데 6위)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17관등 가운데 7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감산사(甘山寺)를 세우고 돌미륵 한 구를 정성들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사를 친족인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 17관등 가운데 12위),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 또 서족(庶族) 급막(及漠) 일길찬(一吉飡), 일당(一幢) 살찬(薩飡, 17관등 가운데 8위),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과 함께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머니 초리부인(肖里夫人)이 고인이 되자,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음을 기록하였다. 이외에 비슷한 내용이 기록된 미타불의 후면 기록에도 함께 인용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에 따르면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志全)은 일찍이 상의봉어(尙衣奉御)와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지내며 국주대왕(國主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 고로리(古路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를 위하고,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 감산의 장전(莊田)을 베풀어 가람을 세우고, 거듭 돌미타불 한 구를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지전이 죽은후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위 기록에서 인용된 미륵존상 화광후기의 원본으로 생각되는 유물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국보 제81호인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의 뒷면에 새겨진 조상기(造像記)가 그것인데, 이 조상기 쪽이 더 내용이 충실하긴 하나, 그 중심내용은 남월산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찬자는 이 조상기의 내용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남월산조에 인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의 전체 높이는 광배와 대좌를 포함하여 총 252cm이며, 보살상만의 높이는 183cm이다. 불상 뒷면 등부분에 조상기가 새겨져 있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경주 지방 고적을 조사할 때 당시 내동면 신계리의 논(현재 외동읍 괘릉리)에서 국보 제 81호인 이 불상과 국보 제82호인 미타불상이 함께 박혀 있던 것을 발견하여 경복궁으로 옮겼다. 이후 이 두 불상은 조선 총독부에 의해 보관되었으며, 해방 이후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김남윤, 1992)

남월산조에서 인용된 미륵존상화광후기의 원본으로 생각되는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과 미타불화광후기의 원본으로 생각되는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 광배 뒤에는 장문의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져 있어 불상의 조성 연대와 연원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남월산(南月山)조의 내용과는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어 191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사에 착수한 일본 학자들이 정밀하게 탁본을 찍어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조상기(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造像記)」를 대조하여 바로잡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19년에 만들어진『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攬)』에 조상기의 전문이 수록되었다. 1920년에는 『박물관진열품도감(博物館陳列品圖鑒)』에 조상기의 실제 사진이 실렸으며, 1935년에는 아미타불입상에 왕명에 의해 내마 총(奈麻 聰)이 명문을 찬술하였다고 명시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여, 당시 제자백가에 정통한 사람은 설총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내마 총을 설총으로 비정한 의견도 나왔다.(葛城末治, 1935) 한편 불상을 조성한 김지성이란 인물에 대해 왕실과의 관계와 그의 관직인 집사시랑에 초점을 두어 해명하고, 불교와 도교의 융합이 김지성의 사상에서 엿보인다는 연구가 나오기도 하였다.(末松保和, 1954)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조상기의 경우 내용상 몇 문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조성동기, 머리말, 김지성의 생애, 발원내용,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 조상기의 경우 일단 창건자가 김지성이 아닌 김지전으로 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 내용구성에서도 머리말, 김지전의 생애, 발원내용은 미륵존상과 공통되나, 앞부분에 조성동기가 없는 대신 전체적으로 명문을 새긴 관여자들, 아버지의 장례식, 김지전의 사망사실이 추가되어 있다. 이들 기록상에서는 창건자의 이름은 다르게 표시되어 있지만, 김지성과 김지전 두 사람의 관등은 똑같이 중아찬이며 구체적인 내용에서 발원자의 아버지, 전처, 후처, 누이의 이름이 모두 같기 때문에 김지성과 김지전을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이름이 달리 새겨진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다. 먼저 신라 시대에는 한자의 음을 빌어 사람들의 이름을 표기한 사례가 많아 동일한 사람이라도 다른 글자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葛城末治, 1935) 이와는 달리 감산사의 불상에 조상기를 새기는 과정에서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지성이 김지전으로 이름을 개명했다고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이병도, 1956) 여기서 더 나아가 왕명(王命)에 의해 김지성이 김지전으로 개명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먼저 새겨진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상기에는 김지성이란 이름이 그대로 들어갔지만, 이 과정을 지켜보던 왕이 기특히 여기고 김지성에게 김지전이란 이름을 하사하자 그 다음으로 조성된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의 조상기에는 김지성 대신 김지전이란 이름이 들어갔다고 본 것이다.(최완수, 2000) 한편 김지성과 김지전이 동일인물이 아니라 형제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유사』의 조선 중종 임신본을 비롯한 목판본에 남월산조를 보면, 뒤쪽의 미타불 화광후기의 김지전은 그대로 명기되어 있지만, 앞쪽의 미륵불 화광후기 인용부분에서는 중아찬 김지성이라 되어 있지 않고, 중아찬 전망성(全忘誠)으로 표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 부분은 김지성(金志誠)의 오각으로 보는데 이를 “중아찬 전(全, 김지전)이 성(誠, 김지성)을 잃고서”로 번역하여 두 사람이 형제라고 이해한 것이다.(윤철중, 2002)

한편 이 두 불상의 조성시기는 각각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두 조상기의 명문의 해석에 따라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먼저 미륵불 조상기에서 김지성이 개원 7년(719) 2월 15일에 미륵상을 만든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 있어 이 미륵보살입상의 조성 시기는 719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아미타불입상의 조성기에 의하면 김지전(=김지성)이 성덕왕 19년(720)에 죽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미륵보살입상이 먼저 조성된 후 아미타불입상이 조성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게 되었고, 아미타불입상의 조성연대는 김지성의 사망연대인 720년으로 간주되었다.(김남윤, 1992)

이와는 달리 아미타불입상 조상기에는 김지성의 몰년이 기록된점 외에도 다른 차이점이 있는데 이에 주목하여, 두 불상의 조성시기 연대 차이를 더 크게 본 견해가 있다. 미륵보살입상 조상기에는 김지성의 부모 외에는 모두 생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에 비해 아미타불입상 조상기에는 누이와 친족등이 대다수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아미타불입상 조상기에만 김지성이 집사시랑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집사시랑이란 명칭은 경덕왕 6년(747)년에 개정된 명칭이다. 이렇게 친족들이 사망한 점과, 관직명의 변화년도가 불상조성시기 이후라는 점에 주목하여 미륵보살입상과 아미타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약 30년의 연대차가 날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문명대, 2003)

한편 아미타불입상 조상기의 내용이 미륵보살입상 조상기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많고, 문장형식 또한 체계가 잡혀 있는 것을 근거로 미륵보살입상 조상기가 먼저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도 한다.(구문회, 2005)

한 가지 특이한 것으로 대체로 이 시기의 조상기는 한문으로만 쓰거나 이두문만으로 쓰는 것이 대부분인데,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象)의 조상기(造像記)와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象)의 조상기(造像記)」는 한문으로 그 조성과정을 모두 적고, 그 뒤에 이두를 추가하였다. 이는 아직까지 밝혀진 금석문 중에서는 유일한 사례이다.(남풍현, 1993)

미륵보살입상과 아미타불입상은 한 사찰안에 봉안되었고, 조상기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양식면에서 차이가 보인다. 먼저 미륵보살입상을 살펴보면, 상을 둥글게 조각하여 전체적으로 살이 올라있는 인체를 표현하였다. 안면 형태는 둥글게 깎아내어 원만한 방형이며, 이목구비가 상호간의 유기적인 연결과 흐름을 가져 자연스럽다. 상체에 표현된 복식과 장신구는 얇게 조각되어 인체를 보다 구조적으로 나타내려 하고 있다. 하반신 역시 신체에 밀착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광배는 화염이 흐리는 형태가 비교적 정확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관능적인 자세와 화려한 장신구의 표현에서 미륵보살입상은 초당(初唐)시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中吉功, 1956) 그리고, 더 나아가 굽타시대 불상과 흡사한 점을 들어 인도의 양식을 바탕으로 중국의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미륵보살입상은 묶음머리를 하고 보관을 썼으며 화불이 있는데, 광배의 명문이 아니었다면 관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만큼, 아직까지는 국내에 유일한 사례로 이해하기도 한다.(문명대, 2003)

아미타불입상은 미륵에 비해 좀 더 투박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U자형의 옷자락이 신체의 윤곽을 나타내기보다, 복식을 강조하여 좌우대칭을 이루며 틀을 형성하고 있다. 안면형태는 거의 방형인 형태에 모서리만 둥글게 표현하고 있고 상하의 폭보다 좌우의 폭이 넓게 설정되어 미륵보살상에 비해 불안정해 보인다. 이목구비 역시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 광배는 화염문 형태가 흐트러져 있고, 개체수도 줄어 있다. 아미타불입상의 Y자 형 옷주름은 서역의 불상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중국을 거치면서 이미 형식화된 단계의 것을 받아들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김리나, 1989) 그리고 서역만이 아니라 사산조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불교조각에 반영되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소현숙, 1999)

이 두 불상에서 보이는 국제적인 불상양식의 배경은 성덕왕대에 당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발원자인 김지성은 당과 활발한 교류를 하던 성덕왕대의 사신이었으므로 이들 불상의 국제적인 양식은 김지성이 들여왔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또한, 조각상의 양식 차이는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조각장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한다.(소현숙, 1999)

미륵보살입상과 아미타불입상이 함께 조성된 것에 대해 법상종과 관련지어 본 견해가 있다. 김지성이 법상종과 관련된 『유가론(瑜伽論)』을 때때로 읽었다는 내용이 아미타불입상 조상기에 등장하며 금당의 주존이 미륵불이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주목하여 김지성이 창건한 감산사를 법상종의 사찰로 보았으며, 미륵보살입상을 금당(金堂)에, 아미타불입상을 강당(講堂)에 안치하였다고 추정한 견해가 있다.(中吉功, 1956) 이 견해에 보충하여 미륵과 아미타 두 상을 함께 조성한 것은 법상종 신앙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였다.(문명대, 2003)

그러나 미륵과 아미타를 함께 신앙하거나 조성하는 사례는 중국에서 현장이 법상종을 개창하는 7세기 중엽 이전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으므로 미륵보살입상과 아미타불입상이 병존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감산사의 두 불상을 법상종 미술의 특징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소현숙, 1999)

참고문헌

葛城末治, 1935, 『朝鮮金石攷』, 大阪屋號書店.
末松保和, 1954, 「甘山寺彌勒尊像び阿彌陀佛の火光後記」『新羅史の諸問題 』, 東洋文庫.
中吉功, 1956, 「新羅甘山寺石造彌勒·阿彌陀像について」『朝鮮學報』9.
이병도, 1956, 『譯註 三國遺事』, 동국문화사.
김영미, 1988, 「聖德王代 專制王權에 대한 一考察-감산사 彌勒像·阿彌陀像銘文과 관련하여」『梨大史苑』22·23合.
김리나, 1989, 『韓國古代佛敎彫刻史硏究 』, 일조각.
김남윤, 1992, 「감산사 미륵·아미타상 조상기」『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I, 한국고대사회연구.
남풍현, 1993, 「신라시대 이두문의 해독」『서지학보』 9.
소현숙, 1999, 「감산사 미륵보살입상과 아미타여래입상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최완수, 2000, 「한국 최고의 고혹미 감산사 석조미륵불보살」『신동아』493.
윤철중, 2002, 「南月山 甘山寺 설화의 東海攸友邊에 대하여」『자하어문논집』17, 상명어문학회.
문명대, 2003, 「신라 法相宗의 성립 문제와 감산사 미륵 · 아미타불상」『원음과 고전미』, 예경.
구문회, 2005, 「감산사 미륵보살상・아미타불상 조상기를 통해 본 7-8세기 신라 귀족의 삶-김지성의 일생과 사회적 배경을 중심으로」『생활문물연구』17, 국립민속박물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남월산)
南月山[亦名甘山寺]
寺在京城東南二十許里 金堂主彌勒尊像火光後記云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 重阿<飡><金><志>誠 爲亡考仁章一吉干 亡妃觀肖里夫人 敬造甘山寺一所石彌勒一軀 兼及愷元伊飡 <弟>懇誠小舍 玄度師 姊古巴里 前妻古老里 後妻阿好里 兼庶族及漠一吉<飡> 一幢薩<飡> 聰敏<大>舍 妹首肹買等 同營玆善 亡妣肖里夫人 古人成之 東海攸友邊散也[古人成之以下 文未詳其意 但存古文而已 下同] 彌陁佛火光後記云 重阿<飡>金志全 曾以尙衣奉御 又執事侍郞 年六十七致仕閑居 奉爲國主大王 伊<飡>愷元 亡考仁章一吉干 亡妃亡弟小舍梁誠 沙門玄度 亡妻古路里 亡妹古巴里 又爲妻阿好里等 捨甘山莊田 建伽藍 仍造石彌陁一軀 奉爲亡考仁章一吉干 古人成之 東海攸反邊散也[按帝系 金愷元乃太宗春秋之<第>六子愷元角干 乃文熙之所生也 <金>志全乃仁章一吉干之子 東海攸反恐法敏葬東海也]

남월산[또는 감산사라고도 한다.]
이 절은 서울(경주) 동남쪽 이십리쯤 되는 곳에 있다. 금당(金堂)의 주존인 미륵존상(彌勒尊像)의 화광(火光) 후면 기록에 이르길, “개원 7년 기미(719) 2월 15일 중아찬(重阿飡, 신라 17관등 가운데 6위)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17관등 가운데 7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감산사(甘山寺) 한 채와 돌미륵 한 구를 정성들여 조성하였다. 아울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 17관등 가운데 12위),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 또 서족(庶族) 급막(及漠) 일길찬(一吉飡), 일당(一幢) 살찬(薩飡, 17관등 가운데 8위),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을 위해 같이 이 선한 일을 경영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 초리부인(肖里夫人)이 고인이 되자,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다.” [고인성지 이하는 글 뜻을 잘 알 수 없으나, 다만 고문을 남겨둘 뿐이다. 아래도 같다.] 미타불 화광후면 기록에 이르길,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志全)은 일찍이 상의봉어(尙衣奉御)와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지내며 국주대왕(國主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아내 고로리(古路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를 위하고,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 감산의 장전(莊田)을 베풀어 가람을 세우고, 거듭 돌미타불 한 구를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했다.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다.” [제계(帝系)를 살펴보면 김개원은 태종춘주의 여섯째 아들 개원(愷元) 각간(角干)이다. 이는 문희의 소생이다. 김지전은 곧 인장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반(東海攸反)은 아마도 법민(法敏, 문무왕)을 장사지낸 동해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