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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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 경주의 지명으로 흥륜사(興輪寺)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곳

일반정보

천경림은 흥륜사(興輪寺)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곳으로, 전불(前佛) 시대 7곳의 옛 절터[七處伽藍之虛] 중 첫 번째이다. 불교가 들어와 절이 세워지기 이전에도 고대신앙의 성지(聖地) 또는 토착신앙의 성소(聖所)로 여겨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신라의 흥륜사는 현재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천경림 또한 이 근처에 있었던 숲으로 볼 수 있다

전문정보

천경림(天鏡林)은 신라 경주의 지명으로 흥륜사(興輪寺)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곳이다.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阿道基羅)조와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猒髑滅身)조에 천경림과 관련된 내용이 전한다. 먼저 『삼국유사』 아도기라조에 인용된 「아도본비(我道本碑)」에 따르면, 고구려사람 아도가 위(魏)나라에 가서 승려가 된 뒤 19세 때 돌아와 어머니를 뵈니, 어머니가 지금부터 3천여 월이 지나면 계림(鷄林)에 성왕(聖王)이 출현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라고 하면서 계림의 서울에 7곳의 옛 절터[七處伽藍之虛]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이었다. 그 세주에 따르면 천경림은 곧 지금(고려)의 흥륜사(興輪寺)이며, 금교는 서천(西川)의 다리를 말하는데 세간에서는 송교(松橋, 솔다리)로 잘못 부르고 있다고 하였다. 「아도본비(我道本碑)」에는 이어서, 아도가 계림으로 들어온 이후의 상황도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아도는 미추왕(未雛王) 2년(263) 계림(鷄林)에 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서 살면서 대궐에 가서 불교를 믿을 것을 청하였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속림(續林) 즉 일선현(一善縣, 경북 구미시 선산읍) 모록(毛祿)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고 한다. 3년이 되던 해에 아도가 궐에 들어가 병이 난 공주를 치료하자 왕이 이를 기뻐하면서 아도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는데, 이때 아도는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창건할 것을 청하였고, 이곳에 창건된 절이 곧 흥륜사(興輪寺)였다는 것이다.

즉, 아도기라조에 인용된 「아도본비」에서는 천경림이 두 번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경주에 있던 전불(前佛) 시대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虛) 중 하나였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미추왕대 신라에 들어온 아도가 왕에게 청하여 이곳에 흥륜사를 세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다만 두 번째 나오는 천경림은 목판본에 “천경림(天境林)”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천경림(天鏡林)”의 오각인 듯하다.

또한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猒髑滅身)조에서는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인용하여 진흥대왕(眞興大王) 즉위 5년 갑자(甲子, 544)에 대흥륜사(大興輪寺)를 지었다고 하고, 그 세주에서 『국사(國史)』와 향전(鄕傳)에 의하면 흥륜사는 법흥왕 14년 정미(丁未, 527)에 터를 잡고 21년 을묘(乙卯, 535)에 천경림을 크게 벌채하여 처음으로 공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하였다. 절의 서까래와 대들보는 모두 그 숲에서 취했는데 쓰기에 넉넉했고, 계단의 초석이나 석감(石龕)도 모두 있었다고 한다.

한편 『해동고승전』 권1 아도(阿道)조와 법공(法空)조에도 천경림이 나온다. 아도조의 내용은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殊異傳)』을 인용한 것으로 그 내용은 『삼국유사』 아도기라조의 「아도본비」 기록과 같다. 법공조의 내용은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나오는 이차돈 설화와 비슷한데, 여기서는 염촉이 왕과 함께 불교를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지으려 한다.”라고 사람들에게 전했다고 하며, 이후 법흥왕 21년(534) 천경림을 베어 정사(精舍)를 지으려고 땅을 고르다 주초석과 석감 및 계단 등을 얻으니 과연 이곳이 옛날 초제(招提, 사방에서 모여드는 수행승들이 머무는 객사)의 터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외 「도리사아도화상사적비(桃李寺阿度和尙事蹟碑)」(1639)에도 천경림과 관련된 내용이 전한다. 즉 소지왕(炤智王, 재위 479-500) 때 왕이 왕녀의 병 때문에 아도(阿度)를 만나 물으니, 아도가 말하기를 “저에게 천경림(天敬林)을 주시면 곧 병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므로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이곳은 비보(裨補)로 전해온 바로서 만대에 이어온 것입니다. 위아래가 함께 받드는데 어찌 승려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반대했다. 아도는 “상제(上帝)께서 저에게 명하였으니 이 땅은 허락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거짓으로 속이는 말이라 하여 믿을 수 없다고 하였으나, 오직 이차돈만이 불법 믿기를 청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해동고승전』은 기록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천경림이 7곳의 옛 절터[七處伽藍之虛] 중 하나이며,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가 세워진 곳이라는 내용은 공통적이다. 천경림을 비롯해 옛 절터로 언급된 7곳에 대해서는 일찍이 고대 신앙에 있어서 신성지역이었고 삼한지역에서 소도(蘇塗)로 불리던 지역들이었다고 지적된 바 있다.(이기백, 1978) 또한 이차돈 관련 설화를 고찰하는 가운데, 법흥왕과 이차돈, 군신 사이에 문제가 생겼던 것은 이차돈이 굳이 천경림에 절을 창건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서, 당시 천경림이 고유신앙의 성소(聖所)였기 때문에 이러한 마찰이 일어났던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였다. 「도리사아도화상사적비」에서 천경림이 신라에서 비보(裨補)로 전해진 곳이라고 하였고, 또 천경림(天鏡林)을 “천경림(天敬林)”이라고 기록하였으므로, 이곳에서 천신(天神)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최광식, 2007)

천경림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아도기라조에서 이곳이 곧 흥륜사라고 하고, 천경림은 금교(金橋) 동쪽에 있었으며 금교는 곧 서천(西川)의 다리를 말한다고 하였다. 흥륜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그동안 혼란이 있었지만 현재 경북 경주시 사정동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천경림은 이 근처에 있었던 숲을 이른다고 하겠다. 참고로 서천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산천조에서 부의 서쪽 4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흥륜사와의 관계에 따라 현재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의 서편으로 보고 있다.(이근직, 2000)

참고문헌

이기백, 1978,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한국연구원.
이근직, 2000, 「新羅 王京 橋梁址 位置 再考」『慶州文化論叢』 3.
최광식, 2007, 『한국 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고려대 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
阿道基羅[一作我道又阿頭]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於家中作堀室安置 時梁遣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遣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遍問國中 墨胡子見之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訥祗在晉宋之世 而云梁遣使 恐誤] 時 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 厚加賚貺 俄而不知所歸 又至二十一毗處王時 有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疾而終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有注云 與本碑及諸傳記殊異 又高僧傳云西竺人 或云從吳來] 按我道本碑云 我道高麗人也 母高道寧 正始間 曹魏人我[姓我也]崛摩奉使句麗 私之而還 因而有娠 師生五歲 其母令出家 年十六歸魏 省覲崛摩 <投>玄彰和尙講下就業 年十九又歸寧於母 母謂曰 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其京都內有七處伽藍之墟 一曰金橋東天鏡林[今興輪寺 金橋謂西川之橋 俗訛呼云松橋也 寺自我道始基而中廢 至法興王丁未草創 乙卯大開 眞興王畢成] 二曰三川歧[今永興寺 與興輪開同代] 三曰龍宮南[今皇龍寺 眞興王癸酉始開] 四曰龍宮北[今芬皇寺 善德甲午始開] 五曰沙川尾[今靈妙寺 善德王乙未始開] 六曰神遊林[今天王寺 文武王己卯開]七曰婿請田[今曇嚴寺] 皆前佛時伽藍之墟 法水長流之地 爾歸彼而播揚大敎 當東嚮於釋祀矣 道禀敎至雞林 寓止王城西里 今嚴莊寺 于時<未>雛王卽位二年癸未也 詣闕請行敎法 世以前所未見爲嫌 至有將殺之者 乃逃隱于續林[今一善縣]毛祿家[祿與禮形近之訛 古記云 法師初來毛祿家 時天地震驚 時人不知僧名而云阿頭彡麽 彡麽者乃鄕言之稱僧也 猶言沙彌也] 三年 時 成國公主疾 巫醫不効 勅使四方求醫 師率然赴闕 其疾遂理 王大悅 問其所須 對曰 貧道百無所求 但願創佛寺於天<鏡>林 大興佛敎 奉福邦家爾 王許之 命興工 俗方質儉 編茅葺屋 住而講演 時或天花落地 號興輪寺 毛祿之妹名史氏 投師爲尼 亦於三川歧 創寺而居 名永興寺 未幾 <未>雛王卽世 國人將害之 師還毛祿家 自作塚 閉戶自絶 遂不復現 因此大敎亦廢 至二十三法興大王 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 乃興釋氏 距<未>雛王癸未之歲二百五十二年 道寧所言三千餘月 驗矣 據此 本記與本碑 二說相戾不同如此 嘗試論之 梁唐二僧傳 及三國本史皆載 麗濟二國佛敎之始 在晋末太元之間 則二道法師 以小獸林甲戌 到高麗明矣 此傳不誤 若以毗處王時方始到羅 則是阿道留高麗百餘歲乃來也 雖大聖行止出沒不常 未必皆爾 抑亦新羅奉佛 非晩甚如此 又若在<未>雛之世 則却超先於到麗甲戌百餘年矣 于時 雞林未有文物禮敎 國號猶未定 何暇阿道來請奉佛之事 又不合高麗未到而越至于羅也 設使暫興還廢 何其間寂寥無聞 而尙不識香名哉 一何大後 一何大先 揆夫東漸之勢 必始于麗濟而終乎羅 則訥祗旣與獸林世相接也 阿道之辭麗抵羅 宜在訥祗之世 又王女救病 皆傳爲阿道之事 則所謂墨胡者非眞名也 乃指目之辭 如梁人指達摩爲碧眼胡 晋調釋道安爲柒道人類也 乃阿道危行避諱 而不言名姓故也 蓋國人隨其所聞 以墨胡阿道二名 分作二人爲傳爾 況云阿道儀表似墨胡 則以此可驗其一人也 道寧之序七處 直以創開先後預言之 <兩>傳失之 故今以沙川尾躋於五次 三千餘月 未必盡信 <蓋>自訥祗之世 抵乎丁未 无慮一百餘年 若曰一千餘月 則殆幾矣 姓我單名 疑贗難詳 又按元魏釋曇始[一云惠始]傳云 始關中人 自出家已後 多有異迹 晉孝武太元(九)年末 齎經律數十部 往遼東宣化 現授三乘 立以歸戒 盖高麗聞道之始也 義熙初復還關中 開導三輔 始足白於面 雖涉泥水 未嘗沾濕 天下咸稱白足和尙云 晉末 朔方匈奴赫連勃勃 破獲關中 斬戮無數 時始亦遇害 刀不能傷 勃勃嗟嘆之 晉赦沙門 悉皆不殺 始於是潛遁山澤 修頭陁行 拓拔燾復剋長安 擅威關洛 時有博陵崔皓 小習左道 猜嫉釋敎 旣位居爲輔 爲燾所信 乃與天師寇謙之說燾 佛敎無益 有傷民利 勸令廢之云云 太平之末 始方知燾將化時至 乃以元會之日 忽杖錫到宮門 燾聞令斬之 屢不傷 燾自斬之亦無傷 飼北園所養虎 亦不敢近 燾大生慚懼 遂感癘疾 崔寇二人 相次發惡病 燾以過由於彼 於是誅滅二家門族 <宣>下國中 大<弘>佛法 始 後不知所終 議曰 曇始以太元末年到海東 義熙初還關中 則留此十餘年 何東史無文 始旣恢詭不測之人 而與阿道墨胡難陁 年事相同 三人中疑一必其變諱也 讚曰 雪擁金橋凍不開 鷄林春色未全廻 可怜靑帝多才思 先著毛郞宅裏梅

아도(阿道)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 한다.]
「신라본기(新羅本記)」제4에 이르기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에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다. 군(郡)사람 모례(毛禮)[혹은 모록(毛祿)이라고 한다.]가 집안에 굴을 파고 그를 안치(安置)하였다. 이때 양(梁)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을 주었다.[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에서 원표(元表)란 사승(使僧)을 보내고 명단(溟檀)과 불경․불상[經像]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군신(君臣)이 그 향(香)의 이름과 쓰는 법을 몰라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며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보고 말하기를,‘이는 향이란 것인데, 그것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몹시 풍기어 신성(神聖)에게 정성이 통하는 것이다.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사르고 발원(發願)하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으리라’고 하였다.[눌지(訥祗)는 진(晉)․송(宋)시대에 해당하니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때 왕녀(王女)가 병이 위독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서원을 표하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후하게 예물을 주었는데, 조금 있다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또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재위 479-500)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명과 역시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수년을 머물다가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명은 남아있으면서 경문(經文)과 율법(律法)을 강독하니 왕왕 신봉자가 있었다.[주(注)에 이르되 「본비(本碑)」 및 모든 전기(傳記)와 다르다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축인(西竺人)이라 하였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고 하였다.「아도본비(我道本碑)」에 의하면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으로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曺魏)사람 아(我)[아(我)는 성(姓)이다.]굴마(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그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아도가 출생하여 5세에 그의 어머니가 출가하게 하였다.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강석(講席)에 나아가 배웠다. 19세에 또 돌아와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가 이르기를,‘이 나라는 지금까지 불법을 모르지만, 이후 3천여 개월이 되면 계림(鷄林)에 성왕(聖王)이 나와서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서울 안에 일곱 곳의 가람(伽藍)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지금의 흥륜사(興輪寺)로, 금교는 서천교(西川橋)이니 속어(俗語)로 잘못하여 솔다리[松橋]라고 한다. 이 절은 아도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인데, 중간에 폐지되었다.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정미(丁未, 527)에 이르러 처음 열었고, 을묘(乙卯, 535)에 크게 개창(開倉)하여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에 마쳤다.], 둘째는 삼천기(三川岐)[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다. 흥륜사(興輪寺)와 동시에 개창하였다.],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黃龍寺)이다. 진흥왕 계유(癸酉, 553)에 처음 개창되었다.], 넷째는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이다.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갑오(甲午, 634)에 처음 개창되었다.],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지금의 영묘사(靈妙寺)이다. 선덕왕 을미(乙未, 635)에 처음 개창되었다.],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지금 천왕사(天王寺)이다.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기묘(己卯, 679)에 개창되었다.], 일곱째는 서청전(婿請田)[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으로서 모두 전불(前佛) 시대의 가람(伽藍)터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르던 땅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東)으로 향하리라.’하였다. 아도가 가르침을 받고 계림에 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우거(寓居)하니,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고, 때는 미추왕(未雛王, 재위 262-284) 즉위 2년 계미(癸未, 263)였다. 대궐에 들어가서 교법을 행하기를 청하니, 세상에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려하였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록(祿)은 예(禮)와 형태가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승(僧)이란 이름을 모르고 아두삼마(阿頭彡麽)라 하였다. 삼마(彡麽)는 향언(鄕言)으로 승(僧)을 가리키는 말이니, 사미(沙彌)라는 말과 같다.”고 하였다.]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3년이 지났을 때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의(巫醫)의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의사를 구하였다. 법사가 급히 대궐에 들어가 그 병을 치료하니 왕이 대단히 기뻐하고 그 소원을 물었다. 대답하기를,‘빈도(貧道)는 백에 구하는 바가 없고, 다만 천경림에 불사(佛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켜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였는데, 그때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집을 덮고 거주하면서 강연(講演)하니 간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그 절 이름을 흥륜사(興輪寺)라 하였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어 또한 삼천기(三川岐)에 절을 짓고 거주하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니 국인(國人)들이 법사를 해하려하여 법사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마침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불교 또한 폐지되었다. 제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 재위 514-540)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에 즉위하여 불교[釋氏]를 일으켰는데, 미추왕 계미(癸未)와 252년 떨어졌다. 고도령이 말한 3천여 개월이 들어맞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설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이를 한 번 시론해본다. 양(梁)․당(唐) 두 승전(僧傳)과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모두 여(麗)․제(濟)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 태원(太元) 연간(376-396)이라고 하였으니 이도(二道, 순도와 아도)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王) 갑술(甲戌, 374)에 고구려에 온 것이 분명하므로 이 전(傳)은 잘못되지 않았다. 만일 비처왕 때에 비로소 신라에 왔다면, 이것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100여 년을 있다가 온 것이 된다.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거지와 출몰(出沒)이 비상(非常)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모두 이렇지는 않다. 또한 신라의 불교신봉이 이렇게 심하게 늦지는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고구려에 들어온 갑술년보다도 100여 년 전이 된다. 그때는 계림에 아직 문물(文物)과 예교(禮敎)도 없었고, 국호도 아직 정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교를 받들자고 청하였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오지 않고 신라로 넘어왔다는 것이 불합리하다. 설령 잠시 일어났다가 곧 폐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적막하여 소문이 없었으며, 향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였을까. 하나는 어찌 그리 뒤지고 하나는 어찌 그리 앞섰을까. 생각컨대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지는 형세가 반드시 고구려․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마쳤을 것이다. 즉, 눌지왕대는 소수림왕대와 서로 가까우니, 아도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에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자란 것도 진짜 이름이 아니고 지목한 말일 것이다. 마치 양나라 사람이 달마(達摩)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하고 진나라에서 석도안(釋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고 한 것과 같다. 즉 아도가 위태로운 일을 하느라 이름을 숨겨 성명을 말하지 않은 까닭이다. 아마 나라 사람들이 들은 바에 따라 묵호·아도의 두 이름으로써 두 사람을 구분하여 전한 것이다. 더구나 아도의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같다 하였으니 이것으로도 그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고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든 것은 곧 개창의 선후를 예언한 것이나, 두 전(傳)이 다 잘못하였으므로 이제 사천미를 다섯 번째에 실은 것이며, 3천여 개월이란 것도 꼭 다 믿을 수는 없다. 대개 눌지왕 때로부터 (법흥왕) 정미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백여 년이 되므로 1천여 월이라고 하면 거의 비슷하다. 성(姓)을 아(我)라 하고 외자 이름을 칭한 것은 거짓인 듯 하나 자세하지 않다. 또 북위[元魏] 석담시(釋曇始)[혜시(惠始)라고도 한다.]전(傳)을 살펴보면,“담시는 관중(關中)사람으로 출가한 뒤 특이한 행적이 많았다. 진(晉)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6) 태원(太元) 9년(384) 말에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교화를 펴 삼승(三乘)을 가르쳐 곧 귀계(歸戒)하게 하였는데, 대개 이것이 고구려가 불도(佛道)를 듣게 된 시초였다. 의희(義熙, 405-418) 초년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서 삼보(三輔)를 개도(開導)하였다. 담시의 발이 얼굴보다 희어서, 비록 진흙물을 건너도 조금도 젖지 않았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다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한다. 진나라 말기에 삭방(朔方)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을 격파하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이때에 담시도 화(禍)를 만났으나 칼이 해하지 못하니 발발(勃勃)이 탄식하여 널리 사문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가 이에 몰래 산택(山澤)으로 도망하여 두타(頭陁)의 행(行)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 재위 423-452)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관중과 낙양에서 위엄을 떨쳤다. 그때 박릉(博陵)에 최호(崔皓)란 자가 있어 좌도(左道, 도교)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이미 지위가 보(輔)가 되어 탁발도의 신임을 얻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를 설득하기를, ‘불교는 무익하고 민생에 유해하다.’고 하여 폐하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태평(太平, 556-557) 말년에 담시가 바야흐로 탁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온 것을 알고 이에 원회(元會)일에 홀연히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탁발도가 듣고 참(斬)하라고 명하였다. 여러번 참하되 상하지 아니하므로 탁발도가 스스로 그를 참하였으나 역시 상하지 않았다. 북원(北園)에 기르고 있는 호랑이에게 주었더니 역시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탁발도가 크게 부끄럽고 두려워하더니 드디어 지독한 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리었다. 탁발도는 이 허물이 그들 때문이라고 하여 이에 두 집 문족(門族)을 죽이고 국내에 선언하여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담시의 후에 끝난 바는 알 수 없었다. 논하여 말한다. 담시가 태원(太元) 말년에 해동에 왔다가 의희(義熙) 초년에 관중으로 돌아갔다면 이곳에 머무른 것이 10여 년인데, 어찌 동국의 역사에 기록이 없으리오. 담시는 이미 괴이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아도, 묵호자, 난타와 연대와 사적이 서로 같으니, 세 명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그 이름을 바꾼 것으로 의심된다. 찬한다. 금교에 쌓인 눈 아직 녹지 않았고, 계림에 봄빛이 돌아오지 않았을 제, 어여쁘다. 봄의 신은 재주도 많아, 모랑댁(毛郞宅) 매화꽃 먼저 피게 하였네.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 염촉멸신)
原宗興法[距訥祗世一百餘年] 猒髑滅身
新羅本[記法]興大王卽位十四年 小臣異次頓爲法滅身 卽蕭梁普通八年丁未 西竺達摩來金陵之歲也 是年 朗智法師亦始住靈鷲山開法 則大敎興衰 必遠近相感一時 於此可信 元和中 南澗寺沙門一念撰髑香墳禮佛結社文 載此事甚詳 其略曰 昔在法興大王垂拱紫極之殿 俯察扶桑之域 以謂 昔漢明感夢 佛法東流 寡人自登位 願爲蒼生欲造修福滅罪之處 於是朝臣[鄕傳云 工目謁恭等]未測深意 唯遵理國之大義 不從建寺之神略 大王嘆曰 於戱 寡人以不德 丕承大業 上虧陰陽之(造)化 下無黎庶之歡 萬機之暇 留心釋風 誰與爲伴 粤有內養者 姓朴字猒髑[或作異次 或云伊處 方音之別也 譯云猒也 髑頓道覩獨等 皆隨書者之便 乃助辭也 今譯上不譯下 故云猒髑 又猒覩等也] 其父未詳 祖阿珍宗 卽習寶葛文王之子也[新羅官爵凡十七級 其第四曰波珍飡 亦云阿珍飡也 宗其名也 習寶亦名也 羅人凡追封王者 皆稱葛文王 其實史臣亦云未詳 又按金用行撰阿道碑 舍人時年二十六 父吉升 祖功漢 曾祖乞解大王] 挺竹栢而爲質 抱水鏡而爲志 積善曾孫 望宮內之<爪>牙 聖朝忠臣 企河淸之登侍 時年二十二 當充舍人[羅爵有大舍小舍等 蓋下士之秩] 瞻仰龍顔 知情擊目 奏云 臣聞 古人問策蒭蕘 願以危罪啓諮 王曰 非爾所爲 舍人曰 爲國亡身 臣之大節 爲君盡命 民之直義 以謬傳辭 刑臣斬首 則萬民咸伏 不敢違敎 王曰 解肉<秤>軀 將贖一鳥 洒血摧命 自怜七獸 朕意利人 何殺無罪 汝雖作功德 不如避罪 舍人曰 一切難捨 不過身命 然小臣夕死 大敎朝行 佛日再中 聖主長安 王曰 鸞鳳之子 幼有凌霄之心 鴻鵠之兒 生懷截波之勢 爾得如是 可謂大士之行乎 於焉大王權整威儀 風刀東西 霜仗南北 以召<群>臣 乃問 卿等於我欲造精舍 故作留難[鄕傳云 髑<僞>以王命 傳下興工創寺之意 群臣來諫 王乃責怒於髑 刑以僞傳王命] 於是群臣戰戰兢懼 傯侗作誓 指手東西 王喚舍人而詰之 舍人失色 無辭以對 大王忿怒 <勅>令斬之 有司縛到衙下 舍人作誓 獄吏斬之 白乳湧出一丈[鄕傳云 舍人誓曰 大聖法王欲興佛敎 不顧身命 多却結緣 天垂瑞祥 遍示人庶 於是其頭飛出 落於金剛山頂云云] 天四黯黲 斜景爲之晦明 地六震動 雨花爲之飄落 聖人哀戚 沾悲淚於龍衣 冢宰憂傷 流輕汗於蟬冕 甘泉忽渴 魚鼈爭躍 直木先折 猿猱群鳴 春宮連<鑣>之侶 泣血相顧 月庭交袖之朋 斷腸惜別 望柩聞聲 如喪考妣 咸謂子推割股 未足比其苦節 弘演刳腹 詎能方其壯烈 此乃扶丹墀之信力 成阿道之本心 聖者也 遂乃葬北山之西嶺[卽金剛山也 傳云 頭飛落處 因葬其地 今不言何也] 內人哀之 卜勝地造蘭若 名曰刺楸寺 於是家家作禮 必獲世榮 人人行道 當曉法利 眞興大王卽位五年甲子 造大興輪寺[按國史與鄕傳 實法興王十四年丁未始開 二十一年乙卯 大伐天鏡林 始興工 梁棟之材 皆於其林中取足 而階礎石龕皆有之 至眞興王五年甲子 寺成 故云甲子 僧傳云七年誤] 太淸之初 梁使沈湖將舍利 天<嘉>六年 陳使劉思幷僧明觀 奉內經幷次 寺寺星張 塔塔雁行 竪法幢 懸梵<鐘> 龍象釋徒 爲寰中之福田 大小乘法 爲京國之慈雲 他方菩薩出現於世[謂芬皇之陳那 浮石寶蓋 以至洛山五臺等是也] 西域名僧降臨於境 由是倂三韓而爲邦 掩四海而爲家 故書德名於天□
之樹 影神迹於星河之水 豈非三聖威之所致也[謂阿道法興猒髑也] 降有國統惠隆法主孝圓金相郞大統鹿風大書省眞怒波珍喰金嶷等 建舊塋 樹豊碑 元和十二年丁酉八月五日 卽第四十一憲德大王九年也 興輪寺永秀禪師[于時瑜伽諸德 皆稱禪師] 結湊斯塚禮佛之香徒 每月五日 爲魂之妙願 營壇作梵 又鄕傳云 鄕老每當忌旦 設社會於興輪寺 則今月初五 乃舍人捐軀順法之晨也 嗚呼 無是君無是臣 無是臣無是<功> 可謂劉葛魚水 雲龍感會之美歟 法興王旣擧廢立寺 寺成 謝冕旒披方袍 施宮戚爲寺隷[寺隷至今稱王孫 後至太宗王時 宰輔金良圖信向佛法 有二女曰花寶蓮寶 捨身爲此寺婢 又以逆臣毛尺之族沒寺爲隷 二族之裔至今不絶] 主住其寺 躬任弘化 眞興乃繼德重聖 承袞職處九五 威率百僚 號令畢備 因賜額大王興輪寺 前王姓金氏 出家法雲 字法空[僧傳與諸說 亦以王妃出家名法雲 又眞興王爲法雲 又以爲眞興之妃名法雲 頗多疑混] 冊府元龜云 姓募名秦 初興役之乙卯歲 王妃亦創永興寺 慕史氏之遺風 同王落彩爲尼 名妙法 亦住永興寺 有年而終 國史云 建福三十一年 永興寺塑像自壞 未幾 眞興王妃比丘尼卒 按眞興乃法興之姪子 妃思刀夫人朴氏 牟梁里英失角干之女 亦出家爲尼 而非永興寺之創主也 則恐眞字當作法 謂法興之妃巴刁夫人爲尼者之卒也 乃創寺立像之主故也 二興捨位出家 史不書 非經世之訓也 又於大通元年丁未 爲梁帝創寺於熊川州 名大通寺[熊川卽公州也 時屬新羅故也 然恐非丁未也 乃中大通元年己酉歲所創也 始創興輪之丁未 未暇及於他郡立寺也] 讚曰 聖智從來萬世謀 區區輿議謾秋毫 法輪解逐金輪轉 舜日方將佛日高 右原宗 徇義輕生已足驚 天花白乳更多情 俄然一劒身亡後 院院鍾聲動帝京 右猒髑

원종이 불교를 진흥시키고[눌지왕 시대와는 백 여 년 떨어졌다.] 염촉이 몸을 희생하다
「신라본기(新羅本記)」에 법흥대왕(法興大王, 재위 514-540) 즉위 14년(527) 하급관리[小臣]인 이차돈(異次頓)이 불교를 위하여 몸을 바쳤다고 하였으니, (이 해는) 곧 소량(蕭梁) 보통(普通) 8년 정미(527)로 서축(西竺)의 달마(達摩)가 금릉에 왔던 해이다. 이 해에 낭지법사(朗智法師) 또한 처음으로 영축산에 머물면서 불법을 열었으므로, 위대한 가르침의 흥하고 쇠함은 멀던지 가깝던지 간에 반드시 같은 시간에 서로 감응한다는 것을 여기에서 믿을 수 있다. 원화(元和) 연간(806-821)에 남간사의 승려 일념(一念)이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 일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 대강을 말하자면, “옛날 법흥대왕이 자극전에 있을 때에 동방의 지역을 두루 굽어 살피며 말하기를, ‘옛날 한나라의 명제(明帝, 재위 57-75)가 꿈에 감응하여 불법이 동방에 전파되었으니, 나도 즉위로부터 뭇 백성들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를 소멸시키는 곳을 만들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향전에는 공목(工目)․알공(謁恭) 등이라고 하였다.]은 아직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로지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만을 쫒을 뿐, 절을 세우려는 신성한 계획을 따르지 않았다. 대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허! 내가 덕이 없어 왕업을 계승하고도 위로는 음양의 조화를 훼손시키고 아래로는 뭇 백성들의 즐거움이 없어졌기에, 정사를 보는 틈틈이 석가모니의 교화에 마음을 두었건만, 누구와 함께 동반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궁중에서 기른 자가 있었는데, 성은 박이고, 자(字)는 염촉(猒髑)[혹은 이차(異次)라고 쓰거나 이처(伊處)라고 하는데, 방언의 발음이 다른 뿐이지, ‘염(猒)’의 뜻이다. 촉자는 돈(頓)․도(道)․도(覩)․독(獨) 등 모두 쓰는 자의 편리에 따르는데, 조사이다. 여기서 위의 글자만 한역(漢譯)하고 아래의 글자는 해석하지 않았으므로 염촉(猒髑), 또는 염도(猒覩) 등으로 불렀다.]이었다. 그 아버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할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다.[신라의 관작(官爵)은 모두 17급인데, 네 번째를 일컬어 파진찬(波珍飡) 또는 아진찬(阿珍飡)이라 한다. 종(宗)은 그 이름이다. 습보(習寶) 역시 이름이다. 신라인들은 대개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葛文王)이라 칭했는데, 그 실상은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들 역시도 잘 모른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살펴보면 사인(舍人)은 당시 26세였고, 아버지는 길승(吉升)이요,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할아버지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고 하였다.] 대나무와 측백나무 같은 절개로 자질을 삼고, 물과 거울 같은 마음으로 뜻을 삼은 적선가(積善家)의 증손이었는데, 궁궐 내의 측근이자 거룩한 왕조의 충신으로 태평한 시절의 시종이 되고자 하였다. 당년 나이 22세에 사인(舍人)[신라의 벼슬에는 대사(大舍)․소사(小舍) 등이 있는데, 대체로 낮은 벼슬의 등급이다.]에 임용되었는데, 왕의 얼굴을 우러러 보아 눈만 마주쳐도 심정을 헤아리게 되었다.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옛 사람들은 계책을 비천한 이에게도 물었다고 합니다. 죄를 무릅쓰고 여쭙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사인(舍人)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고, 임금을 위해 목숨을 다하는 것은 백성의 바른 의리입니다. 그릇되게 말씀을 전한 죄로 저에게 형을 내려 참수하시면 만백성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살을 베어 저울에 달아 한 마리의 새와 바꾸려 했고, 피를 뿌려 목숨을 끊으며 스스로 일곱 짐승을 불쌍히 여겼다는데, 나는 사람을 이롭게 할 뜻으로써 어찌 죄 없는 자를 죽이겠는가. 너는 비록 공덕을 닦는 것이겠지만 죄를 피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인(舍人)이 말하기를, ‘모든 버리기 어려운 것들 가운데 목숨보다 더 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小臣)이 저녁에 죽더라도 아침에 불법(佛法)이 행해지면, 부처님의 해가 중천에 오르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평온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난새와 봉황의 새끼는 어려서 하늘을 뚫고 나아갈 마음을 가지고, 큰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태어나 바다를 가로지를 기세를 품는다고 하더니, 네가 이와 같아 보살행이라 말 할 만하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대왕은 일부러 위엄있는 모양새를 갖춰 동서로는 바람과 같은 칼을, 남북으로는 서리 같은 병장기를 벌여 놓고서 군신들을 불러 ‘경 등은 내가 절을 짓고자 하는데도 고의로 지체시키고 있는가?’라고 물었다.[『향전(鄕傳)』에는 ‘염촉(猒髑)이 왕명을 사칭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절을 짓고자 하는 뜻을 하달하였더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말렸다. 왕이 이에 염촉에게 크게 노하여 왕명을 거짓으로 전한 죄를 물어 처형하였다.’고 하였다.] 이때 군신들은 전전긍긍하며 황급히 맹서하고 손가락으로 동서를 가리켰다. 왕이 사인(舍人)을 불러 그것을 문책하니 사인(舍人)은 낯빛이 변하며 대답이 없었다. 대왕이 분노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명하니, 관원이 그를 묶어 관아에 이르렀다. 사인(舍人)이 발원하고 소원을 비니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벴는데, 흰 젖과 같은 피가 1장이나 솟아올랐다.[「향전」에는 사인이 ‘대성법왕께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여 제 목숨은 돌보지 않고 끝없이 긴 시간에 걸친 인연을 맺었으니, 하늘에서는 상서로운 징조를 내려 두루 백성들에게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이에 그의 머리가 날아가 금강산(金剛山) 꼭대기에 떨어졌다고 하였다.] 하늘은 사방이 침침해지고 석양의 빛이 어두워 졌으며, 땅이 진동하면서 비가 꽃처럼 나부끼며 떨어졌다. 왕은 애통해하며 눈물로 곤룡포를 적셨고, 재상은 근심하여 조관(蟬冠)에 땀이 배어 흘렀다. 샘물이 갑자기 마르고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어올랐으며, 곧은 나무가 먼저 꺽이고 원숭이들이 무리지어 울었다. 춘궁(春宮, 동궁)에서 재갈을 나란히 했던 동무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았고, 궁의 뜰에서 소매를 맞대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질 듯이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관을 바라보며 곡성을 들으니 부모가 돌아가신 듯하여 모두 말하기를, ‘자추(子推)가 허벅지살을 도려낸 것도 이 아픈 절개에 비할 수 없고,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것도 어찌 이 장렬함에 견주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임금[丹墀]의 신앙심을 도와 아도의 본심을 이룬 것이니 성스러운 사람이구나.’라고 하였다. 마침내 북산의 서쪽 고개[즉, 금강산이다. 전하기로는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에 장사지냈는데, 부인이 그것을 슬퍼하여 좋은 땅을 점쳐 절을 짓고 이름을 자추사라 하였다. 이에 집집마다 불공을 드리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고, 사람마다 도를 행하면 불법의 이익을 깨닫게 되었다. 진흥대왕(眞興大王, 재위 540-576) 즉위 5년 갑자(544)에 대흥륜사(大興輪寺)를 짓고[『국사(國史)』와 『향전(鄕傳)』을 살펴보면, ‘사실 법흥왕 14년 정미(527)에 개시한 뒤 21년 을묘(535)에 천경림을 크게 채벌하면서 공사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는데, 대들보와 서까래의 재목들은 모두 그 숲 속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었고 섬돌과 주춧돌, 석감(石龕)도 모두 그곳에서 취하니, 진흥왕 5년 갑자(544)에 이르러 절이 완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갑자라 한 것이다.’ 『승전(僧傳)』에서 7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태청(太淸, 547-549) 초년에 양나라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舍利)를 가져오고, 천가(天嘉, 560-565) 6년(565)에 진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불경을 받들고 함께 방문했다. 절과 절들은 별과 같이 늘어서있었고, 탑과 탑이 기러기떼처럼 줄지어 있었다. 법당(法堂)을 세우고 범종(梵鐘)을 매다니 학덕이 높은 승려의 무리는 세상의 복전(福田)이 되었고, 대승․소승의 불법은 온 나라를 덮는 자비로운 구름이 되었다.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세상에 출현하시고,[분황사(芬皇寺)의 진나(陳那)와 부석사(浮石寺)의 보개(寶蓋), 낙산사(洛山寺)와 오대산(五臺山) 등에 이르기까지가 이런 것이다.] 서역의 유명한 승려들이 이 땅에 강림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삼한(三韓)을 병합하여 한 나라가 되었고, 사해를 합쳐 한 집안이 되었다. 때문에 덕있는 이름을 천구의 나무에 새기고, 신령스런 행적을 은하수에 그림자로 남기니, 어찌 세 성인의 위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아도(我道), 법흥(法興), 염촉(猒髑)을 말한다.] 훗날 국통(國統) 혜륭(惠隆)과 법주(法主) 효원(孝圓)·김상랑(金相郞), 대통(大統) 녹풍(鹿風)과 대서성(大書省) 진노(眞怒), 파진찬(波珍飡) 김의(金嶷) 등이 옛 무덤을 수축하고 큰 비를 세우니 (이때가) 원화(元和, 806-820) 12년 정유(817) 8월 5일이요, 제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재위 809-826) 9년이었다. 흥륜사(興輪寺) 영수선사(永秀禪師)[이때는 유가의 여러 대덕들을 모두 선사라고 칭하였다.]는 이 무덤에 예불할 향도들을 모아 매월 5일에 혼백의 묘원(妙願)을 위하여 단을 쌓고 범패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향전(鄕傳)』에 이르기를, “향로(鄕老)들이 매번 제삿날 아침에 흥륜사(興輪寺)에서 결사의 모임을 가졌다.”라고 하였는데, 즉 이 달 초닷새가 바로 사인(舍人)이 몸을 바쳐 불법에 귀순한 날이다. 아아! 이러한 임금이 없었다면 이러한 신하가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신하가 없었다면 이러한 공덕이 없었을 것이니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으며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해 만난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법흥왕은 이미 폐지된 것을 일으켜 절을 세웠고, 절이 완성되자 면류관을 버리고 가사를 걸쳤으며, 궁의 친척들을 보시하여 절의 종으로 삼고[이 절의 종들은 지금까지도 왕손이라 칭한다. 후에 태종왕(太宗王, 재위 654-661)대에 이르면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을 믿어 화보(花寶)․연보(蓮寶)라는 두 딸을 보시하여 이 절의 노비로 삼게 하였다. 또한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들도 절의 종으로 삼았으니 이 두 가족의 후손들은 지금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 절의 주지가 되어 몸소 널리 불교를 전하였다. 진흥왕도 이내 덕을 이을 성군이었는데, 왕위를 계승하여 위엄으로 백관을 통솔하였고 호령이 다 갖추어졌으므로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절 이름을 내렸다. 전 왕의 성은 김씨인데, 출가 후에는 법운(法雲)이라 하였으며 자는 법공(法空)이었다.[『승전(僧傳)』과 여러 설에서는 왕비 역시 출가하여 이름을 법운(法雲)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진흥왕도 법운이라 하였고, 진흥왕의 왕비 이름 또한 법운이라 하니 자못 의심스럽고 혼동된 것이 많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따르면,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역사(役事)를 일으키던 을묘년(535)에 왕비 또한 영흥사(永興寺)를 세우고 사씨(史氏, 모례의 동생)의 유풍을 추모하여 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을 묘법(妙法)이라 하고 또한 영흥사(永興寺)에 주석하였으며, 몇 년 후에 죽었다. 『국사(國史)』에는 “건복(建福, 584-633) 31년(614) 영흥사의 흙으로 빚은 상(像)이 스스로 허물어지더니 오래지 않아 진흥왕의 비인 비구니도 죽었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이고, 왕비는 사도부인(思刀夫人) 박씨로 모량리 영실 각간의 딸로서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지만 영흥사의 창건주는 아니다. 즉, 아마도 진(眞)자를 법(法)자로 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법흥왕의 비인 파조부인(巴刁夫人)이 비구니가 되었다가 죽은 것을 말하는 것인데, 절을 짓고 소상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법흥왕과 진흥왕이 임금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한 것을 사서(史書)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교훈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대통(大通, 527-529) 원년 정미(527)에는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웅천주(熊川州)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고 하였다.[웅천은 곧 공주(公州)로, 당시 신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정미년이 아니고 중대통(中大通, 529-534) 원년 기유(529)에 창건되었을 것이다. 처음 흥륜사를 세우던 정미년에는 미처 다른 군에 사찰을 세울 틈이 없었을 것이다.] 찬한다. “성스러운 지혜는 만세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니, 구구한 여론은 가을날 터럭같은 비방일 뿐이네. 법륜(法輪)이 풀리자 금륜(金輪)이 따라서 돌아가고, 태평성대이니 바야흐로 부처의 광명 높아라.” 이상은 원종(을 찬한 것이다). “의를 쫓아 생을 버린 것도 충분히 놀랍거늘, 하늘 꽃과 흰 젖으로 더욱 다정하다. 잠시 한 칼로 몸을 잃은 후에, 절마다 종소리가 왕경에 진동한다.” 이상은 염촉(을 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