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회

팔관회

분류 문학 > 종교 > 불교

기본정보

불교 의례의 한 종류로 본래 육재일(六齋日)에 팔계를 지키던 풍습에서 유래했음.

일반정보

팔관회는 악재를 막기 위해 육재일(六齋日)에 팔계를 지키던 풍습이었다. 그러나 그 성격이 변화하여, 중국 당대(唐代)에는 대규모로 분향과 향화를 행하는 법회가 되었으며 신라, 태봉, 고려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지던 다각적 성격의 의례로 성격이 바뀌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 중국으로 간 자장(慈藏)이 나라를 걱정하자 한 신령스러운 사람이 황룡사에 9층탑을 짓고, 팔관회를 베풀어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입하지 않아 나라가 평안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라를 지키는 한 방편으로 팔관회의 설치를 든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팔관회에 관한 기록이 존재한다. 『삼국사기』 권44 열전4 거칠부(居柒夫)조에서는 거칠부가 젊었을 때 고구려로 정찰을 갔다가 고구려의 법사(法師) 혜량(惠亮)이 불경을 설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서 뵈었는데, 혜량은 거칠부가 다른 나라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그의 신변의 위험을 걱정하여 빨리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거칠부가 장수가 될 것이라고 하며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을 해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이후 거칠부가 관직에 나아가 장수가 되어 진흥왕 12년(551)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할 때 혜량을 다시 만났다. 이때 혜량이 신라로 망명하여 왕은 그를 승통(僧統)으로 삼았으며, 비로소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八關)의 법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 12년(551) 이후에 신라에서 처음으로 팔관회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3년(572)조에서는 “겨울 10월 20일에 전쟁에서 죽은 사졸을 위하여 외사(外寺)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열어 7일만에 마쳤다.(冬十月二十日 爲戰死士卒 設八關筵會於外寺 七日罷)”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에 열린 팔관회는 죽은 장병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조에서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를 베풀었다.(冬十一月 始作八關會)”고 전하여, 궁예가 세운 태봉에서도 팔관회를 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팔관회는 악재를 막기 위해 육재일(六齋日)에 팔계를 지키던 것이 당대(唐代)에는 대규모로 분향과 향화를 행하는 법회로 변화였으며 신라, 태봉, 고려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지던 의례로 성격이 바뀌었다.

팔계는 소승율장의 핵심계인 사미십계(沙彌十戒) 중에서 제8계인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를 포함한 9가지 계를 일컫는 말이다. 그 내용은 ① 살생을 하지 말라, ②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③ 음란한 일을 하지 말라, ④ 거짓말을 하지 말라, ⑤ 술을 마시지 말라, ⑥ 몸에 꽃 장식을 하고 향을 바르지 말라, ⑦ 노래하고 춤추는 풍악놀이를 하지 말고 그런 것 하는데 가서 보고 듣지도 말라, ⑧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라, ⑨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팔계는 매월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을 일컫는 육재일(六齋日)에 지키는 계였다. 팔계재는 인도 전래의 액막이 풍속이 불교의 유입으로 인해서, 재가신도들이 육재일(六齋日)에 모여 하루 동안 출가자들의 계에 근거한 팔계를 수지하는 불교적 포살로 변화한 것이라고 한다.(안지원, 2005)

팔계재(八戒齋)는 중국에서 팔관재(八關齋)라는 용어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 번역어는 중국 남조의 송(宋, 420-478) 효건(孝建) 2년(455)에 저거경성(沮渠京聲)이 경전이름을 『불설팔관재경(佛說八關齋經)』으로 번역하면서부터이다. 팔계(八戒)가 팔관(八關)으로 변한 것은 불교 교리를 중국적 관념으로 이해시키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관(關)은 “금지하는 것”을 뜻하여 그 의미가 계(戒)와 상통한다. 중국에서 팔관재에 대한 사례는 3세기 중엽부터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이 보편화된 것은 남북조시기에 들어와서이다. 그리고 당대(唐代)에 이르러 팔관재의 설행 규모는 대형화되고 재계에서 법회의 성격으로 변화하였다. 팔관재는 “팔관재회”로 일컬어지면서 주현의 고위관리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주현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규모로 설행되었다. 또한 법회를 열고 반승(飯僧)을 하면서 밤새도록 범패(梵唄)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모여 분향과 헌화를 하는 것으로 변화하였으며, 팔관재회는 재액 막기와 위령제로써 행해졌다고 한다.(안지원, 2005)

또 중국의 팔관재회는 한국의 것과 달리 국가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진 예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중국의 팔관재회는 불교적·개인적인 의례로서, 한국처럼 국가 의식이 아니라 대개 사찰 중심의 불사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김종명, 2001)

신라의 팔관회는 팔관재가 화랑의 풍류와 결합하여 신라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안계현, 1956) 신라의 팔관회는 위령제의 성격을 가졌는데, 신라에서는 전륜성왕 교리와 관련된 미륵하생신앙이 강조되어 전륜성왕이 통치하는 용화세계를 구현하는 형식으로 위령제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때 행사의 주체는 화랑집단으로서 각 화랑에 속한 낭도승려가 의례를 이끌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사』 권9 지23 예11 중동팔관회의(仲冬八關會儀)조에서 “4선 악부와 용, 봉, 상(象), 마, 차, 선(船) 등은 다 신라 때 옛 행사였다.”고 했으므로 사선악부(四仙樂部)의 가무는 신라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안지원, 2005)

또 신라의 팔관회는 이승과 저승에서의 행복추구를 위한 방편으로서 공덕을 쌓는 것에 일차적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는 불경에서는 팔계를 지키는 일차적 목적이 불교적 깨달음을 얻는 것에 있었던 것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또한 중국과 달리 신라 팔관회는 정신 수행의 한 부분으로 개최된 예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궁예의 태봉에서도 팔관회를 개최했는데 이러한 태봉의 팔관회에 대해서는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로 자칭하고 자신의 두 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과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이름 지었음을 볼 때, 미륵신앙과 관계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고 하였다.(김종명, 2001)

한편 팔관회가 토착신앙과 관련되었다는 입장에서, 팔관회는 불교적 제전이 아니라 한민족 고유의 하느님 신앙을 위한 제전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고려사절요』에서 팔관(八關)은 천령(天靈)ㆍ오악(五嶽)과 명산(名山)ㆍ대천(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는데, 천령은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고 오악·명산·대천·용신 등에 대한 신앙은 모두가 하느님 신앙의 분화적 신화형태라는 것이다. 하느님 신앙은 일신적인 것이지만 다신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특성을 가지며, 오악·명산·대천·용신 등은 모두 하느님이 지상에서 내려왔을 때의 존재형태로 볼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도광순, 1995)

또한, 고려의 팔관회가 토착신앙과 불교가 결합된 성격을 가진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 태조는 토착신앙을 국가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 팔관회를 이용하였고, 이 때문에 「훈요십조」에서 팔관회는 천신과 오악·명산·대천·용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여 토착신앙을 광범위하게 언급하였다고 한다.(안지원, 2005)

참고문헌

안계현, 1956, 「八關會攷」『東國史學』4.
도광순, 1995, 「八關會와 風流徒」『韓國學報』21.
김종명, 2001, 『한국 중세의 불교의례-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 문학과 지성사.
안지원, 2005,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연등‧팔관회와 제석도량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
皇龍寺九層塔
新羅第二十七善德王卽位五年 貞觀十年丙申 慈藏法師西學 乃於五臺 感文殊授法[詳見本傳] 文殊又云 汝國王是天竺刹利種王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然以山川崎嶮 故人性麤悖 多信邪見 而時或天神降禍 然有多聞比丘 在於國中 是以君臣安泰 萬庶和平矣 言已不現 藏知是大聖變化 泣血而退 經由中國太和池邊 忽有神人出問 胡爲至此 藏答曰 求菩提故 神人禮拜 又問 汝國有何留難 藏曰 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 隣寇縱橫 是爲民梗 神人云 今汝國 以女爲王 有德而無威 故隣國謀之 宜速歸本國 藏問 歸鄕 將何爲利益乎 神曰 皇龍寺護法龍 是吾長子 受梵王之命 來護是寺 歸本國 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更爲我 於京畿南岸 置一精廬 共資予福 予亦報之德矣 言已 遂奉<玉>而獻之 忽隱不現[寺中記云 於終南山圓香禪師處 受建塔因由]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幣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 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干龍春[一云龍樹]幹蠱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滅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 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 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改悔 畢成其塔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臺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幷通度寺戒壇 及太和寺塔 以副池龍之請[太和寺在阿曲縣南 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靈蔭乎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也 何謂也 皇龍丈六 幷九層塔 與眞平王天賜玉帶 遂寢其謀 周有九鼎 楚人不敢北窺 此之類也 讚曰 鬼拱神扶壓帝京 輝煌金碧動飛甍 登臨何啻九韓伏 始覺乾坤特地平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龍寺 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又按國史及寺中古記 眞興王癸酉創寺後 善德王代貞觀十九年乙巳塔初成 三十二孝昭王卽位七年 聖曆元年戊戌六月 霹靂[寺中古記云 聖德王代 誤也 聖德王代 無戊戌] 第三十三聖德王代庚申歲重成 四十八景文王代戊子六月 第二霹靂 同代第三重修 至本朝光宗卽位五年癸丑十月 第三霹靂 <顯>宗十三年辛酉 第四重成 又靖宗二年乙亥 第四霹靂 又文宗甲辰年 第五重成 又<獻>宗末年乙亥 第五霹靂 肅宗丙子 第六重成 又高宗<二十五>年戊戌冬月 西山兵火 塔寺丈六殿宇皆災

황룡사구층탑
신라 제 27대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즉위 5년인 정관(貞觀, 627-649) 10년 병신(636)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서쪽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주는 법을 받아 감응하였다.[자세한 것은 「본전(本傳)」에 전한다.] 문수보살이 또 말하기를, “너희나라 왕은 천축(天竺) 찰리종족(刹利種族)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음이요, 동이(東夷) 공공(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잘못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는 천신(天神)이 재앙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법문(法文)을 많이 들어 아는 승려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민(萬民)이 화평한 것이다.”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사라졌다. 자장(慈藏)은 이것이 바로 대성(大聖)이 변화한 것임을 알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법사가)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가를 지나는데 문득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와서 묻기를,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라고 하니 자장(慈藏)이 대답하기를, “보리(깨달음)를 구하려고 합니다.”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절을 하고 또 묻기를, “그대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라고 하니 자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靺鞨)과 이어졌고 남으로는 왜인(倭人)과 접해있으며, 또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의 적들이 어지러우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으니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이 까닭에 이웃 나라가 침략을 도모하고자 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자장(慈藏)이 묻기를, “고국에 돌아가면 장차 무엇을 하면 이익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말하기를, “황룡사(皇龍寺) 호법룡(護法龍)은 나의 맏아들이다.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 이 절에 와서 호위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고 9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해 질 것이다.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하여 경기(京畿) 남쪽 가에 정사(精舍)를 지어 나의 복을 함께 빌어주면 나 역시 그 은덕을 갚겠다.”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마자 옥을 바치고는 홀연히 형체를 숨겨 나타나지 않았다.[절 기록에는 종남산(終南山) 원향(圓香) 선사의 처소에서 탑 세울 까닭을 받았다고 한다.] 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불상·가사·폐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니, 선덕왕(善德王)이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신하들이 말하기를, “백제로부터 공장(工匠)을 청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보물과 비단으로써 백제에 (공장을) 청하였다. 아비지(阿非知)라는 장인이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이 일을 주관하여 소장(小匠) 2백명을 인솔하였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는 날에 공장(工匠)은 꿈에서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형상을 보았다. 공장(工匠)은 마음 속으로 의심이 나서 일손을 멈추었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고 컴컴해지는 가운데 늙은 승려 한 명과 장사(壯士) 한 명이 금당 문으로부터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승려와 장사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이에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찰주기(刹柱記)」에서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척이고, 그 이하는 1백 83척이다.”라고 하였다. 자장(慈藏)이 오대산(五臺山)에서 얻은 사리 백 낱을 그(황룡사구층탑) 기둥 속과 아울러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태화사(太和寺)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로써 못에 있는 용의 청에 부합하였다.[태화사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蔚州)이니 역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후 천지가 태평해지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이 후에 고려(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삼보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황룡사의 장육존상과 9층탑과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의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이름이니, 드디어 그 모략을 중지하였다. 주(周)나라에 9정(九鼎)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북방을 엿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것이다. 찬한다. “귀신이 부축한 듯 서울을 막아 지키니, 휘황한 금색과 푸른색의 대마루는 날아갈 듯, 올라서 굽어볼 제 9한(九韓)만 항복하랴, 천하라도 평정할 것을 이제야 알겠네.” 또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신라 제 27대에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는데 비록 도리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9한(九韓)이 침노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니 제1층은 일본(日本)이요, 제2층은 중화(中華)요, 제3층은 오월(吳越)이요, 제4층은 탁라(托羅)요, 제5층은 응유(鷹遊)요, 제6층은 말갈(靺鞨)이요, 제7층은 단국(丹國)이요, 제8층은 여적(女狄)이요, 제9층은 예맥(穢貊)이다.”라고 하였다. 또 『국사(國史)』와 절의 고기(古記)를 살펴보면,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계유(553)에 절을 세운 후 선덕왕(善德王) 대인 정관 19년 을사(645)에 탑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제 32대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즉위 7년 성력(聖曆) 원년 무술(698) 6월에 벼락을 맞아[절의 고기에서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때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성덕왕 때는 무술년이 없다.] 제 33대 성덕왕 때의 경신년(720)에 다시 탑을 수축하였으며, 제 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742-765) 때인 무자(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그 임금 때에 세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다. 본조(本朝,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 즉위 5년 계축(953)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아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13년 신유(1021)에 네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으며, 또 정종(靖宗, 재위 1034-1046) 2년 을해(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아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갑진년(1064)에 다섯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다. 또 헌종(獻宗, 재위 1094-1095)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아 숙종(肅宗, 재위 1095-1105) 병자(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으며, 또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25년(1238) 무술 겨울에 서산(西山)의 병화(兵火, 몽고의 침입)로 탑과 장육존상과 절의 전각들이 모두 타버렸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