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월산

남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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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

기본정보

신라의 사찰
위치 :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일반정보

현재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위치한 사찰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남월산(南月山)조의 내용에 따르면 신라 제 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때 중아찬(重阿飡) 김지성(金志誠)이 감산에 있는 장전(莊田)을 희사하여 가족들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그리고 국주대왕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남월산(南月山)조를 보면 감산사가 경주 동남쪽 이십리쯤 되는 곳에 있음을 밝히면서 이 절에 안치되어 있는 두 불상에 새겨진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감산사에는 미륵존상과 미타불상이 있었는데 각각 그 뒷면에 기록이 남아 있었다. 금당의 주존인 미륵존상의 화광(火光) 후면 기록에 의하면 개원(開元) 7년 기미(719) 2월 15일 중아찬(重阿飡, 신라 17관등 가운데 6위)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17관등 가운데 7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감산사(甘山寺)를 세우고 돌미륵 한 구를 정성들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사를 친족인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 17관등 가운데 12위),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 또 서족(庶族) 급막(及漠) 일길찬(一吉飡), 일당(一幢) 살찬(薩飡, 17관등 가운데 8위),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과 함께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머니 초리부인(肖里夫人)이 고인이 되자,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음을 기록하였다. 한편 미타불의 후면 기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한다. 이에 따르면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志全)은 일찍이 상의봉어(尙衣奉御)와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지내며 국주대왕(國主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 고로리(古路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를 위하고,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 감산의 장전(莊田)을 베풀어 가람을 세우고, 거듭 돌미타불 한 구를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지전이 죽은후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위 기록에서 인용된 미륵존상 화광후기와 미타불 화광후기의 원본으로 보이는 유물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국보 제81호인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의 뒷면에 새겨진 조상기(造像記)와 국보 82호인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象)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조상기(造像記)가 그것이다. 이들 조상기의 내용은 구체적인 내용 좀더 자세할 뿐 『삼국유사』남월산조에 소개된 내용과 거의 같다. 따라서 이들 기록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감산사는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때 중아찬인 김지성(혹은 김지전)이 성덕왕 18년(719)에 부모와 가족을 위해 창건한 절이며, 이곳에 미륵존상과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2005, 구문회) 현재 감산사는 폐사되었지만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건물지와 삼층석탑 등은 남아있는데, 이곳은 『삼국유사』 남월산조의 “감산사는 경주의 동남쪽 20리쯤 되는 곳이 있다”라는 설명과 위치가 부합하고 있다.

그런데 감산사의 창건자에 대해서 『삼국유사』 남월산조에서 인용한 미륵존상 화광후면에서는 김지성(金志誠)이라 하였고, 미타불 화광후기에서는 김지전(金志全)이라 하여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창시자에 대한 엇갈림은 현재 남아있는 두 개의 감산사 석조불상들의 조상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창건자의 이름은 다르게 표시되어 있지만, 두 사람의 관등은 똑같이 중아찬이며 구체적인 내용에서 발원자의 아버지, 전처, 후처, 누이의 이름이 모두 같기 때문에 김지성과 김지전을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이름이 달리 새겨진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다. 먼저 신라 시대에는 한자의 음을 빌어 사람들의 이름을 표기한 사례가 많아 동일한 사람이라도 다른 글자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葛城末治, 1935) 이와는 달리 감산사의 불상에 조상기를 새기는 과정에서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지성이 김지전으로 이름을 개명했다고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이병도, 1956) 여기서 더 나아가 왕명(王命)에 의해 김지성이 김지전으로 개명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먼저 새겨진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상기에는 김지성이란 이름이 그대로 들어갔지만, 이 과정을 지켜보던 왕이 기특히 여기고 김지성에게 김지전이란 이름을 하사하자 그 다음으로 조성된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의 조상기에는 김지성 대신 김지전이란 이름이 들어갔다고 본 것이다.(최완수, 2000) 한편 김지성과 김지전이 동일인물이 아니라 형제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유사』의 조선 중종 임신본을 비롯한 목판본에 남월산조를 보면, 뒤쪽의 미타불 화광후기의 김지전은 그대로 명기되어 있지만, 앞쪽의 미륵불 화광후기 인용부분에서는 중아찬 김지성이라 되어 있지 않고, 중아찬 전망성(全忘誠)으로 표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 부분은 김지성(金志誠)의 오각으로 보는데 이를 “중아찬 전(全, 김지전)이 성(誠, 김지성)을 잃고서”로 번역하여 두 사람이 형제라고 이해한 것이다.(윤철중, 2002)

감산사지에 대한 조사는 1915년 조선 총독부의 경주 지방 고적을 정비할 때 처음 실시되었다. 이때 경북 경주시 내동면 신계리의 논(현재 외동읍 괘릉리)에 박혀있던 석조 불상을 발견하여 이를 경복궁으로 옮겼다.(朝鮮總督府, 1923) 1929년에는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가 현지조사를 수행하여 감산사지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와 실측을 하였다.(藤島亥治郞, 1963) 1965년 감산사지는 신라 오악조사의 일환으로 진홍섭 등에 의해 다시 한번 조사되었는데, 이 때 감산사지 삼층석탑(甘山寺址 三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5호)이 복원되었다.(진홍섭, 1965) 2001년에는 감산사 법당 신축을 위한 중앙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나말여초의 유구로 보이는 1차 건물지와 고려시대 유구로 추정되는 2차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또한, 건물지 내부에서는 초석 3기가 확인되었고, 내부에는 불상대좌로 보이는 적석시설이 발견되었다. 이 적석시설은 1930년에 후지시마 가이지로의 실측도에 그려진 비로자나불의 위치와 같은 곳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중앙문화재연구원 편, 2001)

현재 감산사지에는 8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화재자료 제 95호인 감산사지 삼층석탑, 그리고 유형문화재 제 318호인 감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甘山寺石造毘盧舍那佛坐像), 그리고 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감산사지 석등재(甘山寺址 石燈材) 등이 남아있다.

감산사지 삼층석탑은 신라 중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약 3.3m이다. 넘어져 훼손되어 있던 것을 1965년에 감산사 금당 뒤에 다시 세웠다. 현재 2・3층은 옥개석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노반(露盤)만 남아있지만, 신라 중대의 석탑 양식임은 알아볼 수 있다. 이 삼층 석탑은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5호로 지정되어 있다.

감산사 석조비로자나불상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전체높이 100㎝, 머리높이 30㎝, 어깨너비 55㎝, 무릎너비 80㎝, 무릎높이 30㎝이다. 어깨가 견실하고 무릎의 폭이 넓으며 결가부좌하고 있다. 머리는 깨어진 상태로 마모가 심하지만 육계가 있고 머리카락은 나발이다. 두 손은 지권인(智拳印)을 맺고 있다. 이 불상은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8호로 지정되어 있다.(경상북도 편, 2003)

감산사지 석등재는 방형인 하대하석과 연화석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연화대석의 간주석 받침은 각혁의 3단인데 팔각으로 구성되었다. 간공은 너비 230mm, 깊이 115mm이며 간주석의 너비가 대략 400mm로 경주 일원의 석등과 비교하면 약간 큰 편이다. 이와 같은 특징으로 보아 감산사에서 나온 2구의 석조 불상조성 시기(719)보다는 떨어진 9세기로 추정되어진다.(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현재 감산사 터에는 2001년 신축한 법당이 세워져 감산사 석조비로자나불상을 모시고 있고, 요사채가 자리 잡고 있다.

한편 191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곳에서 발견된 국보 제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국보 제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전시되어 있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 1923, 『朝鮮金石總覽』下, 朝鮮總督府.
葛城末治, 1935, 『朝鮮金石攷』, 大阪屋號書店.
이병도, 1956, 『譯註 三國遺事』, 동국문화사.
藤島亥治郞, 1963, 『朝鮮建築史論』.
진홍섭, 1965,「慶州 甘山寺址・崇福寺址의 調査」『考古美術』58, 한국미술사학회.
국립문화재 연구소, 1999, 『石燈調査報告書』I, 국립문화재 연구소.
최완수, 2000, 「한국 최고의 고혹미 감산사 석조미륵불보살」『신동아』493.
중앙문화재연구원 편, 2001, 『경주 감산사 법당지』, 중앙문화재연구원.
윤철중, 2002, 「南月山 甘山寺 설화의 東海攸友邊에 대하여」『자하어문논집』17, 상명어문학회.
경상북도 편, 2003, 『文化財大觀』IV·V, 경상북도.
구문회, 2005, 「감산사 미륵보살상・아미타불상 조상기를 통해 본 7-8세기 신라 귀족의 삶-김지성의 일생과 사회적 배경을 중심으로」『생활문물연구』17, 국립민속박물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남월산)
南月山[亦名甘山寺]
寺在京城東南二十許里 金堂主彌勒尊像火光後記云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 重阿<飡><金><志>誠 爲亡考仁章一吉干 亡妃觀肖里夫人 敬造甘山寺一所石彌勒一軀 兼及愷元伊飡 <弟>懇誠小舍 玄度師 姊古巴里 前妻古老里 後妻阿好里 兼庶族及漠一吉<飡> 一幢薩<飡> 聰敏<大>舍 妹首肹買等 同營玆善 亡妣肖里夫人 古人成之 東海攸友邊散也[古人成之以下 文未詳其意 但存古文而已 下同] 彌陁佛火光後記云 重阿<飡>金志全 曾以尙衣奉御 又執事侍郞 年六十七致仕閑居 奉爲國主大王 伊<飡>愷元 亡考仁章一吉干 亡妃亡弟小舍梁誠 沙門玄度 亡妻古路里 亡妹古巴里 又爲妻阿好里等 捨甘山莊田 建伽藍 仍造石彌陁一軀 奉爲亡考仁章一吉干 古人成之 東海攸反邊散也[按帝系 金愷元乃太宗春秋之<第>六子愷元角干 乃文熙之所生也 <金>志全乃仁章一吉干之子 東海攸反恐法敏葬東海也]

남월산[또는 감산사라고도 한다.]
이 절은 서울(경주) 동남쪽 이십리쯤 되는 곳에 있다. 금당(金堂)의 주존인 미륵존상(彌勒尊像)의 화광(火光) 후면 기록에 이르길, “개원 7년 기미(719) 2월 15일 중아찬(重阿飡, 신라 17관등 가운데 6위)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17관등 가운데 7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감산사(甘山寺) 한 채와 돌미륵 한 구를 정성들여 조성하였다. 아울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 17관등 가운데 12위),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 또 서족(庶族) 급막(及漠) 일길찬(一吉飡), 일당(一幢) 살찬(薩飡, 17관등 가운데 8위),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을 위해 같이 이 선한 일을 경영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 초리부인(肖里夫人)이 고인이 되자,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다.” [고인성지 이하는 글 뜻을 잘 알 수 없으나, 다만 고문을 남겨둘 뿐이다. 아래도 같다.] 미타불 화광후면 기록에 이르길,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志全)은 일찍이 상의봉어(尙衣奉御)와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지내며 국주대왕(國主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아내 고로리(古路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를 위하고,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 감산의 장전(莊田)을 베풀어 가람을 세우고, 거듭 돌미타불 한 구를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했다.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다.” [제계(帝系)를 살펴보면 김개원은 태종춘주의 여섯째 아들 개원(愷元) 각간(角干)이다. 이는 문희의 소생이다. 김지전은 곧 인장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반(東海攸反)은 아마도 법민(法敏, 문무왕)을 장사지낸 동해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