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

분류 문학 > 종교 >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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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

기본정보

신라 경문왕(景文王) 12년(872)에 황룡사탑을 중수하면서, 황룡사 구층목탑의 초석 중앙 심초석(心礎石)의 사리공(舍利孔) 안에 봉안한 사리내함(舍利內函)의 3면 내외에 새긴 기록

일반정보

경주시(慶州市) 구황동(九黃洞) 황룡사 구층목탑지(九層木塔址)의 초석 중앙 심초석(心礎石)에 시설된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출토된 사리내함(舍利內函)의 3면 내외에 새겨진 기록으로, 경문왕(景文王) 12년(872)에 황룡사탑을 중수하면서 창건시의 봉안 유물을 확인하고, 유물을 추가 봉안하여 내함을 만들어 넣으면서 탑과 관련된 기사를 남긴 것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조에는 구층탑의 규모에 대해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刹柱記云 鐵盤已上 高四十二尺 已下 一百八十三尺)이라고,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는 경주시(慶州市) 구황동(九黃洞) 황룡사 구층목탑지(九層木塔址)의 초석 중앙 심초석(心礎石)에 시설된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출토되었다. 황룡사탑의 사리장치는 1964년 12월 17일에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었다가 1966년에 회수되었다. 회수와 함께 사리공에 대한 현장 조사가 실시되고, 이후 1976년부터 1983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졌다.(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4)

사리공(舍利孔)은 정방형으로 1변 30cm, 높이 27.5cm이며, 그 안에 봉안되었던 사리내함(舍利內函)은 가로 23.5cm, 세로 22.5cm로, 전면의 문비(門扉) 내외(內外)에는 신장상을 새기고, 3면은 내외에 찰주본기(刹柱本記)를 새겼다. 이 찰주본기(刹柱本記)는 경문왕(景文王) 12년(872)에 황룡사탑을 중수하면서 창건시의 봉안 유물을 확인하고, 유물을 추가 봉안하여 내함을 만들어 넣으면서 탑과 관련된 연월(年月) 기사를 남긴 것이다.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제 48대 경문왕 8년(868) 여름 6월조에 “황룡사탑에 벼락이 쳤다(震皇龍寺塔)”는 기록이 있고, 11년(871) 봄 정월조에 “왕이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황룡사탑을 고쳐 만들게 하였다.(王命有司 改造皇龍寺塔)”는 기록이 있으며, 13년(873) 가을 9월조에는 “황룡사탑이 완성되었는데 9층으로 높이가 22장(丈)이었다.(皇龍寺塔成 九層高二十二丈)”는 기록이 있어, 황룡사탑의 중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찰주본기는 전면의 문비(門扉) 내외(內外)를 제외한 3면 판의 내면과 외면 모두 6면에 쌍구체(雙鉤體)로 음각되었다. 사리함(舍利函)은 하단부가 침식되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현재 하단 한두자 씩이 판독되지 않는다. 내면은 1면 13-14행, 외면은 1면 10행으로 합 74행이며, 1행에 15자씩 새겼다. 현재 해독할 수 있는 글자는 900여 자이다. 글자 크기는 내면이 1cm, 외면이 0.8cm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정병삼, 1992)

찰주본기의 내면에는 본문(本文)이 있고, 외면에는 성전(成典)과 관련 도속(道俗)의 인명을 나열한 부속문(附屬文)이 있다. 먼저 본문(本文)의 제1판 초두에는 이 기명(記銘)의 제목이 있고, 그 찬자인 박거물(朴居勿)의 관직이 시독(侍讀) 우군대감(右軍大監) 겸(兼) 성공(省公)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신라 경문왕(景文王)대를 전후하여 문장가로서 활약하였다.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당(唐)에 유학하여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듯 하고, 귀국한 후에는 한림대(翰林臺)·숭문대(崇文臺) 등 주로 문한기구(文翰機構)에서 활약하였다.

이어서 황룡사탑의 창건(創建)에 대한 기사를 적었는데, 탑의 건립 시기를 선덕여왕대라고 하였으며, 다음에 자장(慈藏)의 신분과 그의 출가 동기 및 법호(法號), 그리고 그가 입당(入唐)한 연대를 적고 있다. 그의 입당 연대에 대하여 찰주본기에서는 선덕대왕이 즉위한 지 7년째 되는 당나라 정관(貞觀) 12년, 우리나라 인평(仁平) 5년 무술년(638)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 및 권4 의해5 자장정률조에는 정관 10년 병신(636년)에 자장이 입당하였다고 하여, 2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음에는 자장이 선덕왕 12년 계묘(643)에 신라에 돌아오고자 하여 종남산(終南山)의 원향선사(圓香禪師)를 찾아가 그로부터 탑 건립의 위촉을 받은 사실이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이때 원향이 말한 내용은 “내가 관심(觀心)으로 그대의 나라를 보매, 황룡사에 9층의 탑을 세우면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라고 한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신라에 돌아와 나라에 알리니, 왕은 이간(伊干) 용수(龍樹)를 감군(監君)으로 하여 대장(大匠)인 백제의 아비(阿非) 등과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이 탑을 만들도록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서는 자장이 탑 건립의 위촉을 신인(神人)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는데, 찰주본기에서는 종남산의 원향선사에게서 위촉받았다고 하여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종교적인 윤색이 있고, 후자가 사료적 가치가 더 있으므로, 구층탑의 건립에는 중국불교의 영향이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김상현, 1992)

제2판에 보이는 본문(本文)은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 14년 3월조의 “황룡사탑을 창건하였는데, 이는 자장(慈藏)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創造皇龍寺塔 從慈藏之請也)”라는 기록과 일치하는 찰주의 건립과 완공 연대를 담고 있다. 곧, 선덕왕 14년 을사년(645)에 처음 건립하기 시작하여 4월에 찰주(刹柱)를 세우고 이듬해에 모두 마쳤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두 사료 사이에는 3월과 4월의 1개월 차이가 있다. 이어 완공된 탑의 높이를 적었으니, 철반(鐵盤) 이상은 높이가 7보이고 그 이하는 높이가 30보 3자라고 하였다. 앞서 살펴본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조에 찰주기(刹柱記)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라고 하였으니, 척과 보의 단위가 다를 뿐 그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 이어 “과연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군신이 안락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에 힘입은 것이다.”라고 기록한 것은, 탑 건립의 발원이 삼국통일의 태동을 배경으로 하여 신라의 거국적인 염원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고 한다.(황수영, 1974)

그후 190여 년을 지나 문성왕대(文聖王代)에 이르러 탑이 동북쪽으로 기울어지자, 나라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여 고쳐 세우고자 하여 여러 재목을 모은지 30여 년이 지나도 아직 고쳐 세우지 못하였는데, 지금의 왕(경문왕)이 즉위한 지 11년인 함통(咸通) 신묘년(871)에 이르러 마침내 왕의 친동생인 상재상(上宰相) 이간(伊干) 김위홍(金魏弘)이 책임자가 되고 사주(寺主) 혜흥(惠興) 등 도속(道俗)의 힘을 모아 그해 8월 12일에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만들도록 하였다고 한다.

제3판에 새겨진 본문(本文)은 경문왕대의 중수(重修) 때 사리장치의 품목(品目)에서 비롯하고 있다. 『무구정경(無垢淨經)』에 의거하여 작은 석탑 99개를 안치하였으며, 그 각각의 석탑마다 사리 1매와 다라니 4종을 넣었으며, 또 경전 1권을 넣어서 그 위에 사리 1구를 안치하였는데, 철반(鐵盤)의 위에 넣었고, 이듬해(경문왕 12년, 872) 7월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때 찰주가 움직이지 않자, 왕께서 찰주에 본래 봉안한 사리가 어떠한지 염려하여 이간(伊干)인 승지(承旨)에게 임진년(872) 11월 6일에 여러 신하를 이끌고 가보도록 하였다. 기둥을 들게 하고 보았더니 주초(柱礎)의 구덩이 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고좌(高座)가 있고 그 위에 사리가 든 유리병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 물건은 불가사의하나 다만 날짜와 사유를 적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25일에 본래대로 해두고 다시 사리 100매와 법사리 2종을 더 봉안하였으며, 아울러 사유(事由)를 적고 창건한 근원과 고쳐 세운 연고를 간단히 기록하여, 만겁(萬劫)이 지나도록 후세의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하였다고 한다.

끝에는 함통(咸通) 13년 임진년(872) 11월 25일에 적었다는 것과, 요극일(姚克一)이 왕명을 받들어 글을 썼다는 내용이 있다. 이때 그의 관직은 숭문대랑(崇文臺郞) 겸(兼) 춘궁(春宮) 중사성(中事省)이었다. 『삼국사기』 권48 열전8 김생(金生)조에 의하면, “요극일(姚克一)은 벼슬이 시중(侍中) 겸(兼) 시서학사(侍書學士)에 이르렀는데 필력에 힘이 있었고 구양(歐陽)의 솔경법(率更法)을 터득하였다. 비록 글씨는 김생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또한 뛰어난 솜씨였다.(姚克一者 仕至侍中兼侍書學士 筆力勁 得歐陽率更法 雖不及金生 亦奇品也)”고 하여, 당나라 구양순체를 습득하였으며, 필력이 힘찼다고 하고 있다. 그는 경문왕(景文王) 12년(872) 8월 14일에 만들어진 전남 곡성(谷城)의 「대안사적인선사탑비문(大安寺寂忍禪師塔碑文」도 썼으며, 당시의 관직은 중사인(中舍人)이었다.

찬자인 박거물(朴居勿)과 글씨를 쓴 요극일(姚克一)은 당대의 문장(文章)과 서예의 명인(名人)이 결합한 것이니,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8 백제본기6 마지막 부분의 사론(史論)에서, “신라의 박사(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지은 김유신비(金庾信碑) 및 박거물(朴居勿)이 짓고 요극일(姚克一)이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에 보인다(見新羅博士薛因宣撰金庾信碑 及朴居勿撰姚克一書三郞寺碑文)”는 기록을 통해, 이들은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도 함께 짓고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본문(本文) 3매 이외에 각 면의 바깥에는 경문왕대(景文王代) 탑 중수(重修)에 관여한 도속(道俗)의 인명(人名)과 그들의 관직명이 기록된 부속문(附屬文)이 있다. 그 첫머리에는 “성전(成典)”이라 하였다.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중심사찰인 황룡사의 성전(成典)이 역사 기록에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황룡사성전(皇龍寺成典)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어 도감전(道監典. 탑 불사에 관여한 승려), 속감전(俗監典, 탑 불사에 관여한 세속인), 당사대유나(當寺大維那)와 유나(維那) 밑에 각기 6명과 16명이 차례로 나열되고 있는데, 3판에 걸쳐서 총 56명의 인명(人名)이 기록되었다.

이 사리공 안에서 출토되었다는 사리 외함(外函)은 가로 29.8cm, 세로 24.5cm(현존)로 4면에 신장상(神將像) 2구씩을 새겼는데, 이 사리구(舍利具)는 선덕여왕대인 황룡사탑 창건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경문왕 중수 때의 것으로 생각되는 지름 9.2cm, 높이 3.5cm의 대좌와 지름 7.0cm, 높이 3.1cm의 옥개로 이루어진 은제사리탑(銀製舍利塔), 대좌와 옥개 및 탑신부로 이루어진 신라말 제작 추정의 금동팔각사리탑(金銅八角舍利塔), 배형은기(杯形銀器), 은제소원반(銀製小圓盤), 청동소원통(靑銅小圓筒) 등 여러 유물들이 함께 수습되었다. 그러나 도굴된 후 수습된 이들 유물 중에는 중화삼년명(中和三年(883)銘) 사리기(舍利器)와 같이 황룡사와 관련이 없는 유물도 있으므로, 함께 수습된 유물들이 모두 황룡사구층목탑 심초석에서 나온 유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황수영, 1974)

참고문헌

황수영, 1974, 「新羅 皇龍寺 九層木塔 刹柱本記와 그 舍利具」『韓國의 佛敎美術』, 동화출판공사.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4, 『皇龍寺 遺蹟發掘調査報告書』Ⅰ,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정병삼, 1992, 「皇龍寺九層木塔舍利函器」『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김상현, 1992, 「皇龍寺九層塔考」『中齋 張忠植博士 華甲紀念論叢 上 歷史學篇』, 단국대학교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
皇龍寺九層塔
新羅第二十七善德王卽位五年 貞觀十年丙申 慈藏法師西學 乃於五臺 感文殊授法[詳見本傳] 文殊又云 汝國王是天竺刹利種王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然以山川崎嶮 故人性麤悖 多信邪見 而時或天神降禍 然有多聞比丘 在於國中 是以君臣安泰 萬庶和平矣 言已不現 藏知是大聖變化 泣血而退 經由中國太和池邊 忽有神人出問 胡爲至此 藏答曰 求菩提故 神人禮拜 又問 汝國有何留難 藏曰 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 隣寇縱橫 是爲民梗 神人云 今汝國 以女爲王 有德而無威 故隣國謀之 宜速歸本國 藏問 歸鄕 將何爲利益乎 神曰 皇龍寺護法龍 是吾長子 受梵王之命 來護是寺 歸本國 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更爲我 於京畿南岸 置一精廬 共資予福 予亦報之德矣 言已 遂奉<玉>而獻之 忽隱不現[寺中記云 於終南山圓香禪師處 受建塔因由]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幣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 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干龍春[一云龍樹]幹蠱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滅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 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 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改悔 畢成其塔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臺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幷通度寺戒壇 及太和寺塔 以副池龍之請[太和寺在阿曲縣南 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靈蔭乎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也 何謂也 皇龍丈六 幷九層塔 與眞平王天賜玉帶 遂寢其謀 周有九鼎 楚人不敢北窺 此之類也 讚曰 鬼拱神扶壓帝京 輝煌金碧動飛甍 登臨何啻九韓伏 始覺乾坤特地平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龍寺 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又按國史及寺中古記 眞興王癸酉創寺後 善德王代貞觀十九年乙巳塔初成 三十二孝昭王卽位七年 聖曆元年戊戌六月 霹靂[寺中古記云 聖德王代 誤也 聖德王代 無戊戌] 第三十三聖德王代庚申歲重成 四十八景文王代戊子六月 第二霹靂 同代第三重修 至本朝光宗卽位五年癸丑十月 第三霹靂 <顯>宗十三年辛酉 第四重成 又靖宗二年乙亥 第四霹靂 又文宗甲辰年 第五重成 又<獻>宗末年乙亥 第五霹靂 肅宗丙子 第六重成 又高宗<二十五>年戊戌冬月 西山兵火 塔寺丈六殿宇皆災

황룡사구층탑
신라 제 27대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즉위 5년인 정관(貞觀, 627-649) 10년 병신(636)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서쪽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주는 법을 받아 감응하였다.[자세한 것은 「본전(本傳)」에 전한다.] 문수보살이 또 말하기를, “너희나라 왕은 천축(天竺) 찰리종족(刹利種族)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음이요, 동이(東夷) 공공(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잘못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는 천신(天神)이 재앙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법문(法文)을 많이 들어 아는 승려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민(萬民)이 화평한 것이다.”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사라졌다. 자장(慈藏)은 이것이 바로 대성(大聖)이 변화한 것임을 알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법사가)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가를 지나는데 문득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와서 묻기를,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라고 하니 자장(慈藏)이 대답하기를, “보리(깨달음)를 구하려고 합니다.”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절을 하고 또 묻기를, “그대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라고 하니 자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靺鞨)과 이어졌고 남으로는 왜인(倭人)과 접해있으며, 또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의 적들이 어지러우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으니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이 까닭에 이웃 나라가 침략을 도모하고자 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자장(慈藏)이 묻기를, “고국에 돌아가면 장차 무엇을 하면 이익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말하기를, “황룡사(皇龍寺) 호법룡(護法龍)은 나의 맏아들이다.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 이 절에 와서 호위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고 9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해 질 것이다.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하여 경기(京畿) 남쪽 가에 정사(精舍)를 지어 나의 복을 함께 빌어주면 나 역시 그 은덕을 갚겠다.”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마자 옥을 바치고는 홀연히 형체를 숨겨 나타나지 않았다.[절 기록에는 종남산(終南山) 원향(圓香) 선사의 처소에서 탑 세울 까닭을 받았다고 한다.] 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불상·가사·폐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니, 선덕왕(善德王)이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신하들이 말하기를, “백제로부터 공장(工匠)을 청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보물과 비단으로써 백제에 (공장을) 청하였다. 아비지(阿非知)라는 장인이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이 일을 주관하여 소장(小匠) 2백명을 인솔하였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는 날에 공장(工匠)은 꿈에서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형상을 보았다. 공장(工匠)은 마음 속으로 의심이 나서 일손을 멈추었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고 컴컴해지는 가운데 늙은 승려 한 명과 장사(壯士) 한 명이 금당 문으로부터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승려와 장사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이에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찰주기(刹柱記)」에서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척이고, 그 이하는 1백 83척이다.”라고 하였다. 자장(慈藏)이 오대산(五臺山)에서 얻은 사리 백 낱을 그(황룡사구층탑) 기둥 속과 아울러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태화사(太和寺)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로써 못에 있는 용의 청에 부합하였다.[태화사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蔚州)이니 역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후 천지가 태평해지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이 후에 고려(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삼보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황룡사의 장육존상과 9층탑과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의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이름이니, 드디어 그 모략을 중지하였다. 주(周)나라에 9정(九鼎)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북방을 엿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것이다. 찬한다. “귀신이 부축한 듯 서울을 막아 지키니, 휘황한 금색과 푸른색의 대마루는 날아갈 듯, 올라서 굽어볼 제 9한(九韓)만 항복하랴, 천하라도 평정할 것을 이제야 알겠네.” 또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신라 제 27대에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는데 비록 도리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9한(九韓)이 침노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니 제1층은 일본(日本)이요, 제2층은 중화(中華)요, 제3층은 오월(吳越)이요, 제4층은 탁라(托羅)요, 제5층은 응유(鷹遊)요, 제6층은 말갈(靺鞨)이요, 제7층은 단국(丹國)이요, 제8층은 여적(女狄)이요, 제9층은 예맥(穢貊)이다.”라고 하였다. 또 『국사(國史)』와 절의 고기(古記)를 살펴보면,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계유(553)에 절을 세운 후 선덕왕(善德王) 대인 정관 19년 을사(645)에 탑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제 32대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즉위 7년 성력(聖曆) 원년 무술(698) 6월에 벼락을 맞아[절의 고기에서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때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성덕왕 때는 무술년이 없다.] 제 33대 성덕왕 때의 경신년(720)에 다시 탑을 수축하였으며, 제 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742-765) 때인 무자(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그 임금 때에 세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다. 본조(本朝,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 즉위 5년 계축(953)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아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13년 신유(1021)에 네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으며, 또 정종(靖宗, 재위 1034-1046) 2년 을해(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아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갑진년(1064)에 다섯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다. 또 헌종(獻宗, 재위 1094-1095)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아 숙종(肅宗, 재위 1095-1105) 병자(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으며, 또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25년(1238) 무술 겨울에 서산(西山)의 병화(兵火, 몽고의 침입)로 탑과 장육존상과 절의 전각들이 모두 타버렸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