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리지

막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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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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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관등으로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다음 취임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막리지가 당의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흥법3 보장봉로보덕이암조 세주에서는 『당서(唐書)』를 인용하여 개소문(蓋蘇文)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 했으니,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3년(644)조에서는 당의 사신 상리현장(相里玄獎)과 담판하는 연개소문이 막리지로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권49 열전9 개소문(蓋蘇文)에서는 개소문이 여러 대신과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웠으며,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는데 그 관직은 당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중서령직과 같다고 하였다.

막리지의 명칭은 그 외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구당서』 권5 본기5 고종 하(下) 건봉원년(666)조에는 6월 임인에 막리지 개소문이 죽고 아들 남생이 아버지의 지위를 이었다고 하였으며, 『구당서』 권199 상(上) 열전149 상(上) 동이 고려전에는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고, 『신당서』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전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자치통감』 권196 당기(唐紀)12 정관(貞觀) 16년(642) 11월조에서도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과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막리지는 여러 기록에서 보인다.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의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에서는 남생의 증조부인 자유(子遊)와 조부인 태조(太祚)가 모두 막리지를 지냈고 남생 자신도 28세에 막리지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남생의 차남인 헌성(獻誠)의 「천헌성묘지(泉獻誠墓誌)」에서는 헌성의 증조부인 대조(大祚)가 막리지에 임용되고 병권을 장악하였다고 하였다. 그 외에 고구려 혈통으로 당의 장수를 지낸 고자의 「고자묘지(高慈墓誌)」에서는 고자의 증조부 고식(高式)이 2품 막리지에 등용되었다고 하였다.

막리지에 대해서는 이를 관등(官等)으로 보는 입장과 관직(官職)으로 보는 입장이 나뉘어져 있다. 먼저 관등으로 보는 입장에서 막리지를 고구려의 최고관등인 대대로와 같은 실체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는 막리지와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 보이는 고구려의 관등명 중 태대형(太大兄)의 다른 명칭인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무관(武官) 중 하나인 대모달(大模達)의 다른 명칭인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가 “マカリ”라는 공통어를 포함한 것으로 보았다. 한어(韓語)의 고훈(古訓)에 의하면 이 “マカリ”는 “바르다(正)” “크다(大)”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막리지는 “마가리지”로서 부(部)의 “대인(大人)”, 또는 “대대로(大對盧)”와 동일한 것으로 비정하였다. 그래서 막리지는 곧 대대로와 본명(本名)·원명(原名)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양자는 실질적으로 동일한 실체라고 하였다.(末松保和, 1954; 이홍직, 1971)

그러나 막리지를 태대형(太大兄)과 동일한 실체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여기서는 「천남생묘지」, 「천남산묘지(泉男産墓誌)」에서 그들이 실제로 막리지 혹은 그 분화·발전형인 태막리지(太莫離支)·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대형으로 기록되었던 사실을 통해 막리지가 곧 태대형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막리지가 연개소문이 정변 이후 종래의 최고위직인 대대로를 공동화(空洞化)시키고 새로운 권력집중의 중추로 삼기 위해 태대형을 활용, 개조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고자묘지」에서 막리지가 2품으로 명기된 사실을 주목하면서, 이를 고자의 아버지인 고문(高文)이 3품 위두대형(位頭大兄) 겸 장군(將軍)이었다는 기록과 대비시켰다. 그리하여 고문이 3품인 위두대형의 관등으로 장군이란 관직을 지낸 것으로 이해하고, 위두대형이 3품 상당의 위계인 것처럼 막리지도 2품 상당의 위계라고 파악하였다. 이를 근거로 막리지는 고구려 관등체계에서 2품에 비정할 수 있는 위계, 곧 관등이었음을 강조하였다.(武田幸男, 1989; 임기환, 2004) 그리고 막리지와 대대로가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관(官)임을 그 취임방법의 차이에서 찾기도 한다. 즉 대대로는 3년을 임기로 귀족들이 상쟁하여 취임함에 반하여, 연개소문가의 예를 보면 막리지는 세습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막리지는 대대로와 같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에 태대대로(太大對盧)와 막리지, 태막리지(太莫離支)를 구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하였다. 특히 「천남생묘지」에 있는 태대대로는 연개소문이 정변 이후 사적 권력 기반을 강화하면서 자신의 집권을 계속 보장하기 위하여 종신직으로 신설한 것으로 보고, 이는 대대로의 주기적인 선출과 이에 따른 귀족세력 간의 세력 조정 체제가 부정된 것을 뜻한다고 하였다.(임기환, 2004) 그 외에 막리지를 태대형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 연개소문이 정변 이후 태막리지(太莫離支) 등 새로운 관위를 마련하여 다수의 귀족들을 제압하고 지방세력을 직접 통제하려는 방식으로 막리지체제가 운영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전경옥, 1996)

막리지를 관등이 아닌 관직으로 보는 입장에서 이를 고구려의 최고관직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대로 및 태대형 등 1-2품의 관등 소지자가 막리지에 취임했는데, 막리지는 고구려 초기의 대보(大輔) 및 좌보(左輔)·우보(右輔), 국상(國相)의 계보를 잇는 6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발생시기는 국상에 대한 기록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4세기초에서 연개소문의 부조(父祖)가 막리지를 역임한 6세기 중엽 이전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리승혁, 1985; 손영종, 1997)

『신당서』 고려전의 기록을 토대로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지위인 동부대인(東部大人) 막리지를 승습(承襲)하려 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막리지는 관직인 아닌 관등으로 같은 시기에 여러 명의 막리지가 있을 수 있으며, 한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은 여러 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이 승습하기 위해 중인(衆人)에게 호소한 대상은 막리지라는 관등이 아닌, 동부대인이라는 직임이라고 하였다.(노태돈, 1999)

막리지를 국왕의 근시직으로서 중리제(中裏制)의 최고위직인 중리태대형(中裏太大兄)으로 보기도 한다. 중리태대형은 2등급 관등인 태대형을 소지한 자가 국왕 측근의 근시업무를 수행하게 될 때 칭하는 관명으로 여기에는 태대형이라는 관등적 속성과 중리직이라는 관직적 성격이 복합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태대형과 결합된 중리직인 중리태대형은 중리 계열의 관제에서는 최고위직이라고 하였다. 특히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의 승진과정이 중리소형(中裏小兄)→중리대형(中裏大兄)→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막리지인 점을 고려하면 막리지를 곧 최고의 중리직인 중리태대형에 비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본래 막리지(중리태대형)는 국왕의 근시직인 중리제의 최고위직으로써 내조(內朝)의 영수일 뿐이었는데 그것이 최고 집권자인 것처럼 인식되어 온 것은, 정변 이후 최고 실력자가 된 연개소문이 복합적인 정치적 의도를 바탕으로 막리지에 취임하여 국정을 전제했던 특수한 사실을, 보편적인 막리지의 기능과 성격으로 확대해석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이문기, 2000) 그리고 「천헌성묘지」에서 남생이 태대막리지를 역임하고, 「천남산묘지」에서 남산이 30세(668)에 태대막리지가 되었다는 기록 등을 근거로 고구려멸망 전야에는 막리지가 막리지-대막리지-태대막리지로 분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즉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후인 644년경 당과의 대립이 가시화되고 당의 침공위협이 높아지자, 보다 효율적인 대비책을 위해 대막리지가 설치되고 막리지였던 연개소문이 취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개소문 사후 666년에는 남생 형제의 분열 이후에 서로가 경쟁적으로 보다 높은 직위에 있음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태대막리지라는 위호가 등장한 것으로 파악하였다.(이문기, 2008)

참고문헌

末松保和, 1954, 「新羅建國考」『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이홍직, 1971, 「淵蓋蘇文에 대한 若干의 存疑」『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리승혁, 1985, 「고구려의 《막리지》에 대하여」『력사과학』 1985-1.
武田幸男, 1989, 「高句麗官位制の史的展開」『高句麗史と東アジア-「廣開土王碑」硏究序說-』, 岩波書店.
전경옥, 1996, 「淵蓋蘇文 執權期의 莫離支體制 硏究」『白山學報』 46.
손영종, 1997, 「중앙 및 지방 관제의 정비강화」『고구려사』 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노태돈, 1999, 「귀족연립정권의 성립」『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이문기, 2000, 「高句麗 莫離支의 官制的 性格과 機能」『白山學報』 55.
임기환, 2004, 「귀족 연립 체제로의 변동, 그리고 멸망」『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이문기, 2008, 「高句麗 滅亡期 政治運營의 變化와 滅亡의 內因」『韓國古代史硏究』 50.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보장봉로보덕이암)
寶藏奉老普德移庵
高麗本記云 麗季武德貞觀間 國人爭奉五斗米敎 唐高祖聞之 遣道士 送天尊像 來講道德經 王與國人聽之 卽第二十七代榮留王卽位七年 武德七年甲申也 明年遣使往唐 求學佛老 唐帝[謂高祖也]許之 及寶藏王卽位[貞觀十六年壬寅也] 亦欲倂興三敎 時寵相蓋蘇文 說王以儒釋並熾而黃冠未盛 特使於唐求道敎 時 普德和尙住盤龍寺 憫左道匹正 國祚危矣 屢諫不聽 乃以神力飛方丈 南移于完山州[今全州也]孤大山而居焉 卽永徽元年庚戌六月也 [又本傳云 乾封二年丁卯三月三日也] 未幾國滅[以<總>章元年戊辰國滅 則計距庚戌十九年矣] 今景福寺有飛來方丈是也云云[已上國史] 眞樂公留詩在堂 文烈公著傳行世 又按唐書云 先是 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有誓曰 必爲寵臣滅彼國矣 及蓋氏擅朝 以盖爲氏 乃以羊皿是之應也 又按高麗古記云 隋煬帝以大業八年壬申 領三十萬兵 渡海來征 十年甲戌十月 高麗王[時第<二>十六代 嬰陽王立二十五年也] 上表乞降 時有一人 密持小弩於懷中 隨持表使 到煬帝舡中 帝奉表讀之 弩發中帝胸 帝將旋師 謂左右曰 朕爲天下之主 親征小國而不利 萬代之所嗤 時右相羊皿奏曰 臣死爲高麗大臣 必滅國 報帝王之讎 帝崩後 生於高麗 十五聰明神武 時 武陽王聞其賢 [國史 榮留王名建武 或云建成 而此云武陽 未詳] 徵入爲臣 自稱姓蓋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 [唐書云 蓋蘇文自謂莫離支 猶中書令 又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序幷注 則蘇文乃職名 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 金奏曰 鼎有三足 國有三敎 臣見國中 唯有儒釋 無道敎 故國危矣 王然之 奏唐請之 太宗遣叙達等道士八人 [國史云 武德八年乙酉 遣使入唐<求>佛老 唐帝許之 據此則羊<皿>自甲戌年死 而托生于此 則才年十餘歲矣 而云寵宰 說王遣請 其年月必有一誤 今兩存] 王喜以佛寺爲道舘 尊道士 坐儒士之上 道士等行鎭國內有名山川 古平壤城勢新月城也 道士等呪勑南河龍 加築爲滿月城 因名龍堰城 作讖曰龍堰堵 且云千年寶藏堵 或鑿破靈石 [俗云都帝嵓 亦云朝天石 盖昔聖帝騎此石 朝上帝故也] 盖金又奏築長城東北西南 時男役女耕 役至十六年乃畢 及寶藏王之世 唐太宗親統 以六軍來征 又不利而還 高宗總章元年戊辰 右相劉仁軌 大將軍李勣 新羅金仁問等 攻破國滅 擒王歸唐 寶藏王庶子<率>四千餘家 投于新羅 [與國史少殊 故幷錄] 大安八年辛未 祐世僧統到孤大山景福寺飛來方丈 禮普聖師之眞 有詩云 涅槃方等敎 傳受自吾師云云 至可惜飛房後 東明古國危 跋云 高麗藏王 <惑>於道敎 不信佛法 師乃飛房 南至此山 後有神人 現於高麗馬嶺 告人云 汝國敗亡無日矣 具如國史 餘具載本傳與僧傳 師有高弟十一人 無上和尙與弟子金趣等 創金洞寺 寂滅義融二師創珍丘寺 智藪創大乘寺 一乘與心正大原等 創大原寺 水淨創維摩寺 四大與契育等 創中臺寺 開原和尙創開原寺 明德創燕口寺 開心與普明亦有傳 皆如本傳 讚曰 釋氏汪洋海不窮 百川儒老盡朝宗 麗王可笑封沮如 不省滄溟徒臥龍

보장왕이 노자를 신봉하고 보덕이 암자를 옮기다.
「고구려본기[高麗本記]」에 이르길 “고구려 말기에 무덕(武德, 618-626), 정관(貞觀, 627-649) 연간에 나라 사람들이 오두미교를 다투어 신봉하였는데, 당(唐) 고조(高祖, 재위 618-626)가 이를 듣고 도사를 보내 천존상을 가져다 주고 가서 도덕경을 강연하게 하였다. 왕이 나라사람들과 함께 들으니 곧 제 27대 영류왕(榮留王, 재위 618-642) 즉위 7년, 무덕 7년 갑신(624)이었다. 이듬해 사신을 당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배우기 청하니 당나라 황제[고조를 말한다.]가 허락하였다. 보장왕(寶藏王, 재위 642-668)이 즉위[정관 16년 임인(642)이다.]하여 또 3교가 함께 흥하려 하니 그때 총애받던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말하길 유교와 불교는 함께 성하나 도교는 성하지 못하니 특별히 당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하자 하였다. 이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사도(邪道)가 정도(正道)에 맞서서 국운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신통력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全州)이다.]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가 살았으니 곧 영휘(永輝, 650-655) 원년 경술(650) 6월이다.[또 「본전(本傳)」에는 건봉(乾封, 666-667) 2년 정묘(667) 3월 3일이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나라가 망하였다.[총장(總章, 668-669) 원년 무진(668)에 나라가 망하였으니 경술년과는 19년 떨어져 있다.] 지금 경복사(景福寺)에 비래방장(飛來方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이상은 『국사(國史)』이다.] 진락공(眞樂公)이 남긴 시가 당(堂)에 남아있고 문열공(文烈公)이 (그의) 전기를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 또 『당서(唐書)』를 살펴보면 “이보다 앞서 수(隋) 양제(煬帝, 재위 604-618)가 요동을 정벌하였을 때 양명(羊皿)이라는 비장이 있었다. 전쟁이 불리하여 장차 죽게 되자, 맹세하기를 ‘반드시 총신이 되어 저 나라를 멸하겠다.’고 하였다. 개씨(蓋氏)가 조정을 어지럽히는데 이르러 개(盖)를 성으로 삼으니 이는 곧 양명(羊皿)이란 이름 글자 두자가 개(盖)란 글자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또 『고려고기(高麗古記)』에 이르길 “수양제가 대업(大業, 605-618) 8년 임신(612)에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왔다. 10년 갑술(614) 10월에 고려왕이[이때가 제 26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 재위 25년(614)이었다.] 글을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이때 어떤 한 사람이 있어 몰래 작은 활을 품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져가는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 안에 이르렀다. 양제가 표문을 들고 읽을 때에 활을 쏘아 황제의 가슴을 맞추었다. 황제가 군사를 돌이키면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인데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익이 없었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하였다. 이때 우상 양명이 아뢰되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죽은 후에 (양명이) 고구려에 태어나 15세에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그때 무양왕(武陽王)[『국사』에 영류왕의 이름이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 하였다 했는데 여기에는 무양이라 하니 잘 알수 없다.]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를 삼았다. 스스로 성을 개, 이름을 금이라 하였는데 지위가 소문에 이르렀으니 곧 시중의 자리이다.[『당서(唐書)』에는 “개소문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 하니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했다. 또『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을 살펴보면,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을 쓰고 주석을 달았다.”라 하였으니 곧 소문(蘇文)이 직명(職名)인 것이 문헌으로 증명되는데, 전(傳)에 이르길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이 서문을 쓰다”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개금이 아뢰길 ‘솥에는 세 발이 있고 나라에는 3교가 있는 것인데, 신이 보아하니 우리나라에는 오직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그렇다 여겨 당나라에 도교를 요청하자 태종(太宗, 재위 626-649)이 서달(叙達) 등 도사 8인을 보냈다. [『국사(國史)』에 이르되 “무덕 8년 을유(625)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구하니 당나라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한다. 이것에 의하면 곧 양명이 갑술년(614)에 죽어 이 땅에 태어났다면 나이가 겨우 10여 세이다. 그러나 총재(寵宰)로써 왕을 설득하여 사신을 보내길 청하였다 하니, 그 연월에서 반드시 하나는 틀린 것이 있을 것이다. 지금 양쪽 기록을 다 남겨둔다.] 왕이 기뻐하여 절을 도관(道舘)으로 삼고 도사를 높여 유사(儒士)보다 위에 있게 하였다. 도사들이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다니면서 진압하였다. 옛 평양성은 모양이 신월성(新月城)이었는데 도사들이 주문으로 남하(南河)의 용에게 명하여 그곳을 더 쌓게 하여 만월성(滿月城)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용언성(龍堰城)이라 이름짓고 참(讖)을 지어 용언도(龍堰堵)라 하고 또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 하기도 하였다. 혹은 영석[세간에 말하길 도제암(都帝嵓)이라 하고 또 조천석(朝天石)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옛날에 성제(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上帝)에게 조회하였기 때문이다.]을 파서 깨뜨리기도 하였다. 개금이 또 아뢰어 동북에서 서남까지 장성을 쌓게 하니, 이때 남자는 그 부역에 나가고 여자는 농사를 지었는데 부역은 16년 후에야 끝났다. 보장왕 때에 이르러 당(唐) 태종(太宗)이 친히 6군을 거느리고 와서 치다가 또 불리하여 돌아갔다. 고종 총장 원년 무진(668)에 우상 유인궤(劉仁軌)와 대장군 이적(李勣)과 신라 김인문(金仁問) 등이 와서 공격하여 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가니, 보장왕의 서자가 4천여 가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고 한다.[『국사』와 조금 다르므로 같이 기록한다.] 대안(大安, 1084-1094) 8년 신미(1091)에 승통 우세(祐世, 의천)가 고대산 경복사 비래방장에 와서, 보덕성사의 진영에 예를 표했다. 시가 있어 가로되 “열반방 등의 교는 우리 성사(聖師)께서 전수하였다...... 애석하구나! 방장을 날려온 후 동명의 옛나라가 위태로워졌구나.”라 하였다. 우세가 발문을 지어 말하길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혹해 불법을 믿지 않으므로 스님께서 방을 날려 남쪽으로 이 산에 이르렀다.” 라고 하였다. 후에 신인이 있어 고구려 마령(馬嶺)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말하길 “너희 나라가 패망할 날이 머지 않았다.” 하였다. 모두 『국사』와 같고 나머지는 본전과『승전(僧傳)』에 다 기재되어 있다. 스님에게는 고명한 제자가 11명 있었다. 무상화상(無上和尙)은 제자 김취(金趣) 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를 세웠고, 적멸(寂滅)과 의융(義融) 두 스님은 진구사(珍丘寺)를 세웠으며,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세웠고, 일승(一乘)과 심정(心正)·대원(大原) 등은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세웠으며,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를 세웠고, 사대(四大)는 계육(契育) 등과 함께 중대사(中臺寺)를 세웠으며, 개원화상(開原和尙)은 개원사(開原寺)를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과 같다. 찬한다. “부처의 도는 넓고 넓어 바다같이 한량없으니, 백 갈래 하천같은 유교와 도교가 모두 조종에 이르도다. 우습다. 고구려왕이 웅덩이만 신봉하고 와룡이 창해로 옮겨감을 몰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