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국

오국

분류 문학 > 제도 > 국호

기본정보

중국 양자강(揚子江) 유역에 있었던 나라 이름

일반정보

오국(吳國)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삼국시대(三國時代),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에 각각 존재했던 나라로 삼국시대의 오국은 229년부터 280년까지, 오대십국시대의 오국은 902년부터 937년까지 존재했다. 이 세 오국 중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와 관련 있는 나라는 고구려와 관계를 맺은 바 있는 손권(孫權)의 오국이다. 『삼국유사』 왕력 자비마립간조에 나오는 오국은 중국 남조(南朝)의 범칭으로 여겨진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왕력의 자비마립간 기사에 따르면 신라는 이때에 오나라와 통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사에서 오나라는 3번 등장한다. 첫째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인 기원전 6세기 초에 진(晉)나라와 연합하여 초(楚)나라에 대적하였던 나라로 이후 월(越)나라와 대적하다가 멸망하였다. 둘째는 위․촉과 함께 삼국(三國)을 형성했던 나라로, 229년 손권이 건국하였으며 280년 진(晉)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4대 52년간 존재하였다. 셋째는 오대십국(五代十國) 중 하나로 회남(淮南)이라고도 하며, 양행밀(楊行密)이 양주(揚州)를 근거로 회수(淮水) 남쪽에서 강동(江東)에 걸친 땅을 확보하고 902년 오왕으로 봉해진 이후 4대 36년간 이어지다가 937년 멸망한 나라이다.

중국에서 3개의 오나라가 존재했던 기간은 모두 자비마립간의 재위 연대인 458~479년과는 시간차가 많이 난다. 또한 신라가 자비마립간대에 처음으로 오국(吳國)과 통교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의 왕력에서만 보이고 『삼국사기』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10년(236)조에 “봄 2월 오나라 왕 손권이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가을 7월에 목을 베어 머리를 위나라로 보냈다(東川王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斬之 傳首於魏)”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고구려와 오나라의 관계 기사이지, 신라와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왕력에 보이는 신라와 오국의 통교기사는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신라 법흥왕대의 불교 전래 관련 기록들에 등장하는 “양나라 사신(梁使)”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인용 『고기(古記)』에는 “오나라 사신(吳使)”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동고승전』의 이러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阿道基羅)조에는 아도화상의 행적에 대한 주에서 “(아도화상은) 또한 『고승전』에서 서축인(西竺人)이라고도 하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유사』 권4 탑상4 삼소관음중생사(三所觀音衆生寺)조에서도 양나라의 사람을 “오인(吳人)”이라 기록하였고, 『삼국유사』 권5 신주6 밀본최사(密本嶊邪)조에도 흥륜사의 “오당(吳堂)”이 보인다.

이렇듯 『삼국유사』에서는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나라를 오나라로 기록한 경우가 종종 확인된다. 따라서 “오(吳)”를 중국 남조(南朝)의 범칭으로 이해하고, 신라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 전해진 불교가 남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신종원, 1992)가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왕력의 자비마립간대 오국 통교기사는 중국 특히 남조와의 교섭 개시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이강래, 2005)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왜 자비마립간대에 남조와 교섭하기 시작했다고 파악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참고문헌

신종원,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이강래, 2005,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왕대력 비교 연구」『韓國史學報』21.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 慈悲麻立干 [金氏 父訥祗 母阿老夫人 一作次老夫人 實聖王之女 戊戌立 治二十一年 妃巴胡葛文王女 一作(未)叱希角干 一作□□角干女 始與吳國通 己未年 倭國兵來侵 始築明活城入避 來圍梁州(二)城 不克而還]
제20 자비마립간 [김씨이다. 아버지는 눌지이고 어머니는 아로부인 혹은 차노부인으로 실성왕의 딸이다. 무술에 즉위하여 21년간 다스렸다. 왕비는 파호갈문왕의 딸인데 혹은 미질희각간이라고도 한다. 또는 □□각간의 딸이라고 한다. 처음으로 오나라와 통교하였다. 기미년에 왜국병이 내침하였다. 비로소 명활성을 지어 들어가 피하니 왜국병이 와서 양주(梁州) 2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