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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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先王)의 영(靈)을 제향하는 종실(宗室)의 가묘(家廟)

일반정보

선왕(先王)의 영(靈)을 제향하는 종실(宗室)의 가묘(家廟)로, 신라(新羅)에서는 대체로 문무왕(文武王) 때에 중국의 예제를 받아들여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전문정보

종묘(宗廟)는 선왕(先王)의 영(靈)을 제향하는 종실(宗室)의 가묘(家廟)이다. 신라의 국가제사 체계는 제도상으로 시조묘(始祖廟)에서 5묘(廟)로, 신궁(神宮)에서 사직(社稷)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된다.(최광식, 1994) 곧, 신라에서는 신궁(神宮) 설치 이후 왕실의 조상제사가 된 시조묘(始祖廟) 제사가 이후 중국의 예제를 수용하면서 5묘제로 그 모습을 정비하였던 것이다.(나희라, 2003)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상)에 의하면, 제사와 관련있는 전사서(典祀署)와 음상서(音聲署)가 진덕왕 5년에 처음 설치되고 있다. 이것은 김춘추의 재당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眞德王)조에 의하면, 김춘추는 진덕왕 원년 12월에 입당하여 다음해 2월까지 당에 머무르면서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기를 청하니 당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또 자기가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신찬(新撰)한 진서(晉書)를 주었으며, 춘추가 또 보장(章服)을 고쳐 당제(唐制)를 좇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에 의복을 내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진덕여왕 2년에 김춘추가 당에서 견문한 것은 그의 귀국 후 신라의 각종 제도 정비에 반영되었다.

김춘추는 즉위와 동시에 아버지 용춘(龍春)을 문흥대왕으로 추봉하고 있다. 이것을 신라 종묘제 수용의 중요한 단서로 보면서, 이때 제후오묘에 적합한 종묘제가 수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곧, 무열왕대에 태조-법흥-진흥-진지-문흥과 같은 시원적인 종묘제가 시행되었으며, 이후 무열왕 사후에 상호(上號)되는 태종 묘호에서 더욱 뚜렷해진다고 한다.(박순교, 1997) 무열왕이 즉위 원년에 아버지인 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추봉한 것을 종묘제를 시행한 시점으로 파악하면서, 그 대상을 태조-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진흥-진지-문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문기, 2000)

그리고 문무왕대에는 종묘에 대한 기사가 처음으로 나온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조에 의하면, “신라별기(新羅別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문무왕 즉위 5년 을축(665) 가을 8월 경자에 왕이 친히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융(扶餘隆)을 만나 단(壇)을 만들고 백마(白馬)를 잡아서 맹세할 때, 먼저 천신(天神)과 산천(山川)의 신령에게 제사지낸 후에 피를 입가에 바르고 글을 지어 맹세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그러므로 금서철계(金書鐵契)를 종묘에 간직해 두니 자손들은 만대에 감히 어기거나 범하지 말 일이다. 신은 이를 들으시고 흠향하고 복을 주소서. 피를 마신 다음에 폐백을 제단의 북쪽에 묻고 맹세의 글을 대묘(大廟)에 보장하니, 이 맹세의 글은 대방도독 유인궤가 지은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5년조에 의하면, “가을 8월에 왕이 칙사 유인원(劉仁願), 웅진도독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웅진(熊津)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약을 맺었다.…그러므로 금서철권(金書鐵券)을 만들어 종묘에 간직하여 자손 만대에 감히 어기지 말지어다. 신이시여, 이 말을 들으시고 흠향하시고 복을 내려 주소서. 이것은 유인궤(劉仁軌)가 지은 글이다. 피를 마신 다음 희생과 예물을 제단의 북쪽 땅에 묻고, 그 글은 우리 종묘에 간직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따르면 문무왕은 5년(665)에 당의 칙사인 유인원(劉仁願)의 주재 하에 웅진도독인 부여융과의 3자 맹서를 하고 그 글을『삼국사기』에서는 종묘에, 『삼국유사』에서는 대묘(大廟)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대묘란 태묘라고도 하고 종묘라고도 한다. 이에 문무왕 무렵에는 종묘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노명호, 1981)

한편,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에 의하면, 문무왕이 가락국의 건국시조인 원군(元君), 곧 수로왕으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세계를 가야국(伽倻國) 원군(元君)…9대손 구형왕(仇衡王)→세종(世宗)→솔우공(率友公)→서운잡간(庶云匝干)→문명황후(文明皇后)→문무왕(文武王)으로 밝히고, 수로왕이 자신의 15대 시조가 된다면서 수로왕묘(首露王廟)를 종조(宗祖)에 합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처럼 문무왕대에는 종묘의 수위에 모셔지는 태조를 인식하고 있었고,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그리고 종묘에 대한 기사가 처음 나오며, 지배체제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문무왕대에 중국식의 제사제도인 종묘제가 수용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문무왕대의 종묘에는 태조대왕과 문무왕의 증조(曾祖)인 진지대왕, 조(祖)인 문흥대왕, 부(父)인 태종대왕의 신위와 함께 가락국의 건국시조인 수로왕의 신위도 모시고 있다고 한다.(채미하, 2008)

태종은 태조에 이어서 왕조에 가장 공덕이 큰 조상에게 올렸던 묘호로, 실질적으로 태조의 정신이 그에게 계승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러한 태종이라는 묘호를 문무왕이 무열왕에게 올렸다는 것은 당시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종묘의 수위(首位)에 모셔지는 태조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태조대왕으로 모셔진 이는 신문왕 2년(682)에 쓰여진 「문무왕릉비」에 보이는 15대조 성한왕(星漢王), 효소왕 3년(694)에 쓰여진「김인문묘비(金仁問墓碑)」 에 나오는 태조한왕(太祖漢王), 희강왕 원년(836)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흥덕왕릉비편(興德王陵碑片)」 에 보이는 태조성한(太祖星漢)으로 볼 수도 있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신문왕 7년조에 의하면, 대신(大臣)을 조묘(祖廟)에 보내 제사를 올렸는데, 왕 아무개는 머리 숙여 재배하고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과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영전에 아뢴다고 하였다. 이는 태조와 신문왕의 직계 4친(親)으로 『예기(禮記)』 권12 왕제편(王帝篇)에 보이는 중국의 종묘제에서 제후 5묘에 해당한다.

중국적 조상제사의 모양새를 갖춘 신라 왕실의 조상제사는 혜공왕대에 와서 다시 한번 변화를 겪게 된다.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조에 의하면, 혜공왕대에 오묘를 처음으로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문왕대에 이미 5묘제사의 모양새를 갖추었음을 보아 이 기록은 정확한 이야기가 아닌데, 왜 “시정오묘(始定五廟)”라 하였을까? 신문왕 때는 태조대왕과 친묘(親廟) 넷으로 오묘(五廟)를 구성하였는데, 혜공왕 때는 미추왕을 김성시조로 하고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을 평정한 대공덕(大功德)으로 불훼지종(不毁之宗)으로 하고 친묘(親廟) 둘을 합하여 5묘를 구성하였다. 두 왕대의 오묘 구성에서 눈에 띠는 것은 우선 미추왕을 김성시조로 하였다는 것이다. 혜공왕대에 미추왕이 김씨의 시조왕으로 추앙되고 그가 시조로 제사되었다는 것은, 왕실의 조상제사에서의 획기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미추왕 제사의 차례를 오릉에서의 혁거세 제사보다 높은 위치에 두어 시조묘로 승격시켰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신라의 조상제사는 다시 한번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지금까지 시조묘로서 위치를 지켜왔던 혁거세릉의 지위가 격하되고 김씨의 시조왕인 미추왕의 능이 시조묘로서의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조묘에 2조(祧)와 2친(親)을 더하여 5묘의 구성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새로이 시조묘가 정해지고 이후 신라 왕실제사에서 시조는 미추왕으로 하는 원칙이 지켜졌으므로 “시정오묘(始定五廟)”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나희라, 2003)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조에 의하면, “즉위년에 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의 2묘를 훼철하고, 시조대왕(始祖大王)·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과 할아버지 흥평대왕(興平大王)·아버지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5묘를 삼았다.(卽位年 毁聖德大王·開聖大王二廟, 以始祖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及祖興平大王·考明德大王爲五廟)”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선왕(先王)인 선덕왕대의 오묘가 시조대왕·태조대왕·문무대왕·성덕대왕·개성대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곧, 하대를 연 선덕왕대에는 오묘구성이 시조대왕과 태종, 문무, 외조인 성덕대왕과 고(考)인 개성대왕(開聖大王)의 묘로 이루어졌으니, 이는 혜공왕대 정해진 오묘구성의 원칙이 지켜진 가운데 단 외조인 성덕대왕이 들어간 것은 비정통인 선덕이 외조를 통해 정통과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혜공왕대 새로이 정해진 오묘구성의 원칙은 원성왕의 증손인 애장왕대에 다시 한번 바뀌게 된다. 그 오묘의 구성은 혜공왕 이래 “세세불훼지종(世世不毁之宗)”으로서 대대로 종묘에서 제사한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두 신주(神主)를 종묘에서 분리시켜 별묘(別廟)를 세워 두고, 애장왕의 직계 존속의 4친묘와 시조대왕으로 새로이 오묘의 종묘를 구성한 것이다. 이는 별묘를 제외하면 시조묘와 4친묘로 오묘를 구성하여 제후 오묘제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별묘의 존재로 천자 7묘와의 근접성을 잃지 않은 종묘 구성을 보여준다. 결국 애장왕대에 제후 오묘에 보다 충실한 종묘구성을 시도하였으나, 혜공왕대의 원칙, 즉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주(周)의 문왕과 무왕처럼 위대한 조상으로 계속 제사지낸다는 원칙은 계속 지켰던 것이다.(나희라, 2003)

참고문헌

노명호,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墓」『歷史學硏究』10, 전남대학교 사학회.
최광식, 1994,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박순교, 1997, 「신라 중대 시조존숭 관념의 형성」『韓國 古代의 考古와 歷史』, 학연문화사.
이문기, 2000, 「신라 오묘제의 성립과 그 배경」『韓國 古代史와 考古學 : 鶴山 金廷鶴博士 頌壽紀念論叢』, 학연문화사.
나희라, 2003, 『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
채미하, 2008,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新羅別記云 文<武>王卽位五年乙丑秋八月庚子 王親統大兵 幸熊津城 會假王扶餘隆 作壇 刑白馬而盟 先祀天神及山川之靈 然後歃血爲文而盟曰 往者百濟先王 迷於逆順 不<敦>隣好 不睦親姻 結托句麗 交通倭國 共爲殘暴 侵削新羅 破邑屠城 略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被毒 頻命行人 諭其和好 負險恃遠 悔慢天經 皇赫斯怒 恭行弔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固可瀦宮汚宅 作誡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懷柔伐叛 先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曩冊 故立前百濟王司(稼)正卿扶餘隆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恭承詔命 永爲藩服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 親臨勸諭 具宣成旨 約之以婚姻 申之以盟誓 刑牲歃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兄弟 祗奉綸言 不敢墜失 旣盟之後共保歲寒 若有乖背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陲 神明鑒之 百殃是降 子孫不育 社稷無宗 禋祀磨滅 罔有遺餘 故作金書鐵契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或敢犯 神之聽之 是享是福 歃訖 埋弊帛於壇之壬地 藏盟文於大廟 盟文乃帶方都督劉仁軌作 [按上唐史之文 定方以義慈王及太子隆等送京師 今云 會扶餘王隆 則知唐帝宥隆而遣之 立爲熊津都督也 故盟文明言 以此爲驗] 又古記云 總章元年戊辰 [若總章戊辰 則李勣之事 而下文蘇定方 誤矣 若定方則年號當龍朔二年壬戌 來圍平壤之時也] 國人之所請唐兵 屯于平壤郊 而通書曰 急輪軍資 王會群臣問曰 入於敵國 至唐兵屯所 其勢危矣 所請王師粮匱 而不輪其料 亦不宜也 如何 庾信奏曰 臣等能輸其軍資 請大王無慮 於是庾信仁問等 率數萬人 入句麗境 輸料二萬斛 乃還 王大喜 又欲興師會唐兵 庾信先遣然起兵川等<二>人 問其會期 唐帥蘇定方 紙畵鸞犢二物廻之 國人未解其意 使問於元曉法師 解之曰 速還其兵 謂畵犢畵鸞二切也 於是庾信廻軍 欲渡浿江<令><曰>後渡者斬之 軍士爭先半渡 句麗兵來掠 殺其未渡者 翌日信返追句麗兵 捕殺數萬級 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 知其未免 相謂曰 寧自盡 不死於他人手 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饗唐兵鴆之 皆死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按唐史 不言其所以死 但書云卒何耶 爲復諱之耶 鄕諺之無據耶 若壬戌年高麗之役 羅人殺定方之師 則後總章戊辰 何有請兵滅高麗之事 以此知鄕傳無據 但戊辰滅麗之後 有不臣之事 擅有其地而已 非至殺蘇李二公也].
신라별기에서 말하길, “문무왕 즉위 5년 을축(665) 가을 8월 경자에 왕이 친히 대병을 거느리고 웅진성에 갔다. 가왕 부여융을 만나 단을 만들고 흰말을 잡아서 맹세할 때, 먼저 천신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 뒤에 삽혈하고 글을 지어 맹세하기를, ‘지난번에 백제의 先王이 역리와 순리에 어두워, 이웃과의 우호를 두텁게 하지 않고, 인친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폭한 행동을 하여, 신라를 침해하여 성읍을 파괴하고 무찔러 죽임으로써 조금도 편안한 때가 없었다. 천자는 사물 하나라도 제 곳을 잃음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이 해독 입는 것을 불쌍히 여기어 자주 사신을 보내어 화호하기를 달랬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의 험함과 거리가 먼 것을 믿고 하늘의 법칙을 업신여기므로 황제가 이에 크게 노하여 죄를 묻는 정벌을 삼가 행하니, 깃발이 향하는 곳마다 한번 경계하여 크게 평정하였다. 진실로 그 궁택을 웅덩이로 만들어 자손을 경계하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빼어 후인에게 교훈을 보일 것이나, 복종하는 자를 품고 반란자를 정벌함은 선왕의 명령과 법이고, 망한 것을 흥하게 하고 끊어진 것을 잇게 함은 전대 현인의 통해온 법이며,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함은 모든 옛 서적에 전해온다. 그리하여 전 백제왕 사가정경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고향을 보전케 하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이 되어 각각 묵은 감정을 풀고 우호를 맺어 화친할 것이며, 삼가 조명을 받들어 길이 속방이 되라. 이에 사자 우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어 친히 임하여 권유하고 달래어 내 뜻을 갖추어 선포하니, (그대들은) 혼인을 약속하고 맹서를 아뢰며 희생을 잡아 삽혈을 하고 함께 시종을 두터이 할 것이며, 재앙을 나누고 환란을 구원하여 형제와 같이 은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삼가 조칙을 받들어 감히 잃지 말고, 이미 맹서한 후에는 함께 변하지 않는 지조를 지켜야 할 것이다. 만일 여기에 위배하여 그 덕이 변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신명이 이를 살펴 많은 재앙을 내리어 자손을 기르지 못하게 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제사도 끊어져 남김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계를 지어 종묘에 간직해두니 자손들은 만 대토록 혹 어기거나 범하지 말라. 신이여 이를 듣고 흠향하고 복을 주소서’라고 하였다. 삽혈이 끝난 후 폐백을 제단 북쪽에 묻고 맹서한 글을 대묘에 간직하니, 이 글은 대방도독 유인궤가 지은 것이다.”[위 당사의 글을 보면 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등을 당의 서울에 보냈다고 한다. 여기서는 부여왕 융을 만났다고 하니 당 황제가 융의 죄를 용서하고 놓아 보내어 웅진도독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맹세문에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증거가 된다] 또 고기에 이르기를, “총장 원년 무진(668)[총장 무진이면 이적의 사실이니, 아래 글에 소정방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정방의 일이라면 연호는 용삭 2년 임술(662)에 해당하니 평양에 와서 포위 했을 때의 일이다]에 국인이 청한 당의 원병이 평양 교외에 와서 진을 치고 (신라에) 서신을 보내어, 급히 군사물자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왕이 군신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군의 진영에 간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당군이 군량을 청했는데 그 군량을 보내주지 않는 것도 또한 마땅치 못한 일이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였다. 유신이 아뢰어 말하길, ‘신 등이 능히 그 군수물자를 수송할 것이니 왕은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유신․인문 등이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 2만 곡을 가져다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연합하려고 유신이 먼저 연기․병천 등 두 사람을 보내어 그 만날 시기를 물으니 당장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와 송아지 두 동물을 그려서 보내었다. 국인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원효법사에게 물으니 법사가 해석하여 말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 하는 것이다.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반절을 이른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유신이 군사를 돌이켜 패강을 건너려 할 때 명령을 내려, ‘뒤에 건너는 자는 목을 벤다’고 하였다. 군사가 서로 앞을 다투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병이 쫓아와서 미쳐 건너지 못한 자를 죽였다.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병을 반격하여 수만 명을 잡아죽였다.” 백제고기에는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아래로 강물에 닿아있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할지라도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타사암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속설이 잘못된 것이다. 다만 궁인이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더라도, 의자왕이 당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에 명백히 적혀 있다. 또 신라고전에는 “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머물고 있었다. 이에 유신은 그 음모를 알고 당병을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 상주의 경계에 당교가 있으니, 이것이 그 묻은 곳이라 한다.[당사를 보면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 만 하였으니 무슨 까닭인가, 감추기 위한 것인지 혹은 향전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년(662) 고구려를 치는 싸움에 신라인이 정방의 군사를 죽였다고 하면, 후일 총장 무진(668)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할 수 있었을까. 이로써 향전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진(662)에 고구려를 멸한 후 (신라가) 신하가 되지 않고, 마음대로 고구려의 땅을 소유한 일은 있으나, 소정방과 이적 두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