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국왕

계림국왕

분류 문학 > 제도 > 책봉호

기본정보

신라 진덕여왕이 당 고종으로부터 받은 책봉호.

일반정보

신라 진덕여왕이 당 고종으로부터 받은 책봉호로, 이전까지 신라왕의 작호가 낙랑군공(樂浪郡公)이었던 데에서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한 등급 승진한 것을 가리킨 것으로 생각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에 따르면 진덕여왕은 즉위한 후 직접 태평가(太平歌)를 짓고 비단에 수놓아 당에 바친 결과, 새로이 “계림국왕(鷄林國王)”에 책봉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 원년(647) 2월조에 의하면, 진덕여왕은 주국(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에 책봉되었다고 한다. 이는 이전까지 신라왕의 작호가 낙랑군공(樂浪郡公)이었던 데에서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한 등급 승진한 것이다. 이로 보아 『삼국유사』의 “계림국왕(鷄林國王)”이라는 표현은 왕(王)이라는 점에서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의 승진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김종복, 2006)

다만,『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 4년(650) 6월조에는 진덕여왕이 계림국왕에 책봉된 사실 대신 태평송을 수놓은 비단을 바친 김법민(金法敏)에게 종3품의 직사관인 태부경(太府卿)이 제수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낙랑(樂浪) 관련 책봉호는 북제(北齊) 때에 신라왕에게 처음으로 부여되었는데, 진흥왕 26년(565)에 “낙랑군공(樂浪郡公)”의 책봉호가 수여된 뒤로 수(隋)․당(唐)을 거치면서 진평왕 16년(594)과 46년(624), 선덕여왕 4년(635)까지는 “낙랑군공(樂浪郡公)”이 계속 수여되었고, 진덕여왕 원년(647), 무열왕 원년(654), 문무왕 2년(662)에 이르기까지는 “낙랑군왕(樂浪郡王)”이 수여되었다.

과거 중국의 군현명 가운데 신라에게 “낙랑(樂浪)”의 책봉호를 부여한 것은 지역적 명칭을 고려한 조치로 이해되기도 한다. 곧, 중원제국을 통일한 수(隋)가 등장하면서 삼국은 경쟁적으로 수(隋)와의 외교적 접근을 모색하게 되자, 수(隋)는 삼국왕을 각기 대등한 거리를 두고 대하게 되면서 각기 지역적인 명칭을 고려하여 책봉호를 수여했다고 파악한 것이다.(신형식, 1984)

한편, 중국에서 삼국의 왕에게 내린 첫 책봉호가 모두 낙랑(樂浪)과 관련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삼국의 왕들이 낙랑과 관련된 책봉호를 받을 당시에는 각기 과거 낙랑군 지역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연고권을 내세울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으며, 이에 중국에서 동이(東夷) 지역을 대표할 만한 세력으로 인정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곧, 백제는 진(晉)에게서 근초고왕 27년(372)에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책봉호를 받았으며, 고구려는 진(晉)에게서 장수왕 원년(413)에 “낙랑공(樂浪公)”의 책봉호를 받았다. 삼국 중 국가적 성장이 뒤졌던 신라는 진흥왕대 이후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이때 “낙랑군공(樂浪郡公)”의 책봉호를 받게 되면서부터 “신라=낙랑”이라는 인식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문창로, 2004)

참고문헌

신형식, 1984,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문창로, 2004, 「新羅와 樂浪의 關係 -新羅史에 보이는 樂浪의 實體와 그 歷史的 意味를 중심으로-」『韓國古代史硏究』34.
김종복, 2006, 「남북국(南北國)의 책봉호(冊封號)에 대한 기초적 검토」『역사와 현실』61.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
眞德王
第二十八眞德女王 卽位自製太平歌 織錦爲紋 命使往唐獻之[一本 命春秋公爲使 往仍請兵 太宗嘉之 許蘇<定>方云云者 皆謬矣 <顯>慶前春秋已登位 <顯>慶庚申非太宗 乃高宗之世 定方之來在<顯>慶庚申 故知織錦爲紋 非請兵時也 在眞德之世 當矣 盖請放金欽純之時也] 唐帝嘉賞之 改封爲雞林國王 其詞曰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威定 修文契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軍邁虞唐 幡旗何赫赫 錚鼓何鍠鍠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疑幽現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方方 維嶽降輔宰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王之代有閼川公林宗公述宗公<武>林公[慈藏之父]廉長公庾信公 會于南山于知巖議國事 時有大虎走入座間 諸公驚起 而閼川公略不移動 談笑自若 捉虎尾 撲於地而殺之 閼川公膂力如此 處於席首 然諸公皆服庾信之威 新羅有四靈地 將議大事 則大臣必會其地謀之 則其事必成 一<曰東>靑松山 二曰南于知山 三曰西皮田 四曰北金剛山 是王代 始行正旦禮 始行侍郞號
진덕왕(眞德王)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하여 스스로 태평가를 짓고,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 당나라에 바쳤다.[어떤 책에 “춘추공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청하니 태종이 그것을 기뻐하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한 것은 모두 잘못이다. 현경(顯慶) 전에 춘추는 이미 왕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660)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 때이며, 소정방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이다. 그러므로 비단을 짜서 무늬를 수놓아 보낸 것은 청병 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덕왕의 재위 때인 것이 마땅하니, 대개 김흠순을 놓아 돌려보내기를 청하던 때였다.] 당나라 황제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계림국왕(雞林國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 “대당(大唐)이 왕업을 개창하니, 어마어마한 황제의 계책이 창성하도다. 전쟁이 그치니 군사(戎衣)는 안정되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왕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통령하매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체모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은 해와 달과 같아, 운수를 다스림이 우당(虞唐)보다 앞서네. 번(幡)과 기(旗)는 어찌 그리 빛나며, 징소리와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을 어긴 자는, 뒤집히고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한 풍속이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가 옥촉(玉燭)과 같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비치네. 산악의 정기는 재상을 내려, 황제는 충량(忠良)한 이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나라 황제를 밝게 빛내리.”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술종공․무림공(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유신공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국사(國事)를 의논했다. 이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좌중에 뛰어들어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를 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수석(首席)에 앉았으나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런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의논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졌다.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이 왕 때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란 칭호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