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취산

영취산

분류 문학 > 지리 > 산

기본정보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와 범서읍 천상리 경계에 있는 산

일반정보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와 범서읍 천상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 산의 동쪽 기슭에 망해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영취산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와 범서읍 천상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600m이다.『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 의하면, 동해용을 위하여 영취산의 동쪽 기슭에 망해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5 감통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조에 의하면, 고려 굴불지(屈弗池)의 용이 황제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靈鷲山)에 약사도량(藥師道場)을 영구히 열어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기사가 있다.

『삼국유사』 권5 피은8 낭지승운보현수(朗智乘雲普賢樹)조에는 영취산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삽량주(歃良州) 아곡현(阿曲縣)의 영취산(靈鷲山)에 이상한 중이 있었다. 암자에 살기 수십 년이 되었어도 고을에서 모두 그를 알지 못하였고, 스님도 또한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법화경(法華經)』을 강론하여 신통력이 있었다. 용삭(龍朔) 초년에 지통(智通)이란 중이 있었는데, 그는 본래 이량공(伊亮公)의 집 종이었다. 일곱 살에 출가했는데, 그 때 까마귀가 와서 울면서 말했다. “영취산(靈鷲山)에 가서 낭지(朗智)의 제자가 되어라. … 오직 서천축(西天竺)과 해동(海東)의 두 영취산(靈鷲山)에만 있는데, 이 두 산은 모두 제 10 법운지(法雲地) 보살(菩薩)이 사는 곳이니, 이 사람은 반드시 성자(聖者)일 것이다.” 마침내 행색을 살펴 그제야 해동 영취산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스님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이름이 안팎에 드러났다. 나라 사람들이 그 암자를 혁목암(赫木庵)이라 불렀는데, 지금 혁목사(赫木寺)의 북쭉 언덕에 있는 옛 절터가 그 유적지이다.『영취사기(靈鷲寺記)』에는, 낭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암자자리는 가섭불(迦葉佛) 때의 절터로, 땅을 파서 등항(燈缸) 두 개를 얻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5 피은8 연회도명문수점(緣會逃名文殊岾)조에는 영휘산과 관련하여 다음의 내용이 전한다. 원성왕대의 고승(高僧) 연회(緣會)는 일찍이 영취산(靈鷲山)에 숨어 살면서 언제나 『연경(蓮經)』을 읽어 보현보살(普賢菩薩)의 관행법(觀行法)을 닦았으며, 영취산의 서쪽 고개에서 문수노인과 변재천녀를 만났다고 한다.

영취산은 불교와 관련된 지명으로, 원래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王舍城) 주위에 있던 산인데, 석가모니의 설법장소로 유명하다. 울산의 영취산은 이 인도의 산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취두산(鷲頭山), 취봉(鷲峰), 영취산(靈鷲山), 영산(靈山) 등으로 번역되나 주로 영취산이라 많이 쓰이고, 약칭하여 영산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는 영취산에서『법화경』과 『무량수경』 등의 중요한 경전을 설법하였다 하며, 특히『법화경』의 설법도량으로 유명하다.『법화경』의 게송(偈頌)에 보면, “당재영취산급여제주처(堂在靈鷲山及餘諸主處)”라고 하여, 석가모니가 항상 영취산에 머물었음을 밝히고 있다.(김영태, 1977)

『삼국유사』 권5 피은8 낭지승운보현수(朗智乘雲普賢樹)조에 의하면, 울산(蔚山) 영취산 혁목암 자리가 가섭불(迦葉佛) 때의 절터로 등장하며, 낭지대사가 법화경을 강론하여 신통력이 있었다고 한다. 낭지가 있는 산이 영취산이요, 낭지가 꺾어 가져간 나무가 인도와 신라의 두 영취산에만 있는 것이며, 혁목암 자리가 석가모니 이전의 부처인 가섭불 당시의 절터라는 것 등은 분명 신라 불국토 사상의 표현이다. 인도와 신라를 동등하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신라는 본래부터 불교의 인연이 깊은 곳이라 한 것이다.(박태원, 2002)

울산 영취산은 신라와 고려 때까지는 주로 영취산으로 불리웠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慶尙道) 울산군(蔚山郡) 산천조에는 문수산(文殊山)이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불우조에는 망해사(望海寺)가 문수산(文殊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에는 영취산이 문수산으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울산 영취산, 곧 문수산은 고대 한국인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지혜가 문수신앙의 형태로 서려 있는 곳이다. 영취산은 법운지에 도달한 보살이 거처하는 곳으로, 최고의 지혜를 얻은 문수보살이 있는 곳이 된다. 영취산 문수신앙의 원형은 영취산에 거주하였던 낭지스님의 설화에서 발견되는데, 영취산을 문수산이라 부르고,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이 창건하였다는 문수사(文殊寺)가 이 산에 있는 것도 이러한 영취산 문수신앙의 맥락에 놓여 있다.(박태원, 2002)

참고문헌

김영태, 1977, 「法華信仰의 傳來와 그 展開」『韓國佛敎學』3.
박태원, 2002, 「울산의 불교문화」『蔚山廣域市史』 역사편, 울산시.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 망해사)
處容郞 望海寺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 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 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曀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勅有司 爲龍創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神現形 跪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畵公之形容 不入其門矣 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辟>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乃爲龍而置也 又幸鮑石亭 南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有人現舞於前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或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祥審 或曰御舞山神 或云 旣神出舞 審象其貌 命工摹刻 以示後代 故云象審 或云霜髥舞 此乃以其形稱之 又幸於金剛嶺時 北岳神呈舞 名玉刀鈐 又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級干 語法集云 于時山神獻舞唱歌云 智理多都波都波等者 蓋言以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謂也 乃地神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故國終亡
처용랑(處容郞) 망해사(望海寺)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에서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잇닿아 있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생황소리와 노래가 도로에서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大王)은 개운포(開雲浦)[학성(鶴城) 서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에 유람하였다. 왕이 장차 돌아가려고 하여,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깜깜하게 끼어 길을 잃었다. 괴이하여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는 동해용(東海龍)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개운포라고 이름하였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에 들어와 왕의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이라고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뜻이 머무르게 하고자 하였고, 또 급간(級干)의 관직(官職)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그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의 집에 몰래 가서 잤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곧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로리 넷이러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앗음을 어찌하리꼬. 이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제가 공의 부인을 부러워하여 지금 그를 범하였는데, 공이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고 그를 아름답게 여기며, 맹세코 지금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악한 것을 피하고 경사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돌아와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점지하여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고 하였는데, 또는 신방사(新房寺)라고도 이름하였으니, 곧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또 포석정(鮑石亭)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는 보지 못했으나, 왕만 홀로 그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니, 왕이 몸소 춤을 추어 그 모양을 보였다. 신(神)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도 한다. 혹은 이미 신(神)이 나와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본떠 새겨서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 한다고 하였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니, 이는 그 형상으로 그를 일컬은 것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신(北岳神)이 나타나 춤을 추었으므로, 옥도검(玉刀鈐)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고 이름하였다.『어법집(語法集)』에 이르기를, 그때 산신(山神)이 춤을 추어 바치며 노래를 부르면서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 등이라고 하였다.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都邑)이 장차 파괴된다는 것을 이른다. 이에 지신(地神)과 산신(山神)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여겨 탐락(耽樂)이 더욱 심하였으므로,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