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태백

삼위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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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환인(桓因) 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환웅(桓雄)의 의지실현을 위해 선택한 장소

일반정보

삼위태백(三危太白)은 환인(桓因)이 환웅(桓雄)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의지실현을 하도록 선택한 장소이다. 삼위태백은 삼위산의 태백봉우리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양자를 별개의 산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삼위(三危)는 중국 고전의 지명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아사달처럼 고유어를 한자로 쓴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태백(太白)은 오늘의 백두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거나, 어느 특정한 산을 지칭한 것이 아닌 성산(聖山) 또는 신산(神山)으로 숭배한 각지의 산을 이름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에서는 고조선의 개국신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 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 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즉, 삼위태백(三危太白)은 환인(桓因)이 환웅(桓雄)의 의지실현을 위해 선택한 장소로서 하늘과 대좌하는 공간이며, 환인(桓因)이 홍익인간(弘益人間)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장소라고 판단한 선택된 공간이다.(윤명철, 1988)

삼위태백은 삼위산의 태백봉우리로 해석하기도 하지만(김재원, 1988) 삼위(三危)는 인세(人世) 서방(西方)의 산, 태백은 인세(人世) 동방(東方)의 산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등(김두진, 1988) 양자를 별개의 산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서(尙書)』 순전(舜傳)에는 “삼묘족을 삼위산으로 쫓아냈다.(竄三苗于三危)”라고 하여 삼위(三危)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삼위(三危)는 현재 중국의 돈황(敦煌)의 남쪽에 있는 산의 이름이라고 한다. 『산해경』에는 삼위산에 서왕모(西王母)에게 먹이를 갖다 주는 청조(靑鳥) 3마리가 있으며, 산 둘레는 100여리라고 하였다.

삼위(三危)를 삼고산(三高山)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이병도, 1976), 『제왕운기』의 주에서는 구월산, 즉 아사달산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였다. 삼위(三危)는 이렇게 중국 고전의 지명으로 파악하는 의견도 있지만, 궁홀이나 아사달처럼 토박이말을 한자로 쓴 것으로 보기도 한다.(신종원, 2004)

한편 태백(太白)은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에서 “태백은 오늘날의 묘향산이다.(太白 今妙香山)”라고 하였지만 그 근거는 희박하며 태백은 오늘의 백두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고대문헌에 보이는 불함(不咸), 개마(蓋馬), 태백(太白), 도태산(徒太山), 장백(長白) 등은 모두 같은 산, 즉 현재 백두산의 다른 명칭으로 백두산은 동북아시아의 각 민족이 숭배하던 공통의 산이었다고 한다.(윤명철, 1988)

이에 대하여 태백산이란 것은 어느 특정한 산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신이 높은 산에 내려왔다는 것은 산악숭배와 결부된 것으로 이것은 각지에 성산(聖山) 또는 신산(神山)으로 숭배한 산을 이름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김정학, 1988) 그에 따르면 태백산(太白山)에서 태(太)는 형용사이고 핵심은 백산(白山)인데, 백산(白山)은 우리말 “밝달”의 한자표기로 “밝달”은 태양신, 즉 “밝검”이 깃들어 있은 성산(聖山)을 지칭한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6, 『역주 삼국유사』, 광조출판사.
김두진, 1988, 「檀君古記의 理解方向」『檀君神話論集』, 새문사.
김정학, 1988, 「檀君神話의 새로운 解釋」『檀君神話論集』, 새문사.
윤명철, 1988, 「檀君神話에 대한 構造的 분석」『韓國思想史學』2.
신종원, 2004, 『삼국유사 새로읽기』1, 일지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조선[왕검조선]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경에는 무엽산이라고 했고 또 백악이라고도 한다.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 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곰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여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당나라 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방이라고도 한다]홀산 또는 금미달 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라고 하였다. 당의 배구전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 하였으며, 통전에도 이 설과 같다.[한서에서는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으로 되어 있고 지금은 3군이라 하고 이름도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