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활산

명활산

분류 문학 > 지리 > 산

기본정보

현재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서 보문동을 걸쳐있는 산

일반정보

명활산(明活山)은 현재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서 보문동을 걸쳐있는 산으로 현재 사적 47호로 지정된 명활산성(明活山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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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명활산(明活山)은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 신라 6촌 중 하나인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 위치한 곳으로,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촌장 지타(只他)가 처음 내려온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慶州府) 산천조(山川條)에는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고 전해진다.

명활산은 현재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서 보문동에 걸쳐있으며, 사적 제47호로 지정된 명활산성(明活山城)이 남아 있다. 명활성을 축성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4년(405)조에 “여름 4월에 왜의 군사들이 와서 명활성을 공격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四年 夏四月 倭兵來攻明活城 不克而歸)”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을 쌓은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고적조에 의하면, 명활성은 월성(月城)의 동쪽에 있고 석축(石築)으로 둘레가 7,818척이라 하였다. 현재는 대부분 허물어지고 일부만이 남아 있는데 자연석을 깨뜨려 가공 없이 쌓았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진흥왕대의 개축 당시 모습인 것으로 추측된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의 군사가 동쪽 변경을 침범해 명활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며 자비왕대에는 명활성을 개축하고 왕이 옮겨가 있었다고 한다. 진흥왕 15년(544)에 성을 수리해서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도 성을 고쳐 쌓았는데 당시 둘레가 3천보라고 전하고 있다. 1988년에는 진흥왕 12년(551)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가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11월 15일-12월 20일의 35일동안 높이 10보(步), 길이 14보 3척(尺) 3촌(寸)의 성벽을 축조했다고 하므로 진흥왕 당시 지속적으로 명활성의 수리와 축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박방룡, 1988) 이후 선덕여왕대에는 비담(毗曇)이 이 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金庾信)이 평정하기도 하였다. 이 산성은 경주의 서쪽에 있는 선도산성(仙桃山城), 남쪽의 남산성(南山城)과 함께 신라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동쪽에 마련한 산성으로 왕도 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유사』의 왕력 기록에 따르면 자비마립간의 기미년(479)에 왜국병(倭國兵)이 침범하니 비로소 명활성을 축성하여 들어가 피하였다고 하였으나, 기미년은 자비마립간과 소지마립간의 교체년으로, 『삼국사기』에 따라 자비마립간이 기미년 2월 3일에 훙거했다면 왕력의 이 기록에 보이는 기미년은 착오일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의 자비마립간대에는 왜와 관련된 기록이 자주 보이는데, 재위 2년(459)부터 왜인이 배 1백여 척으로 침입하여 월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게 패퇴되었다는 기록 이후 계속해서 왜의 침입과 이에 대한 방어 기사가 등장한다. 특히 자비마립간 6년(463)에는 “봄 2월에 왜인이 삽량성(歃良城)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중도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왕은, 왜인들이 자주 우리 땅을 침입하였으므로 변경에 두 성을 쌓았다.(春二月 倭人侵歃良城 不克而去 王命伐智 德智 領兵伏候於路 要擊大敗之 王以倭人屢侵疆場 緣邊築二城)”라 하여 왕력과 유사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왕력의 “양주(梁州)”는 문무왕때 설치한 삽량주(歃良州: 지금의 양산)이며 경덕왕때 양주(良州)로 개칭했던 곳이므로, 삽량성이 공격당한 후 쌓은 두 개의 방어성을 왕력 찬자가 “양주이성(梁州二城)”으로 표현한 것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왕력의 기미년은 기해년(己亥年: 459)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이강래, 2005) 현재 전하는 『삼국유사』의 판본에는 “이성(二城)”의 “이(二)”자가 보이지 않으나, 석남필사본(石南筆寫本)에 “이(二)”자가 있으므로 원래 왕력편의 표기는 “양주이성(梁州二城)”이 맞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명활전(明活典)이라는 관서명이 보이는데, 그 명칭으로 미루어 명활성을 관리하는 곳이었던 듯하다. 명활전은 흥덕왕 2년(827) 또는 신덕왕 2년(913)에 설치되었는데 소속 관원으로 대사(大舍) 1인, 간옹(看翁) 1인을 두었다.

참고문헌

박방룡, 1988, 「明活山城作城碑의 檢討」 『美術資料』 41.
이강래, 2005,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왕대력 비교 연구」 『韓國史學報』 21.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 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嵒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替東山彼上東村屬焉] 二曰 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涿 亦音道]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麻等烏道北廻德等 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致也 下例<如>] 三曰 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一作涿]部 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 西村屬焉 四曰 觜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 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 有古墟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 金山加利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歧部又作韓歧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乃兒等 東村屬焉 六曰 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勿伊村仍仇旀村閼谷[一作葛谷]等 東北村屬焉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弩禮王九年 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으로 내려오니,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두어져, 급량부(及梁部)라고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 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오니, 사량부(沙梁部)[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혹은 탁(涿)이라고 쓰는데,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때 설치한 것이다. 아래의 예도 이와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인데,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구(仇)라고도 쓴다.] 처음에 이산(伊山)으로 내려오니[계비산(皆比山)이라도 한다.], 점량(漸梁)[탁(涿)이라도 한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라도 쓴다.]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오니,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하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다섯째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지금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인데, (촌)장은 기타(祗沱)[지타(只他)라도 한다.]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하서지(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상산(金剛山)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인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旀村)․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육부(六部)의 조상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비로소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상세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