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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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학 > 제도 > 국호

기본정보

901년에 궁예가 세운 나라의 국호

일반정보

901년 궁예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세운 나라의 국호로서, 송악(松嶽)을 도읍으로 하였으며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는 901년에 궁예가 국호를 고려(高麗)라 칭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5년조에는 궁예가 스스로 왕을 칭했다고 하였다. 그리고『삼국사기』권50 열전10 궁예조에서도 901년에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궁예는 901년에 고려의 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궁예가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은 그 자신이 본래 신라 왕실 출신으로 자기를 버린 신라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신라가 고구려를 무너뜨려 도읍인 평양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므로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표방한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궁예가 국호를 고려로 한 배경에 대해서는 그가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옛 고구려 땅이었고, 주민들이 고구려계가 많았으며 고구려적 정서가 짙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고구려 지향적인 토착의식' 또는 '유민의식' 이 강했기 때문인데 궁예는 그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궁예 자신이 버림받은 신라의 왕자 출신으로서 자기의 개인적 원한과 고구려의 원수를 갚는 것은 궤를 같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을 거두어 새로운 나라의 건국으로 발전해 가게 되었고, 그에 따라 맨 먼저 내세워진 것이 고구려에서도 썼던 국호 고려의 채택이었다고 한다. 고구려는 427년 평양 천도에 즈음하여 국호를 고려로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측 기록에서도 5세기 이후부터 고구려를 고려로 칭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궁예는 송악의 호족인 왕건 집안 등의 조력을 얻어 기세를 떨치면서 궁예가 건국한 고려의 출발은 고구려의 부흥과 관련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궁예는 905년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바꾸면서 전제적 왕권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는 고구려 부흥을 내세워 옛 고구려 지역과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던 처음의 표방이나 의지를 저버린 처사였으므로 918년 왕건이 즉위하면서 다시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다고 한다. 즉 고구려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계승할 것임을 다시 천명한 것이다.(박용운, 2006)

참고문헌

박용운, 2006,『고려의 고구려계승에 대한 종합적 검토』, 일지사.

관련원문 및 해석

後高麗 弓裔 [大順庚戌 始投北原賊良吉屯 丙辰都鐵圓城[今東州也] 丁巳移都松岳郡 辛酉稱高麗 甲子改國號摩震 置元<武>泰 甲戌還鐵元]
후고려 궁예 [대순 경술에 처음엔 북원의 적 양길의 진영에 투항하였다. 병진에 철원성[지금의 동주이다]에 도읍하였다. 정사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신유에 고려라고 일컬었다. 갑자에 국호를 고쳐 마진이라고 하고 연호를 두어 무태라고 하였다. 갑술에 철원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