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9층석탑

월정사9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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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

기본정보

월정사 대적광전 앞에 있는 8각 9층의 석탑
지정번호: 국보 제 48호
지정명 : 월정사팔각구층석탑(月精寺八角九層石塔)
위치 :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월정사

일반정보

『삼국유사』 대산월정사오류성중조에는 월정사에 성자의 유적인 9층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지칭하는 9층탑은 현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월정사 대적광전 앞에 있는 월정사8각9층석탑을 말한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평면이 방형에서 벗어나 다각형으로 되고 층수도 다층으로 변하는 석탑이 유행하게 되는데, 월정사 9층석탑도 이러한 유형의 석탑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발굴조사를 통해서 현재의 탑이 현위치에 조선중기 이후에 옮겨졌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전문정보

월정사 9층석탑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월정사 대적광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는 15.2m이고 상륜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이 석탑의 정식명칭은 월정사 8각9층석탑이며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정사 9층석탑의 기록은 『삼국유사』 탑상4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조를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절에 있는 5류성중(五類聖衆)과 함께 9층석탑(九層石塔)은 모두 성자의 유적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외에 월정사 9층석탑에 관한 기록은 민지(閔漬 : 1248-1326)의 『오대산사적(五臺山事迹)』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 자장(慈藏)이 오대산의 지로봉(地爐蜂) 중대에 불뇌(佛腦) 및 정골(頂骨)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월정사를 짓고 9층석탑을 세워 사리 37과(顆)를 탑신 중에 봉안했다고 전하고 있다.

월정사 9층석탑의 탑신부는 각 층의 옥신석과 옥개석이 별개의 석재로 조성되었는데, 각 부재의 규격의 대소(大小)에 따라 1석 혹은 2, 3석으로 짜여진 것도 있다. 초층옥신은 각 면에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고 8면 중 교대로 사방에만 장방형 감실형(龕室形)이 마련되었는데, 남쪽만은 그 규격이 크고 나머지 3면의 것은 작다. 상륜부는 전체의 부재가 완전히 남아 있어서 상륜부의 양식을 정확하게 잘 보이고 있는데,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까지는 석재이고 그 이상은 금동제로서 보개(寶蓋)·수연(水煙)·보주(寶柱) 등이 완전하다. 현재 이 석탑 앞에는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 보물 제139호)을 안치하여 공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홍사준, 1971)

월정사 9층석탑은 몇 번의 화재로 인하여 각 부재에 손상이 심하나 그 형태는 원형을 갖추고 있다. 6·25전쟁 때 사찰건물이 전소되어 석탑에도 많은 피해를 입어 1970년 10월 석탑의 전면 해체보수가 진행되었다. 해체복원시 1층 탑신과 5층 옥개석에서 다양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5층 옥개석에서는 길이 13.2cm-14.2cm, 너비 16cm-16.5cm, 깊이 16cm의 방형 사리공에서 은제도금여래입상(銀製鍍金如來立像)이 발견되었고, 1층 탑신에서는 지름 32cm, 깊이 19cm의 원형 사리공에서 비단보자기에 싸인 사리구가 출토되었다. 보자기 안에는 4매의 청동 거울이 밑면과 주변을 감싸고 그 안쪽으로 보자기에 싸인 청동사리외합(靑銅舍利外盒)이 있었고, 그 안에는 은제사리내합(銀製舍利內盒)과 금동방형향합(金銅方形香盒)이 있었다. 이 중 은제사리내합 안에는 사리 14과가 들어 있는 수정사리병과 『전신사리경(全身舍利經)』이라는 묵서표제(墨書表題)한 경축(經軸)이 들어 있었으며, 이 외에도 향목(香木)이 다수 발견되었다.(조원창, 2005)

이 석탑의 유형은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평면이 방형에서 벗어나 다각형으로 되고 층수도 다층으로 변하는 석탑이 유행하게 되는데, 월정사 팔각9층석탑도 이러한 유형의 석탑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대부분의 견해이다.(정영호, 1998) 그리고 석탑이 8각의 형태를 띄는 것에 대하여 고구려의 석탑은 팔각형이 지니고 있는 것처럼 고구려 문화로 회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석탑에 표출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박경식, 1988)

그런데 2000년 월정사 9층석탑의 아래에서 지하유구(地下遺構)가 발견되면서 탑의 편년에 관한 새로운 견해가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월정사에 발견된 지하 가구기단(架構基壇)은 지난 2000년 현 월정사 9층석탑에 위치하고 있는 석조보살좌상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2001년 현 석탑 주변에 대한 세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지하 가구기단의 적심시설 및 석조보살좌상의 대좌 보강시설과 이들 유구와 관련된 구지표층 등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이들 유구의 구지표층 보다 아래 층위에서 백자 저부편과 숭녕중보(崇寧重寶)․성송원보(聖宋元寶)가 출토되어 지하 가구기단 및 석조보살좌상의 편년 설정에 단서가 되었다. 숭녕중보와 성송원보는 모두 송(宋)대의 동전으로써 전자는 1101년에 주조 되었고 후자는 1102-1106년에 주조 되었다. 바로 석탑의 지대석 아래 회다짐토에서 조선 중기 이후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백자 저부편이 확인된 것이다. 이는 이 탑이 지금의 위치에 들어서게 된 시기가 조선 중기 이후였음을 확인시켜주는 결과이다. 만일 이 탑이 조선 중기 이후 처음으로 조성된 것이라면 기존의 미술사적 양식 편년과는 대치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조사자 역시도 이 탑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이전에 조성되었던 탑이 조선 중기 이후 들어 현 위치로 옮겨진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월정사․문화유산발굴조사단, 2004) 따라서 이 탑이 조성된 시기에 대한 문제는 향후의 주변 나머지 지역에 대한 확장조사를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기게 되었다

참고문헌

홍사준, 1971, 「月精寺八角九層石塔 解體復原略報」 『美術史學硏究』112, 한국미술사학회.
박경식, 1998, 「고려시대」 『한국의 석탑』, 학연문화사.
정영호, 1998, 「고려시대의 석탑」 『한국의 석조미술』, 서울대출판부.
월정사 성보박물관, 2002, 『월정사성보박물관 도록』.
월정사․문화유적발굴조사단, 2004, 『五臺山 月精寺 석조보살좌상 주변지역 문화유적 시․발굴조사보고서』.
조원창, 2005, 「월정사 지구 유구기단의 편년과 성격」 『호서고고학』31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월정사오류성중)
臺山月精寺五類聖衆
按寺中所傳古記云 慈藏法師初至五臺 欲覩眞身 於山麓結茅而住 七日不見 而到妙梵山 創淨岩寺 後有信孝居士者 或云 幼童菩薩化身 家在公州 養母純孝 母非肉不食 士求肉 出行山野 路見五鶴射之 有一鶴落一羽而去 士執其羽 遮眼而見人 人皆是畜生 故不得肉 而因割股肉進母 後乃出家 捨其家爲寺 今爲孝家院 士自慶州界至河率 見人多是人形 因有居住之志 路見老婦 問可住處 婦云 過西嶺 有北向洞可居 言訖不現 士知觀音所敎 因過省烏坪 入慈藏初結茅處而住 俄有五比丘到云 汝之持來袈裟一幅 今何在 士茫然 比丘云 汝所執見人之羽是也 士乃出呈 比丘乃置羽 於袈裟闕幅中相合 而非羽乃布也 士與五比丘別後 方知是五類聖衆化身也 此月精寺 慈藏初結茅 次信孝居士來住 次梵日門人信義頭陁來 創庵而住 後有水多寺長老有緣來住 而漸成大寺 寺之五類聖衆九層石塔 皆聖跡也 相地者云 國內名山 此地最勝 佛法長興之處云云

(오)대산 월정사의 5류성중
절에 전해 오는 고기(古記)에 따르면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 오대(산)에 이르러 부처의 진신(眞身)을 보려고 산기슭에 띠집을 짓고 머물렀으나 (진신이) 7일동안 나타나지 않으므로 묘범산(妙梵山)에 이르러 정암사(淨岩寺)를 세웠다. 그 뒤에 신효거사(信孝居士)란 이가 있었으니 혹은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이라고도 한다. 집이 공주(公州)에 있었으며 어머니 봉양을 극히 효성스럽게 하였다고 한다. 그 어머니가 고기반찬이 아니면 식사를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고자 산과 들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이것을 쏘았다. 학 한 마리가 깃 하나를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거사가 그 깃을 들고 눈을 가린 채 사람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거사는 고기를 얻지 못하고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렸다. 그 후 곧 승려가 되어 자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효가원(孝家院)이다. 거사가 경주(慶州) 경내로부터 하솔(河率)에 이르러 사람들을 보니 모두 사람의 형상으로 보였다. 이리하여 이곳에 머물러 살 뜻이 있어 길에서 늙은 부인을 만나 살만한 곳을 물었더니, 부인이 말하기를 “서쪽 재를 넘으면 북쪽을 향한 골짜기가 있어 살만합니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간 곳이 없었다. 거사는 관음보살의 교시인 것을 알고, 이에 성오평(省烏坪)을 지나 자장법사가 처음으로 띠집을 지었던 자리에 들어가 살았다. 잠시 후 다섯 비구가 와서 말하기를 “네가 가지고 온 가사 한 폭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거사가 어리둥절하고 있었더니 비구가 말하기를 “네가 쥐고 있던 사람 보는 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거사가 곧 그 깃을 내주었다. 비구가 그 깃을 가사의 떨어진 폭에 대어보니 꼭 들어맞았는데 그것은 깃이 아니라 베였다. 거사가 다섯 명의 비구와 작별한 뒤에야 그들이 5류성중(五類聖衆)의 화신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月精寺)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으로 띠로 지은 것이며, 다음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와서 살았고, 다음은 범일(梵日)의 문인 신의(信義) 두타(頭陁)가 와서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 후에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인 승려 유연(有緣)이 와 살면서 점차 큰 절이 되었다. 절에 있는 5류성중(五類聖衆)과 9층석탑(九層石塔)은 모두 성자의 유적이다. 땅의 지세를 살피는 자가 말하기를 국내의 명산에서 이 땅이 가장 좋은 곳이므로 불법이 길이 흥할 곳이라 하였다(운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