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

위만조선

분류 문학 > 제도 > 국호

기본정보

위만이 세운 국가 명칭.

일반정보

위만이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세운 국가로서, 왕험성(王險城)을 수도로 하여 기원전 195년 무렵에 건국하고 기원전 108년 한(漢)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전문정보

위만조선의 국가 성격에 대해서는 정복국가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위만조선을 세운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準王)으로부터 국경 지대의 수비를 위임받았을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위만은 준왕으로부터 받은 제한된 영역 내에 자기를 따라온 무리와 그 이외의 거주민들을 대거 수용하였는데, 이러한 주민의 양적인 팽창은 식량의 확보와 함께 영역의 확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위만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준왕을 몰아낸 다음 왕위에 올랐고 이후 정복활동을 전개하여 『사기』 조선전의 표현처럼 수천 리나 되는 땅을 갖게 되었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대에 이르러서는 한나라와 전쟁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조직적인 싸움을 펼쳐 나갈 수 있었는데, 이것 역시 정복활동을 통하여 닦은 국력의 기반이 비교적 튼튼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김정배, 1986)

위만조선을 문헌상으로는 한국 최초의 고대국가, 정복국가로 파악하고 그 근거로 철제무기의 존재, 기록에 보이는 주변국가에 대한 정복, 직업적인 행정관료의 존재, 신분의 계층화, 교역활동 등을 들었다. 특히 위만조선과 중국과의 교역활동을 알려주는 증거로 명도전(明刀錢)을 들었는데 그 출토지를 바탕으로 난평-요양-무순-위원, 강계-평양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상정하였다. 그리고 위만조선의 존속기간을 고고학적인 고찰을 바탕으로 세형동검시기와 같은 것으로 파악하였는데 세죽리-연화보유형과 평양의 세형동검문화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었다.(최몽룡, 1997)

위만조선의 멸망 시기에 대해서는 종래 기원전 108년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먼저 한과 위만조선 간의 전쟁은 결과적으로 한의 패배였으며, 위만조선 내부의 친한파(親漢派)의 정권장악과 투항이라는 형식으로 위만조선이 붕괴된 것이었다.『사기』나『한서』의 조선열전과 『한서』 무제기(武帝紀)에서는 모두 원봉(元封) 3년, 즉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붕괴하고 한사군이 설치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한서』 오행지(五行志)에는 한군현이 동시에 개설된 것이 아니라, 3개의 군이 먼저 설치되고 뒤에 1군이 추가되었음을 추측케 하는 기록이 있다. 즉 “원봉 6년(기원전 105) 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3군을 열었다.(元封六年秋 兩將軍征朝鮮 開三郡)”는 기록에서는 기원전 105년에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3군을 개설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한서』지리지에는 낙랑군이 원봉 3년에 설치되었다고 하였으며, 현도군은 원봉 4년(기원전 107)에 개설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 사료에 입각할 때 한사군은 동시에 개설된 것이 아니라, 1년의 시차를 두고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조법종, 2006)

한편 위만조선의 명칭에 대해서 이를 만조선(滿朝鮮)이나 후조선(後朝鮮)으로 부를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즉 위만의 만(滿)이나 우거(右渠) 등은 조선에서 임금을 존칭하던 고유어의 차자(借字)표기인데, 조선의 고유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중국학자들이 위만을 중국계유민으로 단정하고 후대에 동북지역에서 가장 흔한 중국계 성이었던 위씨(衛氏)를 임의로 관칭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만보다는 만왕(滿王)이라는 명칭이 타당하며 만왕이 세운 조선도 위만조선 또는 위씨조선으로 부르기보다는 만조선이나 후조선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서영수, 2006)

참고문헌

김정배, 1986,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고려대학교출판부.
최몽룡, 1997, 「衛滿朝鮮」『韓國古代國家形成論』, 서울대학교출판부.
조법종, 2006,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신서원.
서영수, 2006, 「고조선의 발전과정과 강역의 변동」『白山學報』76.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