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충왕

구충왕

분류 문학 > 국가 > 가야

기본정보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생몰년 : ?-?
재위년 : 521-532

일반정보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9대 겸지왕(鉗知王)이고 어머니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이다. 겸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12년간 다스렸고, 양(梁) 중대통(中大通) 4년(532) 9월에 신라에 투항하였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이며 세종(世宗) 각간(角干), 무도(茂刀) 각간(角干), 무득(茂得) 각간( 干)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구충왕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구충왕(구형왕)은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그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유사』 왕력과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그리고 『삼국사기』에 비교적 자세히 전하고 있으나 전하는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먼저 이름에 대해, 『삼국유사』 왕력에는 “구충왕(仇衝王)”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서는 “구형왕(仇衡王)”,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法興王) 19년(532)조에서는 “김구해(金仇亥)”,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양주(良州) 김해소경(金海小京)조에서는 “구해왕(仇亥王)”, 『삼국사기』 권41 열전1 김유신(上)조에는 “구해(仇亥)” 혹은 “구차휴(仇次休)”라고 하였다. 이러한 여러 표현 중에서 구형왕(仇衡王)이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구형왕의 치세와 가락국의 멸망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왕력과 『가락국기』가 서로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즉 왕력에는 구충왕(구형왕)이 신축년(521)에 즉위하여 12년간 다스리다가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땅을 바쳐 투항했다고 하였으나, 「가락국기」에는 정광(正光) 2년(521) 즉위하여 42년간 다스리다가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에게 투항했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개황록(開皇錄)』에는 양(梁) 중대통 4년 임자에 신라에 항복했다고 한다(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라는 기록을 덧붙여 놓았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의 찬자는 『가락국기』의 마지막 부분에 “삼국사를 살펴보니 구형은 양 중대통 4년 임자에 땅을 바쳐 신라에 투항했다 하였으므로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 18년(42) 임인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壬子)까지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으로 살펴본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 2년 임오(壬午)라 하였으니 다시 30년이 더해져 모두 520년이 된다. 지금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한다.(案三國史 仇衡以梁中大涌四年壬子 納土投羅 則計自首露初卽位東漢建武十八年壬寅 至仇衡末壬子 得四百九十年矣 若以此記考之 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 則更三十年 總五百二十年矣 今兩存之)”라고 설명하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가락국이 멸망한 시기가 법흥왕 19년 즉 532년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조에는 “금관국의 왕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고 하였고,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 김해소경조에서도 “양나라 중대통 4년,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그 땅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以梁中大通四年新羅法興王十九年 率百姓來降)”라고 하였다. 따라서 구형왕의 신라 투항 시기는 왕력과 『개황록』의 기록대로 양 중대통 4년=법흥왕 19년(532)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게 여겨진다.

보정 2년(562)은 고령 대가야의 멸망시점으로, 그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강주(康州) 고령군조에 보인다. 이에 따르면 고령군(高靈郡)은 본래 대가야국(大加耶國)이었는데,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鼓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모두 16세 520년이었으며 진흥왕(眞興王)이 멸망시켰다고 한다. 또한『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2 진흥왕 23년(562)조에도 9월에 가야를 토벌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대가야국은 562년에 멸망했다고 할 수 있다. 「가락국기」에서는 562년을 가락국의 멸망 연대로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혼선을 초래한 것이다.(村上四男, 1978)

한편 구형왕을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7 계체천황(繼體天皇) 23년(529) 4월조에 보이는 임나왕(任那王)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왕 기능말다간기는 신라의 압박이 심해지자 일본에 구조를 요청하려 내조(來朝)하였다고 하는데, 그 시기가 529년에 해당하여 구형왕의 재위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今西龍, 1937) 그러나 기능말다간기를 이능말다간기(已能末多干岐)로 보면서 고령 대가야의 이뇌왕(異惱王)과 동일하게 여기기도 하고(村上四男, 1978), 혹은 창원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탁순국(卓淳國)의 왕으로 보기도 하므로(김태식, 1993) 이 인물을 구형왕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구형왕 말년의 가락국 멸망 상황에 대해서는「가락국기」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친히 군졸을 이끌었으나 저쪽은 많고 이쪽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을 보내 나라에 머물게 하고, 왕자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이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대로, 가락국 즉 금관가야의 멸망은 진흥왕대가 아닌 법흥왕대의 일이므로, 이 기록의 진흥왕은 법흥왕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에는 전쟁과 관련된 내용이 없으며, 구형왕(김구해)이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했다고만 하여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흥왕은 신라에 투항한 구형왕(김구해)을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고 한다.

신라에 투항한 후 구형왕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나, 신라 경순왕의 사례를 참고하여 구형왕 역시 항복 후 경주에 이주한 후 그곳에서 살다 죽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또한 아들 무력이 왕경(王京) 6부 중 하나인 사탁부 소속이라는 점에서 구형왕 역시 사탁부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권덕영, 2007) 한편 조선 헌종(憲宗) 8년(1842) 편찬된 『각간선생실기(角干先生實記)』에는 구형왕이 경주 북쪽 50리 지점에 있는 기계현(杞溪縣)에 살았다고 하였다. 현재 구형왕의 능으로 전하는 무덤은 경남 산청에 있다.

구형왕은 분질수이질(分叱水尒叱)의 딸 계화(桂花)를 왕비로 맞아 세 아들을 두었다. 『가락국기』에는 세 아들의 이름을 각각 세종(世宗), 무도(茂刀), 무득(茂得)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에는 세 아들의 이름이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으로 나와 차이가 있다. 이 중 무력은 진흥왕대 신주군주(新州軍主)를 역임하였고 백제와의 관산성(管山城)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크게 활약하였으며, 무력의 손자는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이다.

참고문헌

村上四男, 1978,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김태식, 1993, 『加耶聯盟史』, 일조각.
권덕영, 2007, 「금관가야 ‘仇衡王陵’ 전승과 역사화 과정」 『大丘史學』86.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왕력)
第十 仇衝王 [鉗知子 母□女 辛丑立 理十二年 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 自首露王壬寅 至壬子 合四百九十年] 國除
제10 구충왕 [겸지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녀이다. 신축년에 즉위하여 12년간 다스렸다.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에 땅을 바쳐 신라에 투항하였다. 수로왕 임인년부터 임자년까지 합하여 490년이다.] 나라가 없어졌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 鉗知王 一云金鉗王 永明十年卽位 治三十年 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 王妃出忠角干女淑 生王子仇衡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九月 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 興兵薄伐 王使親軍卒 彼衆我寡 不堪對戰也 仍遣同氣脫知爾叱今 留在於國 王子上孫卒支公等 降入新羅 王妃分叱水尒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 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議曰 案三國史 仇衡以梁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 則計自首露初卽位東漢建武十八年壬寅 至仇衡末壬子 得四百九十年矣 若以此記考之 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 則更三十年 摠五百二十年矣 今兩存之
…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永明) 10년(492)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30년이며,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인 숙(淑)인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구형왕(仇衡王). 김씨이다. 정광(正光) 2년(521)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42년이다.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에 왕은 동기(同氣)인 탈지(脫知) 이질금(爾叱今)으로 하여금 본국에 머무르게 하고 왕자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分叱水) 이질(爾叱)의 딸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이고,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角干)이며,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서 이르기를, “양(梁)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논평해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살펴보건대, 구형(仇衡)은 양(梁)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하였다. 즉, 처음 수로왕이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으로부터 계산하면 구형왕 말년 임자(壬子, 532) 까지는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가 된다. 그러므로 다시 30년을 더하게 되면 총 520년이 된다. 여기에 두 설을 다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