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황력

개황력

분류 문학 > 국가 > 가야

기본정보

금관가야의 왕실역사를 기록한 책명.

일반정보

『삼국유사』 왕력편과 가락국기에 인용된 사료로, 금관가야의 왕실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추정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왕력편과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개황력(開皇曆)』과 『개황록(開皇錄)』이 인용되어 있다. 『개황력(開皇曆)』과 『개황록(開皇錄)』은 동일한 책으로, 편찬된 시기에 관한 논의가 있다. 개황(開皇)은 수(隋)의 연호로 581∼600년까지 사용되었으며, 금관가야 멸망 이후인 신라 진평왕(眞平王 579∼632)대에 해당된다. 이에 『개황력(開皇曆)』은 책의 명칭으로 보아 수(隋) 문제(文帝) 개황년간(開皇年間)에 편찬되었다는 견해가 있다.(三品彰英, 1979)

그러나 그 당시 신라는 “건복(建福 584∼633)”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개황력』은 적어도 신라가 중국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진덕여왕 4년(650)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생각된다. 『개황력』은 금관가야 왕실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추측되는데, 김유신(金庾信), 문명왕후(文明王后) 등 가야계 후손의 정치적 비중이 절정에 달하고 금관소경을 설치하기도 한 문무왕대(文武王代)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김태식, 1993)

『삼국유사』권2 기이2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661년에 문무왕이 즉위하면서 수로왕묘(首露王廟) 제사에 대해 내린 제지(制旨)에서, “가야국(伽耶國) 원군(元君)의 9대손인 구충왕(仇衝王)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에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 잡간(匝干)의 딸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곧 나를 낳으신 분이다. 이런 연유로 원군은 나에게 15대 시조가 되는 것이다. 그분이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오래전 없어졌으나 장사를 지낸 능묘는 지금도 그대로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 제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문무왕 자신과 수로왕의 세계를 인식하고 있으므로, 김해 김씨의 기원은 적어도 7세기 중반 문무왕대에는 정리가 이루어졌을 것이며, 이에 따라 통일기 무렵 가야 김씨 세력의 성씨 취득을 계기로 가락국 왕력인 『개황력』이 편찬되었다는 의견도 있다.(남재우, 2005)

반면,『개황력』과『개황록』은 가락국기에 인용된 사료이므로, 이는 가락국의 사료로 신라말이나 고려초에 편찬된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개황”을 수의 연호가 아닌 “황국(皇國)을 개창(開創)하였다”는 뜻으로 풀이하여, 시조 수로왕이 황명(皇命)으로 가락국을 개창하여 10세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한 사실을 기록한 사서(史書)로 본 것이다. 이는 후삼국과 고려초 무렵에 신라 진골사회의 몰락과정에서 소외되던 가락왕계와 가락인들이 복고적으로 조상의 영광을 추원(追遠)하면서 수로왕의 건국설화를 중심으로 구형왕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기를 편찬했다고 본 것이다. “황(皇)”자를 쓴 뜻은 우리 역사상에서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니, 고려 태조가 중국에 통일왕조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배경에서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칭함과 같이, 『개황록』도 이러한 사회적 여건에서 편찬된 사서라고 보았다.(정중환, 1990)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9, 『三國遺事考証(中)』, 塙書房.
김태식, 1993, 『加耶聯盟史』, 일조각.
정중환, 1990,「駕洛國記의 文獻學的 考察」『伽倻文化』3.
남재우, 2005, 「가야의 건국신화와 제의」『한국고대사연구』39.

관련원문 및 해석

首露王 [壬寅三月卵生 是月卽位 理一百五十八年 因金卵而生 故姓金氏 開皇曆載]
수로왕 [임인년 3월 알에서 태어나, 그 달에 즉위하였으며, 158년을 다스렸다. 금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인하여 성이 김씨이다. 개황력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