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지왕

겸지왕

분류 문학 > 국가 > 가야

기본정보

가락국(금관가야) 제9대 왕
생몰년: ?-521
재위년: 492-521

일반정보

가락국(금관가야) 제9대 왕으로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제8대 질지왕(銍知王)이고 어머니는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 방원(邦媛)이다. 질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기간은 492년부터 521년까지이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이고 아들은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이다.

전문정보

겸지왕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왕력과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의 가락국 세계(世系)에서 전하는 내용이 거의 같다. 다만 「가락국기」에는 “겸지왕은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永明) 10년에 즉위하여 30년간 다스렸고 정광(正光) 2년 신축 4월 7일에 붕(崩)하였다. 왕비는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이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鉗知王 一云金鉗王 永明十年卽位 治三十年 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 王妃出忠角干女淑 生王子仇衡)”라고 하여, 겸지왕의 이칭이 “김겸왕(金鉗王)”이었다는 점과 정확한 사망 날짜, 왕비의 이름, 아들 구형에 대한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겸지왕은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불렸다. 이에 대해서는 제8대 질지왕(銍知王)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겸지(鉗知)의 지(知)를 신지(臣智)나 질지(叱知: 좌지왕의 이칭) 등에서 쓰인 것과 같은 존칭으로 보고, 본래는 “겸왕(鉗王)”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측한 견해가 있다. 즉 겸지왕에 대한 본래의 기록은 “一云鉗 金氏” 또는 “一云金鉗 金氏”였는데 이를 왕력과 「가락국기」에서 “鉗知王 一云金鉗王”이라고 고쳐서 기록했다는 것이다.(村上四男, 1978)

한편 겸지왕을 『남제서(南齊書)』에 보이는 “하지왕(荷知王)”과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즉 『남제서』 권58 열전39 만동남이(蠻東南夷) 가라(加羅)조에는 건원(建元) 원년(479) 국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고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으로 삼았다(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 詔曰 … 可授輔國將軍本國王)는 기록이 있는데, 겸지왕이 발음상 하지왕과 가까우므로 하지왕을 곧 겸지왕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학자의 견해로, 일본어의 발음상 겸(鉗: ゲノ)과 하(荷: ゲ)의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이렇게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겸지왕의 재위기간(492-521)이 『남제서』의 건원 원년(479) 기록과 맞지 않는 문제가 생기는데, 이는 「가락국기」 기록에 오차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今西龍, 1937) 그러나 하지왕은 건원 원년과 재위기간이 맞는 제8대 질지왕으로 보기도 하고(村上四男, 1978), 금관가야가 아닌 대가야의 왕으로 보거나(천관우, 1989), 보다 구체적으로는 가실왕(嘉悉王)으로 보는 견해(김태식, 1993)도 있으므로 이를 곧 겸지왕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겸지왕은 정광(正光) 2년(521) 신축(辛丑) 5월 7일에 죽었다. 겸지왕과 왕비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 사이에서 낳은 아들 구형(仇衡)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참고문헌

今西龍, 1937, 『朝鮮古史の硏究』, 近澤書店.
村上四男, 1978,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천관우,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김태식, 1993, 『加耶聯盟史』, 일조각.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왕력)
第九 鉗知王 [父銍知王 母邦媛 壬申立 理二十九年]
제9 겸지왕 [아버지는 질지왕이고 어머니는 방원이다. 임신에 즉위하여 29년간 다스렸다.]

第十 仇衝王 [鉗知子 母□女 辛丑立 理十二年 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 自首露王壬寅 至壬子 合四百九十年] 國除
제10 구충왕 [겸지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녀이다. 신축년에 즉위하여 12년간 다스렸다.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에 땅을 바쳐 신라에 투항하였다. 수로왕 임인년부터 임자년까지 합하여 490년이다.] 나라가 없어졌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 銍知王 一云金銍王 元嘉二十八年卽位 明年 爲世祖許黃玉<王>后 奉資冥福 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 曰王后寺 納田十結充之 治四十二年 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 王妃金相沙干女邦媛 生王子鉗知 鉗知王 一云金鉗王 永明十年卽位 治三十年 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 王妃出忠角干女淑 生王子仇衡
가락국기[문종조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451)에 즉위하여 다음해에 세조(世祖) 허황옥(許黃玉)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조와 왕후가 처음 만났던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고 이름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치세는 42년이며, 영명(永明) 10년 임신(任申, 492) 10월 4일에 죽었다. 왕비는 금상(金相) 사간(沙干)의 딸인 방원(邦媛)인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永明) 10년(492)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30년이며,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인 숙(淑)인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