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왕

양원왕

분류 문학 > 국가 > 고구려

기본정보

고구려 제24대 왕.
생몰년 : ?-559
재위기간 : 545-559

일반정보

이름은 평성(平成)이며 아버지는 고구려 제23대 안원왕이다. 양원왕은 외척들간의 세력 다툼 끝에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는 세력 다툼에서 승리한 평양계 귀족 세력이 정국을 주도한 것으로 생각되며, 밖으로는 돌궐이 침입하고 백제와 신라가 한강 유역을 빼앗는 등 위기 상황이 계속되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양강왕(陽崗王)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름은 평성(平成)이라 하였고 아버지는 고구려 제23대 안원왕이다.『삼국사기』권19 고구려본기7 양원왕 즉위년조에서는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이라고도 하였고 이름은 평성(平成), 안원왕의 맏아들이라 하였다. 안원왕 3년(533)에 태자가 되었고, 같은 왕 15년(545)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양원왕대의 정국에 관해서는 안원왕 말년에 외척들간의 세력 다툼을 시사하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즉 『일본서기』권19 흠명기 6년조(545)와 7년조(546)에는 추군(麤群)과 세군(細群) 세력이 다툰 끝에 세군이 패하여 200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대해서 추군과 세군을 각각 평양과 국내성에 기반을 둔 귀족 세력으로 파악하면서 양원왕 초기의 정국 운영은 양원왕의 즉위를 지원하던 추군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리고 양원왕 즉위시에 추군과 세군 사이에 왕위 계승전이 치열했음을 상기하면서 양원왕과 대립하였던 국내성 세력은 양원왕의 즉위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세군 세력과 동일한 존재이거나, 아니면 세군 세력을 지지하고 그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내성 세력이 하나의 갈등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들면서 지방에서는 계속 중앙 정권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정치 세력이 상존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환도 세력을 단순히 지방 세력으로서가 아니라, 환도 지역과 연고를 맺고 있는 중앙 귀족까지를 포괄한 하나의 정치 세력권으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국내 지역에 세력 기반을 두고 있던 이들을 고구려 초기 이래 중앙 귀족으로 성장한 전통적인 구귀족 세력과 연결시키면서 국내 지역뿐만 아니라 평양 일대에서도 상당한 세력 기반을 형성한 것으로 보았다.(임기환, 2004)

한편 『주서』와『구당서』의 고려전(高麗傳) 기사를 바탕으로 6세기 중반 이후부터 640년 무렵까지 고구려의 국정이 귀족들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 실체는 당시 귀족들간의 역관계에서 한 세력이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면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으며 귀족층 내에서 대대로를 선임하는 일이 관례화되어 그에 관한 준칙이 마련되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 주도적인 귀족 세력이 형성되어 상당히 안정된 기반이 확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체제가 이루어진 6세기 중반 이후의 시기를 “귀족연립정권기”라고 명명하였다.(노태돈, 1999)

양원왕대 대대로(大對盧)의 실체에 대해 주목한 견해도 있다. 안원왕 말년의 정변 이후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대대로를 둘러싼 다툼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양원왕대에는 정변에서 승리한 추군측을 비롯한 귀족이나 양원왕 13년(557) 환도에서 일어난 간주리(干朱理)의 난을 평정한 귀족 중에서 대대로가 선임된 것으로 추측하였다. 대대로는 고구려 후기의 최고 관직이었기 때문에 이에 도전할 수 있는 자는 당시 정치권력이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 중에서 선임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조건에 맞는 무리는 양원왕대 정국을 주도한 추군 세력이었을 것으로 보았다.(민철희, 2002)

『양서』권3 무제 하 태청 2년조에 따르면 양원왕은 재위 3년(548) 3월에 남조(南朝)의 양(梁)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는데, 이 3년간의 시차를 양원왕 즉위 초 고구려 내정이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반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책봉을 통해 양원왕은 양과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으며, 이는 자신의 대외적 입지를 넓히는 데도 기여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삼국사기』권19 고구려본기7 양원왕 2년조의 왕도의 배나무 가지가 서로 붙었다는 기록이나 4년조의 환도(丸都)에서 상서로운 벼를 바쳤다는 사실도 양원왕이 정국을 수습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551년 유연(柔然)이 돌궐(突厥)에 궤멸당하고, 북제(北齊)에서 요해(遼海) 원정을 단행하면서 고구려와 포로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는 등 대륙 정세가 불안해졌다. 그리고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 연합군이 한수 유역으로 진출하자 양원왕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통합의 구심점으로 부상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인을 송환하여 북제와의 갈등을 해결하고 신라와 물밑접촉을 하여 백제와 갈라놓는 데 성공하였으며, 재위 7년(552) 장안성(長安城)을 축조하여 국내 방비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재위 12년에는 환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이를 진압하여 왕권에 도전하던 귀족세력이 제거되고, 이는 뒤이은 평원왕대 내정의 안정을 가져오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양원왕은 고구려 안팎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김진한, 2007)

『삼국사기』권19 고구려본기7 양원왕 15년조(559)에는 봄 3월에 왕이 죽었다고 하였으며, 아들 양성(陽城)이 뒤를 이어 고구려 제25대 평원왕(平原王)이 되었다.

참고문헌

노태돈, 1999,『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민철희, 2002,「高句麗 陽原王·平原王代의 政局變化」『史學志』25.
임기환, 2004,『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김진한, 2007,「陽原王代 高句麗의 政局動向과 對外關係」『동북아역사논총』17.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四 陽原王 [一云陽崗王 名平成 乙丑立 理十四年]
제24 양원왕 [혹은 양강왕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평성이다. 을축년에 즉위하여 14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