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룡집

옥룡집

분류 문학 > 국가 > 고려

기본정보

고려시대의 도참서

일반정보

고려시대의 도참서로 황룡사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전문정보

『옥룡집』은 『삼국유사』 권3 탑상4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조에서 「자장전(慈藏傳)」 및 제가(諸家)의 전기(傳紀)와 같이 “신라(新羅)의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데, 이곳은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 터이며 지금 황룡사(皇龍寺)의 지역으로 7가람의 하나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하였다.

『옥룡집』은 그 이름으로 보아 고려시대 도참서 중의 하나로 본 견해가 있다. 고려시대 여러 종류의 도참서들이 도참설의 개창조로 여겨진 도선(道詵, 827-898)에게 가탁하여 『도선기(道詵記)』,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밀기(道詵密記)』 등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또한 도선은 옥룡사(玉龍寺)에 35년간 주석했는데, 이 때문에 도참서들이 『옥룡기(玉龍記)』, 『옥룡집(玉龍集)』으로 불리기도 하였다는 것이다.(이병도, 1948)

참고문헌

이병도, 1948, 『高麗時代의 硏究』, 을유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가섭불연좌석)
迦葉佛宴坐石
玉龍集及慈藏傳 與諸家傳紀皆云 新羅月城東 龍宮南 有迦葉佛宴坐石 其地卽前佛時伽藍之墟也 今皇龍寺之地 卽七伽藍之一也 按國史 眞興王卽位十四 開國三年癸酉二月 築新宮於月城東 有皇龍現其地 王疑之 改爲皇龍寺 宴坐石在佛殿後面 嘗一謁焉 石之高可五六尺 來圍僅三肘 幢立而平頂 眞興創寺已來 再經災火 石有拆裂處 寺僧貼鐵爲護 乃有讚曰 惠日沈輝不記年 唯餘宴坐石依然 桑田幾度成滄海 可惜巍然尙未遷 旣而西山大兵已後 殿塔煨燼 而此石亦夷沒 而僅與地平矣 按阿含經 <迦>葉佛是賢劫第三尊也 人壽二萬歲時 出現於世 據此以增減法計之 每成劫初 皆壽無量歲 漸減至壽八萬歲時 爲住劫之初 自此又百年減一歲 至壽十歲時 爲一減 又增至人壽八萬歲時 爲一增 如是二十減二十增 爲一住劫 此一住劫中 有千佛出世 今本師釋迦是第四尊也 四尊皆現於第九減中 自釋尊百歲壽時 至迦葉佛二萬歲時 已得二百萬餘歲 若至賢劫初第一尊拘留孫佛時 又幾萬歲也 自拘留孫佛時 上至劫初無量歲壽時 又幾何也 自釋尊下至于今至元十八年辛巳歲 已得二千二百三十矣 自拘留孫佛 歷迦葉佛時 至于今 則直幾萬歲也 有本朝名士吳世文 作歷代歌 從大金貞祐七年己卯 逆數至四萬九千六百餘歲 爲盤古開闢戊寅 又延禧宮錄事金希寧所撰大一<曆>法 自開闢上元甲子 至元豊甲子 一百九十三萬七千六百四十一歲 又纂古圖云 開闢至獲麟 二百七十六萬歲 按諸經 且以迦葉佛時至于今 爲此石之壽 尙距於劫初開闢時爲兒子矣 三家之說 尙不及玆兒石之年 其於開闢之說 疎之遠矣

가섭불연좌석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및 제가(諸家)의 전기(傳紀)에는 모두 이르길, 신라(新羅)의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다. 그 곳은 즉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 터이니 지금 황룡사(皇龍寺)의 지역은 7가람의 하나라 하였다. 『국사(國史)』에 의하면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즉위 14년인 개국(開國, 551-567) 3년(553) 계유 2월에 월성 동쪽에 신궁(新宮)을 건축할 때 그 지역에서 황룡이 나타나므로 왕이 의아스럽게 여겨 고쳐 황룡사(皇龍寺)로 삼았다. 연좌석(宴坐石)은 불전후면(佛殿後面)에 있었다. 전에 한번 참배한 바 돌의 높이는 5·6척 가량이고 그 둘레는 겨우 3발이며 우뚝하고 위는 편편하였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뒤로 두 번 화재를 겪어 돌에 갈라진 곳이 생겼으므로 사승(寺僧)이 철(鐵)을 붙여 보호하였다. 찬한다. “혜일(惠日)의 광휘(光輝), 그 어느 때 침쇠(沈衰)했던가 쓰여 있지 않으나 오직 연좌석만은 의연히 남았도다. 상전(桑田)이 몇 번이나 변해 창해(滄海)가 되었더냐. 애닮다, 아직도 우뚝한 채 그 자리를 옮기지 아니했도다.”그 후 서산(西山)의 큰 병란(몽고의 침입) 이후 불전과 탑이 모두 타버리고 이 돌도 파묻혀 겨우 땅과 평평하게 되었을 뿐이다.『아함경(阿含經)』을 보면 가섭불(迦葉佛)은 현겁(賢劫) 제3존(第三尊)이라 사람의 나이로 2만 세 때에 세상에 출현하였다 한다. 이에 의하여 증감법(增減法)으로 계산하면 언제나 성겁(成劫)의 처음에는 모두 무량세(無量歲)를 누리지만, 점점 줄어들어 수명 8만 세에 이르면 그 때는 주겁(住劫)의 처음이 된다. 이때로부터 또 1백년에 1세씩 감(減)하여 10세에 이르는 사이가 1감(一減)이 되고 또 증가하여 수명이 8만 세에 이르는 사이가 1증(一增)이다. 이렇게 20번 감(減)하고 20번 증(增)하면 1주겁(一住劫)이 된다. 이 1주겁 중에 천불(千佛)이 세상에 출현하는데, 지금 본사(本師) 석가(釋迦)는 제4존(第四尊)이다. 4존(四尊)은 다 제9감(第九減) 중에 나타난다. 석존(釋尊)이 1백세를 누린 때부터 가섭불(迦葉佛)이 2만세를 누릴 때까지는 이미 2백만여 세나 되었다. 만일 현겁(賢劫)의 초기의 제1존(第一尊)인 구류손불(拘留孫佛)때에 이른다면 또 몇 만 세가 될 것이며, 구류손불(拘留孫佛)때로부터 위로 겁초(劫初)의 무량세(無量歲)를 누릴 때까지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석존(釋尊)때부터 내려와 지금의 지원(至元, 1264-1294) 18년 신사(辛巳, 1281)에 이르기까지가 이미 2천 2백 30년이 되었으니, 구류손불(拘留孫佛)때부터 가섭불(迦葉佛)의 시기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몇 만 년이나 될 것이다. 본조(本朝, 고려)의 명사(名士) 오세문(吳世文)이 지은 「역대가(歷代歌)」에 금(金)나라 정우(貞祐, 1213-1217) 7년 기묘(己卯, 1219)에서 거슬러 4만 9천 6백여 세에 이르면 즉 반고(盤古)가 개벽(開闢)하던 무인(戊寅)이 된다고 하였다. 또 연희궁녹사(延禧宮錄事) 김희령(金希寧)이 지은 「대일역법(大一曆法)」에는 개벽(開闢)의 상원(上元) 갑자(甲子)로부터 원풍(元豊, 1078-1085) 갑자(甲子, 1084)에 이르기까지가 193만 7천 6백 41세라 하였고, 또 「찬고도(纂古圖)」에는 개벽(開闢)에서 획린(獲麟, 기원전 477) 때까지가 276만 세라 하였다. 여러 경을 보면 가섭불(迦葉佛) 때로부터 지금까지가 이 (연좌)석의 나이가 된다 하였으니, 겁초(劫初) 개벽(開闢)한 시기와 서로 떨어져 있음은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삼가(三家)의 말이 오히려 이 어린아이 돌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개벽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나 소홀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