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제석원

외제석원

분류 문학 > 국가 > 고려

기본정보

고려시대 개경에 있던 사찰.

일반정보

고려 태조 7년(924) 개경(開京)에 창건된 사찰이다

전문정보

외제석원(外帝釋院)은 고려 태조(太祖)가 재위 7년(924) 창건한 사찰이다. 외제석원의 창건 기사는『삼국유사』 왕력과 『고려사』 권1 세가(世家)1 태조 7년조에는 □외제석원․구요당․신중원을 창건하였다.{創外帝釋院·九耀堂·神衆院)□를 통해 전하고 있다. 외제석원의 위치에 대해 전하는 기록은 없으나, 고려 태조 초기에 개경 성내와 송악산 기슭에 많은 절을 창건한 것으로 볼 때, 외제석사 또한 개경에 위치한 것으로 추측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 태조가 919년 창건한 내제석원(內帝釋院)과 구별할 목적으로 “외”자를 붙인 것으로 보이며, 이는 궁궐의 안과 밖이라는 위치상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제석원은 개경 궁궐의 밖에 있었던 사찰로 볼 수 있다.(안지원, 2005)

고려의 태조는 수도인 개경(開京)에 많은 사찰을 창건하였다. 태조는 사찰 건립 문제를 훈요십조(訓要十條)의 두 번째 조항으로 남기고 있을 만큼 중요시하였다. 또한 태조는 도선(道詵)이 지정한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에 따라 사찰을 창건해야한다는 사원비보사탑설(寺院裨補寺塔說)을 강조하면서 이외의 장소에 함부로 사찰을 개창(開創)하여 지덕(地德)을 쇠하게 만들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이것은 태조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입각하여 사찰을 건립하고자 했음을 확인시켜 준다.(최병헌, 1975)

이처럼 태조가 무분별한 사찰 창건을 경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태조가 개경에 많은 사찰을 건립한 것은 경주 중심의 고대적 불교기반을 개경으로 재편하려는 의도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불법(佛法)의 수호자임을 널리 알려 민심을 집중시키고 정치적 통일과 더불어 불교를 통한 사상적 통일을 이루려는 목적 때문이다. 새로운 국가 기반을 조성하는 데 있어 민심과 밀착되어 있는 불교를 중요한 역할을 하고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것에 불교계의 협조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지방 세력의 할거와 더불어 분열되어 있는 종단(宗團)을 정리하고, 중앙을 통해 효과적으로 관리하조가 하는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기도 하였다.(안지원, 2005)

태조 초기에 창건된 사찰들은 대부분 개경의 궁궐 주변이나 송악산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당시 사찰의 기능과 관련있었다. 태조는 팔관회(八關會)‧연등회(燃燈會)‧제석신앙(帝釋信仰)‧무차대회(無遮大會)‧미륵신앙(彌勒信仰) 등 중요 불교행사를 각 사찰에 분담시켜 각 종파(宗派)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그곳에서 중요한 불교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며, 동시에 사찰의 위치가 아직 제도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궁궐을 보완하는 기능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찰의 설치는 태조 초기 대체로 개경의 중심부 궁궐 주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점차 창건되는 사찰의 위치가 개경 중심부에서 송악산 위쪽으로 확대되었다. 그 이유는 후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개경의 도시구조 틀이 잡히게 되었기 때문에, 중심부에는 더 이상 큰 사찰이 들어설 공간이 확보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추측한다.(박종진, 2000)

외제석원은 내제석원과 함께 제석신앙의 중심 사찰이었다. 제석신앙은 제천(諸天)과 권속중(眷屬衆)을 거느리면서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다. 또한 권능과 변신을 동원하여 정법(正法)을 받드는 사람과 그 지역이나 국토를 수호하고 그 경전까지 수호하게 된다. 인간의 선행 정도에 따라서 제석의 힘이 강대해지며, 따라서 정법을 받드는 사람에 대한 수호력도 증가하게 된다는 인간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어 사회성‧국가성을 띄고 있다. 태조는 이러한 제석신앙을 전개함으로써 민중교화 함께 호국적 의미를 찾으려 하였다.

외제석원과 내재석원은 내덕외덕(內德外德)의 분류에 따라 세워진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내제석원는 제석신앙을, 외제석원는 사천왕(四天王)을 비롯한 제석천(帝釋天)의 권속중에 대한 의례가 행하여 졌던 것으로 본다.(서윤길,1976) 그리고 내제석원이 존재하는데 다시 외제석원을 창건한 이유는 외제석원은 궁궐 밖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내제석원보다는 귀족들과 일반민이 접근하기 용이하며, 제석신앙을 확산시키는데 유리하였기 때문이다.(안지원, 2005)

참고문헌

최병헌, 1975, 「道詵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風水地理說」 『韓國史硏究』11.
서윤길, 1976, 「高麗의 帝釋信仰」『佛敎學報』15.
한기문, 1998, 『高麗寺院의 構造와 機能』, 민족사.
박종진, 2000, 「고려시기 개경 절의 위치와 기능」 『역사와 현실』38.
안지원, 2005,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太祖[戊寅六月裔死 太祖卽位于鐵原京 己卯 移都松岳郡 是年 創法王 慈雲 王輪 內帝釋 舍那
又創天禪院 [卽普<濟>] 新興 文殊 (靈)通 地藏 前十大寺皆是年所創 庚辰 乳岩下立油市 故今俗利市云乳下 十月創大興寺 或系壬午 壬午 又創日月寺 或系辛寺 甲申 創外帝釋 新衆院 興國寺 丁亥 創妙寺 己丑 創龜山 庚寅安] 丙申統三
태조[무인년(918) 6월에 죽으니 태조가 철원경에서 즉위하였다. 기묘년(919)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이 해에 법왕·자운·왕륜·내제석·사나 등의 절을 세우고 또 천선원[곧 보제]·신흥·문수·영통·지장 등의 절을 세웠으니 앞의 10대 사찰은 모두 이 해에 창건되었다. 경진년(920)에 유암 아래에 유시를 설치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 항간에서는 시장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유하라고 한다. 10월에 대흥사를 세우니 또는 임오년(922)의 일이라고도 한다. 임오년(922)에 또 일월사를 세우니 또는 신사년(921)의 일이라고도 한다. 갑신년(924)에 외제석·신중원·흥국사를 세우고, 정해년(927)에는 묘사를 기축년(929)에 귀산사를 세웠으며 경인년(930)에 안(이하미상)] 병신년(936)에 삼국을 통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