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

김락

분류 문학 > 국가 > 고려

기본정보

고려의 장수

생몰연대 : ?-927

일반정보

고려의 장수로, 태조 10년(927) 7월에 후백제군을 격파하기도 하였으나, 곧 후백제와의 공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신숭겸과 함께 전사하였다

전문정보

김락(金樂)은 고려의 장군으로, 태조 10년(927) 7월에 후백제군을 격파하기도 하였으나, 곧 후백제와의 공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신숭겸과 함께 전사하였다.

김락에 대하여 『삼국유사』 권2 기이 후백제견훤(後百濟甄萱)조에는, 천성(天成) 2년 정해(927)에 태조가 정예 기병(騎兵) 5,000명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했으며, 태조만이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같은 내용이『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甄萱)조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조금 앞선 때의 김락(金樂)에 대한 행적이 『고려사(高麗史)』 권1 세가1 태조1 정해 10년(927) 가을 7월 무오일조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원보 재충(在忠), 김락(金樂) 등을 보내 대량성(大良城, 경남 합천)을 격파하고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 30여 명을 포로로 하였다.(遣元甫在忠金樂等 攻破大良城 虜將軍鄒許祖等三十餘人)”고 하였다.

김락(金樂)의 죽음과 관련하여 『고려사』 권92 열전5 홍유(洪儒) 부(附) 신숭겸(申崇謙)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0년(927)에 태조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과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어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였는데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대장으로 있었는데,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태조가 그의 전사를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동생 능길(能吉), 아들 보(甫), 김락(金樂)의 동생 철(鐵)을 모두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崇謙初名能山光海州人 長大有武勇 十年 太祖與甄萱戰於公山桐藪不利萱兵圍太祖甚急 崇謙時爲大將與元甫金樂力戰死之 太祖甚哀之 謚壯節 以其弟能吉子甫樂弟鐵並爲元尹 創智妙寺 以資冥福)”

위의 기록들을 정리해보면, 김락(金樂)은 927년 7월에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더불어 대량성(大良城)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후백제의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 30여 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같은 해에 견훤이 신라를 쳐서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니, 이를 구원하려던 왕건이 오히려 공산(公山) 전투에서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에 김락은 신숭겸과 함께 왕건을 구하고 전사하였던 것이다.(이인재, 2001)

고려 예종 15년(1120)에는 팔관회를 개최할 때 유희를 관람하던 왕이 국초의 공신인 김락고 신숭겸을 추도하면서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김기탁, 1982)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主乙 完乎白乎 心聞際 天乙及昆 魂是 去賜矣中 三烏賜 敎職麻 又欲望彌 阿里刺 及彼可 二功臣良 久乃 直隱跡烏隱 現乎賜丁
님을 온전케 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이 가셨으되/ 몸 세우고 하신 말씀/ 직분 맡으려 활 잡은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功臣)이여/ 오래 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저(김완진, 1980)

참고문헌

김완진, 1980, 『鄕歌解讀法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김기탁, 1982, 「悼二將歌에 對하여」『嶺南語文學』9.
이인재, 2001, 「羅末麗初 申崇謙의 生涯와 死後評價」『江原文化史硏究』6.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後百濟 甄萱
… 天成二年丁亥九月 萱攻取近品城[今山陽縣]燒之 新羅王求救於太祖 太祖將出<師> 萱襲取高鬱府[今蔚州] 進軍<於>始林[一云雞林西郊] 卒入新羅王都 新羅王與夫人出遊鮑石亭時 由是甚敗 萱强引夫人亂之 以王之族弟金<傅>嗣位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之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 太祖僅以身免 而不與相抵 使盈其貫 萱乘勝轉掠大木城[今若木]京山府康州攻缶谷城 又義成府之守洪述拒戰而死 太祖聞之曰 吾失右手矣 四十二年庚寅 萱欲攻古昌郡[今安東] 大擧而石山營寨 太祖隔百步而郡北甁山營寨 累戰萱敗 獲侍郞金渥 翌日萱收卒襲破順城 城主元逢不能禦棄城宵遁 太祖赫怒 貶爲下枝縣[今豊山縣 元逢本順城人故也] 新羅君臣以衰季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萱聞之 又欲入王都作惡 恐太祖先之寄書于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宗社丘墟 僕是以先著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皎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奸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表弟 <憲>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都頭索湘束手星山陣下 月內左將金樂曝骸美利寺前 殺獲居多 追禽不小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久通和好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免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誡 無後悔之自貽 (天)(成)二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使班尙書所傳詔旨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叙事者 伏以華軺膚使爰到制書 尺素好音兼蒙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托廻軒 輒敷危袵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其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爲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癸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乃交兵 足下始輕敵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永世歡和 苟或渝盟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卽我有大德於南人也 豈期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侵害於生民 狼虎之狂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奸 …
후백제 견훤
… 천성(天成, 926-930) 2년 정해(927) 9월에 견훤은 근품성(近品城)[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서 빼앗고 그 성을 불사르니,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가 장차 출병하려는데, 견훤은 고울부(高鬱府)[지금의 울주(蔚州)]를 습격하여 빼앗고 시림(始林)[또는 계림(雞林)의 서쪽 교외]에 진군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신라왕은 이 때 부인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고 있었으므로, 더욱 쉽게 패했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끌어다 강제로 욕보이고, 왕의 친족 아우인 김부(金傅)로 하여금 왕위을 잇게 하였다. 그 뒤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또 신라의 진귀한 보물과 병기를 빼앗고 자녀들과 각종 공인(工人) 중에서 우수한 자들을 끌고 갔다. 태조는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다. 태조의 장수인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죽고 모든 군사들이 패배했으며, 태조는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그리하여 견훤에게 저항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많은 죄악을 범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 이긴 기세를 몰아 견훤은 대목성(大木城)[지금의 약목(若木)]‧경산부(京山府)‧강주(康州)를 노략질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하였다. 또 의성부(義成府)의 태수 홍술(洪述)은 대항하여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을 듣자 태조가 말하기를, “나는 이제 오른쪽 손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견훤이 즉위한 지) 42년 경인(930)에 견훤은 고창군(古昌郡)[지금의 안동(安東)]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켜서 석산(石山)에 진을 치니, 태조는 100보 가량을 서로 떨어져서 고을 북쪽 병산(甁山)에 진을 쳤다. 여러 번 싸워서 견훤이 패했으며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 잡았다. 다음날 견훤이 군사를 거두어 순성(順城)을 습격하자, 이를 막지 못한 성주 원봉(元逢)은 밤에 성을 버리고 도망했다. 이에 몹시 노한 태조는 그 고을을 격을 낮추어 하지현(下枝縣)[지금의 풍산현(豊山縣)이니, 원봉은 본래 순성 사람인 까닭이다.]으로 삼았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나라가 쇠망해 가는 상황에서 부흥할 길이 없었으므로,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후원을 삼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견훤이 다시 신라의 서울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태조가 먼저 들어갈 것을 염려해서 태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난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족하(足下, 고려 태조를 이름)를 장차 서울로 불러들이려 함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이니, 반드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묘와 사직을 폐허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까닭에 먼저 진(晉)나라 사람인 조적(祖逖)의 말채찍을 쥐고, 단신으로 수나라 장수 한금호(韓擒虎)의 도끼를 휘둘러, 백관들에게 밝은 태양처럼 맹세했고, 6부 백성들에게는 옳은 교화로써 타일렀다. 뜻밖에 간신은 도망하고 임금은 세상을 떠나는 변고가 생겼다. 이에 경명왕(景明王)의 외종제(外從弟)인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어진 임금을 잇게 하여 이제야 자리가 잡혔다. 그런데도 족하는 나의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한갓 떠도는 말만을 믿어, 온갖 계책으로 틈을 노리고 여러 곳으로 침범하여 소동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도 뽑지 못하였다. 이 겨울 초순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밑에서 항복했고, 또 그 달 안에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전사하였다. 이밖에도 죽은 자와 사로잡힌 자가 많았으며 추격을 받아 붙잡힌 자도 적지 않았다. 이렇듯 강함과 약함이 분명하니 누가 이기고 질 것인가는 알만한 일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고, 패강(浿江)의 물을 내 말에게 먹이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국왕의 조서를 전하기를, ‘경은 오랫동안 고려와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는 사이로서 함께 선린의 맹약을 맺은 줄 알았다. 근래에 양편의 볼모가 죽어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관계를 버리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을 멈추지 않으므로 일부러 사신을 보내어 경의 나라로 가게하고 또한 고려에도 글을 보냈으니 마땅히 서로 친목하여 길이 평화를 도모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의리로서는 왕실을 높이는 데에 돈독하고, 큰 나라를 섬기는 데에 전념해 오던 차에 이제 오월왕의 조칙을 듣고 즉시 받들려고 한다. 하지만 족하(고려 태조를 이름)가 싸움을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가 없어서,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는 것을 걱정하는 바이다. 이제 그 조서를 베껴 보내니 청컨대 유의하여 자세히 살피기 바란다. 토끼와 사냥개가 함께 지치면 마침내는 필시 남의 조롱을 받으며,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면 또한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마땅히 미혹함을 경계하여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부르지 않도록 하라.” 천성 2년(927)정월에 태조는 회답을 보냈다. “삼가 오월국의 사신 반상서가 전한 조서 한 통을 받들고, 겸하여 족하(견훤을 이름)가 준 편지도 받아 보았다. 삼가건대 사신의 행차 편에 전달된 조서나 좋은 소식을 전하는 편지에서 아울러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고 보니 비록 감격이 더하였지만, 당신(견훤을 이름)의 편지를 펴보고서는 의심스러운 마음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제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탁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직권을 맡아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다. 지난번에 삼한(三韓)이 액운을 당하고, 모든 국토가 흉년으로 황폐해져서, 백성들이 모두 황건적에 들어가고, 논밭은 모두 거둘 곡식이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무릇 난리의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난을 구하고자 이에 스스로 선린의 우호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 국토가 농사와 잠상(蠶桑)으로 생업을 즐기고, 사졸은 7,8년 동안은 한가로이 쉬었다. 계유년(癸酉年) 10월에 갑자기 사건이 생기므로 곧 싸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족하가 처음에 적을 가벼이 여겨 곧장 달려드는 것이 마치 버마재미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수레를 막으려 함과 같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물러감은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도 같았다. 손을 모아 인사하고는 공손히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길이 화목하며, 혹여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도 또한 창칼을 쓰지 않는 무(武)를 숭상하고, 생명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기약하여, 마침내 여러 겹으로 포위했던 것을 풀고 지친 군사들을 쉬게 했으며, 볼모를 보내는 일도 거절하지 않고 오직 백성들이 편안해지도록 하려 하였다. 이는 내가 남쪽의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었는데, 어찌 맹약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행동을 다시 할 줄 알았으랴! 벌과 전갈은 독이 있어 미물이면서도 사람에게 해를 끼쳤고, 이리나 범과 같은 광포한 행동은 서울 땅을 가로막았다. 금성(金城)이 궁색하여 위급해졌고, 왕실은 몹시 놀라 흔들렸으나, 누가 패도(覇道)를 이룬 환공(桓公)과 문공(文公)처럼 대의에 의거하여 주(周)나라를 떠받들겠는가? 다만 기회를 보아 한(漢)나라를 도모하고자 하던 왕망(王莽)과 동탁(董卓)의 간사함을 볼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