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검

왕검

분류 문학 > 국가 > 고조선

기본정보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檀君)의 칭호

일반정보

왕검은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檀君)의 칭호이다. 왕검은 이두자로 보면 임금이란 뜻인데 단어의 의미로 보아 특정한 권위와 권력을 표시하는 존칭, 존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단군이란 말에 제주(祭主)적 의미가 있으므로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전문정보

왕검이란 명칭은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에 나오는 단군왕검(壇君王儉) 이외에도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1년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집이다. 혹은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한다.(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라는 기록에도 보인다. 이 선인왕검을 단군이라고 한다면, 단군은 평양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 된다.(서영대, 1994)

왕검은 이두자로 보면 임금이란 뜻인데(신채호, 1948), 왕(王)이 임(壬)이면 왕검(王儉)은 왕의 뜻인 임금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김두진, 1988) 왕검은 단어의 의미로 보아 특정한 권위와 권력을 표시하는 존칭, 존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윤명철, 1988)

왕검은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檀君)의 칭호이다. 왕검을 존승(尊勝), 장상(長上)의 뜻을 가지고 있는 ‘알’ 또는 ‘암’과 대인(大人)·신성인(神聖人)의 뜻을 가지고 있는 ‘가’ 또는 ‘감’이 합쳐서 이루어진 ‘엉큼’ 혹은 ‘imagefontimagefont’·‘imagefontimagefont’의 대역(對譯)으로 파악하여 왕호(王號) 특히 무군(巫君)적 칭호로 보는 의견이 있다.(최남선, 1973)

이에 대하여 단군이란 명칭에 제주(祭主)적 의미가 있으므로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이 있다. 즉 제정일치시대에는 단군만 존재하였지만, 후에 제정이 분리되면서 제사(祭祀) 단체의 장은 단군, 정치 단체의 장은 왕검이라고 하고, 그가 맡았던 지역도 달랐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도읍인 왕험성(王險城)의 명칭도 여기서 기원한다고 하였다.(이병도, 1976)

참고문헌

신채호, 1948, 『조선상고사』, 종로서원.
최남선, 1973, 『六堂崔南善全集』2. 현암사.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김두진, 1988, 「檀君古記의 이해방향」『檀君神話論集』. 새문사.
윤명철, 1988, 「壇君神話에 對한 構造的 分析」『韓國思想史學』 2.
<참고이미지 자료>
단군영정: 고구려연구재단 편, 2004,『고조선, 단군, 부여』, 고구려연구재단, 87쪽 이미지 참고.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조선[왕검조선]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경에는 무엽산이라고 했고 또 백악이라고도 한다.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 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곰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여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당나라 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방이라고도 한다]홀산 또는 금미달 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라고 하였다. 당의 배구전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 하였으며, 통전에도 이 설과 같다.[한서에서는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으로 되어 있고 지금은 3군이라 하고 이름도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