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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학 > 국가 > 백제

기본정보

백제의 달솔(達率) 또는 좌평(佐平)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백제 말의 달솔(達率) 또는 좌평(佐平)으로 활동한 인물로, 황산에서 신라군에 대항하다 포로로 잡힌 후에는 신라에서 일길찬의 관등과 총관으로 임명되었다.

전문정보

백제의 대신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조와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20년조(660)에서는 “달솔상영(達率常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의 관등이 달솔(達率)로 나와 있으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조에서는 “좌평 충상, 상영등 20여명을 사로잡았다.(虜佐平忠常常永等二十餘人)”라고 하여 좌평(佐平)으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신라와 당의 군사가 백제를 침공하자 그에 대한 방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여 이긴 다음 당의 군사를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었으나, 피곤에 지친 당의 군사를 먼저 공격하자는 의견도 있어 쉽게 방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결국 신라군이 황산(黃山)에 이르자 계백(階伯)과 더불어 신라군을 막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조에는 “좌평 충상, 상영과 달솔백간에게 일길찬의 위를 주어 총관직에 임명하였다.(佐平忠常常永 達率自簡 授位一吉湌 充職摠管)”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의 태종에게 일길찬(一吉湌)의 위(位)를 받고 총관(總管)의 직에 임명되어 신라에서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아 왕도 함락 작전이나 백제 멸망 후 반항세력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신라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노중국, 1988) 또한 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당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였던 것을 신라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면서, 전쟁 후의 포상행적에도 주목하여 그가 나당연합군의 대백제전 승리에 간접적으로 기여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한 연구도 있다.(김수태, 1992)

참고문헌

노중국, 1988, 「統一期 新羅의 百濟故地支配」『韓國古代史硏究』1.
김수태, 1992, 「百濟 義慈王代의 政治變動」『韓國古代史硏究』5.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五年庚申春<二>月 王都井水血色 西海邊小魚出死 百姓食之不盡 泗<沘>水血色 四月 蝦蟆數萬集於樹上 王都市人無故驚走 如有捕捉 驚<仆>死者百餘 亡失財物者無數 六月 王興寺僧皆見 如舡揖隨大水入寺門 有大犬如野鹿 自西至泗<沘>岸 向王宮吠之 俄不知所之 城中群犬集於路上 或吠或哭 移時而散 有一鬼入宮中 大呼曰 百濟亡 百濟亡 卽入地 王怪之 使人掘地 深三尺許 有一龜 其背有文 百濟圓月輪 新羅如新月 問之巫者 云 圓月輪者滿也 滿則虧 如新月者未滿也 未滿則漸盈 王怒殺之 或曰 圓月輪盛也 如新月者微也 意者國家盛 而新羅寢微乎 王喜 太宗聞百濟國中多怪變 五年庚申 遣使仁問請兵唐 高宗詔左<武>衛大將軍荊國公蘇定方 爲神丘道行策摠管 率左衛將軍劉伯英字仁遠 左<武>衛將軍馮士貴 左驍衛將軍龐孝公等 統十三萬兵來征[鄕記云 軍十二萬二千七百十一人 舡一千九百隻 而唐史不詳言之] 以新羅王春秋 爲嵎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定方引兵 自城山濟海 至國西德勿島 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義慈王聞之 會群臣問戰守之計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不習水 羅人恃大國之援 有輕敵之心 若見唐人失利 必疑懼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可也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羅人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師老 先使偏師擊羅 折其銳氣 然後伺其便而合戰 則可得全軍而保國矣 王猶預不知所從 時佐平興首 得罪流竄于古馬imagefont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何 首曰 大槪如佐平成忠之說 大臣等不信曰 興首在縲絏之中 怨君而不愛國矣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卽伎伐浦]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竝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如在籠之雞 罹網之魚也 王曰 然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偕伯 帥死士五千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然兵寡力盡 竟敗而偕伯死之 進軍合兵 薄津口 瀕江屯兵 忽有鳥廻翔於定方營上 使人卜之曰 必傷元帥 定方懼 欲引兵而止 庾信謂定方曰 豈可以飛鳥之怪 違天時也 應天順人 伐至不仁 何不祥之有 乃拔神劍擬其鳥 割裂而墜於座前 於是定方出左涯 垂山而陣 與之戰 百濟軍大敗 王師乘潮 軸轤含尾 鼓譟而進 定方將步騎 直趨都城一舍止 城中悉軍拒之 又敗死者萬餘 唐人乘勝薄城 王知不免 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遂與太子隆[或作孝 誤也] 走北鄙 定方圍其城 王次子泰 自立爲王 率衆固守 太子之子文思謂王泰曰 王與太子出 而叔擅爲王 若唐兵解去 我等安得全 率左右縋而出 民皆從之 泰不能止 定方令士起堞 立唐旗幟 泰窘迫 乃開門請命 於是 王及太子隆王子泰 大臣貞福與諸城皆降 定方以王義慈及太子隆王子泰 王子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 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其國本有五部 三十七郡 二百城 七十六萬戶 至是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等五都督府 <擢>渠長爲都督刺史以理之 命郞將劉仁願守都城 又左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 定方以所俘見 上責而宥之 王病死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許舊臣赴臨 詔葬 孫皓陳叔寶墓側 幷爲竪碑 七年 壬戌 命定方爲遼東道行軍大摠官 俄改平壤道 破高麗之衆於浿江 奪馬邑山爲營 遂圍平壤城 會大雪 解圍還 拜涼州安集大使 以定吐蕃 乾封二年卒 唐帝悼之 贈左驍騎大將軍幽州都督 諡曰莊[已上唐史文]
(현경) 5년 경신(庚申, 660) 봄 2월에는 서울의 우물이 핏빛이 되었고, 서해변에 작은 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것을 다 먹을 수가 없었으며, 사비수가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여들었고, 서울의 저자 사람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니, 마치 무엇이 잡으러 오는 것처럼 놀라 엎어져서 죽은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사람은 다 셀 수 없었다. 6월 왕흥사 승려들이 모두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은 광경을 보았고, 들사슴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수 언덕까지 와서 왕궁을 향해 짖더니 별안간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성중의 여러 개들이 길 위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다가 잠시 후에 흩어졌다. 한 귀신이 궁중에 들어가 크게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하고는 즉시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니, 깊이 3자 가량 되는 곳에서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거북의 등에는 글이 쓰여 있기를, “백제는 둥근달이요.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고 하였다. 그것을 무당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둥근달이란 꽉 찬 것이니, 차면 이지러지는 법이며, 초승달이란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둥근달은 융성한 것이고 초승달은 미약한 것이니,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융성하고 신라는 미약해진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태종은 백제국에 괴변이 많다는 것을 듣고 5년 경신(庚申, 660)에 김인문(金仁問)을 당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당고종(唐高宗)은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형국공(荊國公)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행군총관(神丘道行軍摠管)을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이며 자(字)가 인원(仁遠)인 유백영(劉伯英)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와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병으로써 와서 (백제를) 치게 하였다[향기(鄕記)에는 군졸이 122,711인이며 배가 1,900척이라 하였으나, 당사(唐史)에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신라왕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의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니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을 시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싸우게 하였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군신(群臣)을 모아놓고 싸워서 막아낼 계책을 물으니 좌평(佐平) 의직(義直)이 아뢰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 왔지만 물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신라군사는 대국(大國)의 원조만 믿고 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당나라 사람의 불리함을 보면 반드시 겁을 내 감히 날카롭게 달려들지 못할 것이므로 먼저 당나라 사람과 결전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하였다. 그러나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왔으므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예봉(銳鋒)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며 신라 군사는 우리에게 여러 번 패전했으므로 지금 우리의 군세(軍勢)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아서 그 군사가 피로해질 때를 기다릴 것이며, 먼저 한 부대로써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접전하면, 군사는 온전히 살리고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주저하여 누구의 말을 따를지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가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에 귀양가 있었는데, (왕은) 사람을 보내 묻기를, “사세가 위급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기를, “대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습니다.”고 하였다. 대신들이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가 옥중에 있으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위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채용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백강[즉 기벌포]에 들어와 강을 따라 내려오게 하되, 배 두척이 나란히 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에 올라와 지름길을 밟되, 말을 나란히 하고 오지 못하게 함이 좋을 것이니, 이때 군사를 놓아 적군을 치면 마치 조롱 속의 닭과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럴 것이다.”고 하였다.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장군 계백을 보내 죽기를 각오한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에 가서 신라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4번 접전하여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다해 마침내 패전하여 계백은 전사하였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합세 전진하여 나루 어구에 닥쳐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키자, 문득 새가 소정방의 진영 위에서 빙빙 돌아다니므로 사람을 시켜 점을 쳤더니, “반드시 원수가 부상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유신이 정방에게 말하기를 “어찌 내가 새의 요괴스러운 일을 가지고 천시를 어기겠소. 하늘의 뜻에 응하고 인심에 순종하여 지극히 불인한 자를 치는데 무엇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라고 하고, 곧 신검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가) 찢어져서 자리 앞에 떨어졌다. 이에 정방이 백강의 왼쪽 가에 나아가 산을 등지고 진을 쳐서 함께 싸우니 백제군은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조수를 이용하여 병선이 꼬리를 물고 서로 연이어 북을 치며 전진하였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도성으로 쳐들어가서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성 중에서 전군이 이를 막았으나, 또 패전하여 죽은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성에 들이닥치니, 의자왕은 최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태자 융[또는 효라고도 하나 잘못이다.]과 함께 북쪽 변읍으로 달아나니, 소정방은 그 성을 포위하였다.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 태에게 말하기를, “왕이 태자와 함께 달아났는데 숙부께서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약 당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면 우리들이 어찌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측근자를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가니,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랐으나 태는 막을 수 없었다. 정방은 군사들을 시켜 성첩을 넘어 당나라 깃발을 세우니, 태는 매우 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청하였다. 이에 왕,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정복이 여러 성들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정방은 왕 의자,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 대신, 장사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는데, 이때 와서 (당은 이곳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도독부를 나눠두고 우두머리를 뽑아 도독과 자사를 삼아 이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 유인원에게 명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낭장 왕문도로 웅진도독을 삼아 백제의 남은 백성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이끌고 당나라 황제를 찾아뵈니, 황제는 그들을 꾸짖고 죄를 용서하였다. 의자왕은 (그곳에서) 병들어 죽으니,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을 증직하고, 옛 신하들이 가서 조상함을 허용하고, 손호, 진숙보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게 하고 함께 비를 세워주었다. 7년 임술(壬戌, 662)에 (당나라 황제는) 소정방을 임명하여 요동도 행군총관을 삼았다가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개칭하여, 고구려 군사를 패강에서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 진영으로 정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와서 포위를 풀고 돌아가 (소정방을) 양주 안집대사로 임명하여 토번을 평정하였다. (소정방이) 건봉 2년(667)에 죽으니, 당나라 황제가 애도하여 좌효기대장군 유주도독을 증직하고 시호를 장(莊)이라고 하였다.[이상은 당사(唐史)의 글이다.]